Chapter 179 - 179화 - 아카데미(18)
179화 - 아카데미(18)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엘프 한 명이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웅크려 꾸벅꾸벅 졸았다.
그는 새로 태어난 에반이었다. 표준 인격을 부여받고 보름간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띠띠띠띠!
“헛!”
에반이 머리를 흔들며 벌떡 일어났다.
허둥지둥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살폈다.
[ 북서 13.8km 5성급 몬스터 38개체. ]
이곳은 2층 창고. 문으로 나갈 시간도 없었다. 창문을 열고 몸을 내던졌다.
“플라이!”
중력을 거스르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북서 방향을 향해 바람을 가르고 날아갔다.
콰앙!
저 멀리서 폭음이 들렸다. 사람보다 커다란 갯지렁이가 해안가에 가득했다.
십여 명의 엘프들이 활을 쏘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조심해!”
푸슛!
갯지렁이의 피부가 갈라지더니 가느다란 촉수가 쏘아졌다. 순식간에 자라난 촉수에 한 엘프가 붙잡혔다.
으드득.
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엘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악! 내 팔!”
촤악!
옆에 있던 동료가 촉수를 잘라 그를 구했다.
“조금만 더 버텨! 곧 지원온다!”
에반이 마력을 쥐어짰다. 시야 끝에 있던 그들이 가까워진 순간.
하늘에서 지팡이를 뻗었다.
“하압..!”
쩌저저적!
노란 전격이 뿜어져 갯지렁이 하나를 불태웠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번개가 전이 되기 시작했다.
체인 라이트닝.
지팡이에 각인된 마법을 사용해 갯지렁이 떼를 쓸어 버렸다.
“허억.. 허억..”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억을 잃은 그에겐 감당하기 힘든 마법. 억지로 사용한 탓에 힘이 쭉 빠졌다.
털썩.
도저히 날고 있을 수 없었다. 비틀거리며 땅바닥에 내려왔다.
갯지렁이와 싸우던 엘프들이 다가왔다. 도움받았음에도 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오히려 그를 노려봤다.
팔뼈가 박살 난 엘프가 이를 갈며 말했다.
“어디서 농땡이 피우다 왔길래 이리 늦은 겁니까!”
구해줬음에도 적대적이다. 이유는 명확했다. 마족에게 몸을 넘긴 배반자 에반.
기억에도 없는 과거 때문이었다.
“아, 아닙니다. 히, 힘들어서 잠깐 쉬느라..”
“하.. 됐습니다. 평가 점수 0점 줄 테니까 그런 줄 아쇼.”
“그런···.”
손끝이 잘게 떨렸다. 평가 점수가 떨어지면 온갖 페널티가 걸린다. 식사도 부실해지고 휴식 시간마저 줄어든다.
한 엘프가 그들을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너무 그러지들 말게. 에반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비상 대응센터에 복역하려면 힘들 텐데. 여기서 조금 쉬다 가시죠?”
“무슨 소리야! 저놈이 뭔짓을 했는지 벌써 잊었어?”
“음···. 마족에게 몸을 넘겼다던가.”
“그래! 그 마족놈이 도망쳤으면 도대체 무슨 짓을 했을지 누가 알아! 상상만 해도 끔찍하네.”
“하긴. 그 최시우란 인간 아니었으면 큰일 날뻔 했지.”
그들 사이에서 눈치 보던 에반이 흠칫 놀랐다. 손목이 따끔했다.
띠띠띠띠.
“아..”
또 출동명령이었다. 쉴 시간도 없었다.
다급히 날아올랐다. 시계가 지시하는 곳으로 향했다.
이것은 벌이다. 앞으로 50년. 언제 어디서 나올지 모를 몬스터를 기다리며 출동 대기 상태로 지내야 했다.
*
“으으.. 힘들어..”
에반이 터덜터덜 걸었다.
시계를 힐끔 살폈다.
[ 남은 휴식 시간. 3시간 21분 ]
‘오늘은 운이 좋네. 세 시간이나 쉴 수 있다니.’
몇 안 되는 달콤한 휴식 시간이 찾아왔다.
숙소이자 감옥인 프레이야 신전에 도착했다.
숨죽이고 살금살금 걸었다. 신전에 있던 성직자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읏..”
그녀의 표정이 팍 찡그려졌다. 벌레라도 보는 것처럼 경멸이 가득했다.
배신자를 보는 눈빛. 어딜 가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도망갈 수도 없었다. 손목에 채워진 시계는 최상급 위치 추적기였다.
팔을 잘라도 의미 없었다. 그랬다간 몸 안에 심어진 폭탄이 터지니까.
마족에게 몸을 넘긴 순간. 정해진 미래였다.
‘도대체 나는 왜 그랬을까.’
과거의 멍청한 자신에게 이가 갈렸다. 어떻게 마족 따위한테 몸을 넘겼는지 이해가 안 갔다.
“멍청히 서서 뭐하는 거예요! 복도 더럽히지 말고 빨리 가요!”
“죄, 죄송합니다!”
목을 움츠렸다. 최대한 남들과 마주지치 않도록 조심해서 방으로 들어갔다.
“하아..”
방에 도착하자마자 무릎 꿇고 구석에 앉았다. 이곳이 그의 자리. 그나마 편히 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피곤이 급격히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다가 화들짝 놀랐다.
“헛..!”
어느새 눈앞에 새하얀 하이힐이 보였다.
고개를 올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성녀님이 나긋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어머. 에반 많이 피곤했나 봐요?”
그녀의 미소를 보니 하루 동안 쌓인 피로가 쫙 풀리는 느낌이었다.
“아닙니다. 성녀님 오셨어요?”
“그래요. 오늘도 잘하고 오셨나요?”
“그럼요.”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게으름 부리면 안 돼요.”
“네!”
성녀님의 다정한 어조는 듣기만 해도 행복했다. 무릎 꿇은 에반이 그녀를 몰래 훔쳐봤다.
구두를 또각이며 방안을 둘러보는 모습이 보였다.
“흐응..”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무언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눈치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저어 성녀님..”
“네? 왜 그러시죠?”
친절한 대답이었지만 시선은 그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턱선에 검지를 대고 무언가 고민했다.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청소를 시작했다.
“클린.”
구석구석 먼지를 제거하고 방안에 향수까지 뿌렸다.
성녀님의 부산스러운 모습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그는 회복된 지 얼마 안 됐다. 기억도 보름 정도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더 생소했다.
고개를 갸웃거린 성녀님이 드디어 시선을 줬다.
“왜 불러놓고 말이 없나요?”
“아! 저, 저희는 약혼 관계라던데···. 맞나요?”
“흐응..?”
가만히 내려다보는 시선에 목이 탔다.
빙긋 웃은 그녀가 말을 이었다.
“맞아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에반을 교육하고 관리하는 거잖아요? 마족에게 몸을 넘긴 민폐쟁이를 말이죠.”
“윽.. 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너무 주눅들지 말아요. 막상 해 보니 꽤 재밌더라구요. 교육이란 거.”
“아.. 감사합니다.”
따뜻한 목소리에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약혼 관계인 게 궁금했던 거예요?”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맺혀져 있는 미소가 보기 좋았다.
확실히 오늘은 무언가 달랐다. 보름 사이에 본 모습 중 가장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성녀님. 그.. 약혼 관계면.. 서로 좋아하는 사이니까..”
순간 성녀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망설이다가 용기를 냈다.
“스, 스킨십도 하고.. 그러는 게 정상 아닌가요?”
대답이 없었다.
차가운 눈동자와 마주쳤다가 고개를 팍 숙였다.
시선을 내리깔고 후회했다.
“흐응..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신 거예요?”
“죄, 죄송합니다.”
“됐으니까 말해 봐요. 어디서 들은 거예요?”
“이, 인터넷에서요..”
방안이 조용해졌다. 힐끔 시선을 올렸다가 절로 몸이 떨렸다.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허락도 없이 쓸데없는걸 보시다니···. 하아! 또 혼나야겠네요.”
“죄,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잘못 교육 시킨 제 잘못이 더 크니까···. 앞으론 절대 그러지 말아요. 알겠죠?”
“네, 네..!”
포근한 미소가 돌아왔다. 역시 다정하고 친절한 성녀님이었다.
“그럼. 손바닥 대세요.”
“아..”
“싫어요?”
다가올 고통보다 성녀님의 실망이 더 두려웠다.
“아닙니다!”
다급히 고개 저으며 손바닥을 올렸다.
성녀님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입술을 핥던 그녀가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꺼내 들었다.
“흐응.. 말을 잘 들으니 정말 좋네요. 그럼 다섯 대만 맞을까요?”
“다, 다섯 대나.. 알겠습니다.”
나뭇가지를 보며 덜덜 떨었다. 어제도 저것에 맞았다.
평범한 회초리처럼 보이지만 아티팩트. 그것도 고통을 주기 위해 특별 제작된 체벌용 마도구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찰싹!
“큭..!”
손바닥을 타고 마력이 들어왔다. 뒤이어 강렬한 통증이 따라왔다.
피부가 찢어지는 감각과 함께 불에 타는 고통이 느껴졌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아프신가요?”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팍 숙였다.
“아, 아닙니다. 교육시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아요. 그 태도. 마음에 들어요.”
성녀님의 목소리에 뜨거운 무언가가 담겼다.
찰싹!
“악!”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뎠다.
찰싹! 찰싹!
두 손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에서 쩌저적 하는 소리가 들렸다. 뼈가 으깨진 것 같았다.
찰싹!
“끄으..”
아릿한 통증에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끔찍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손바닥은 멀쩡했다. 마치 전부 환상인 것처럼. 통증만 주기 위해 설계된 마도구의 힘이었다.
“으으..”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를 내려다보던 성녀님이 달뜬 숨결을 내뱉었다.
“하아.. 이 느낌.. 중독될 것 같아..”
왠지 아쉬움이 담긴 목소리가 묘하게 끈적였다.
“어머? 에반. 입술을 그리 깨물면 어떡해요. 아프겠다..”
우웅.
입술에 따스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채찍에 이은 당근.
중독되는 기분이었다. 위치 추적기인 손목 시계가 사라져도 성녀님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늘은 시간이 없으니까.. 여기까지만 할게요.”
또각또각.
그녀가 멀어졌다.
‘어.. 벌써 끝?’
무릎 꿇은 그를 내버려둔 채 거울 앞에 다가갔다.
목까지 감싼 하얀 드레스를 만지작거리며 무언가 고민했다.
“에반. 잠시 눈감고 계세요.”
명령에 곧장 눈을 감았다.
“이제 됐어요.”
몇 초 만에 성녀님의 옷이 달라졌다.
쇄골은 물론이고 풍만한 가슴골. 거기에 겨드랑이까지 드러난 민소매 옷으로 변했다.
입이 쩍 벌어졌다. 엄청나게 자극적인 모습이었다.
양손이 천천히 올라가더니 머리 뒤로 올라갔다. 깨끗한 겨드랑이에 시선을 뗄수 없었다.
“흐응.. 묶은 게 더 낫나..?”
머리를 묶었다 풀었다 하는 성녀님을 멍하니 쳐다봤다. 새하얀 목덜미가 화인처럼 박혀 들었다.
꿀꺽.
“에반 이 드레스는 어때요?”
“예, 예쁩니다. 성녀님..”
“그래요? 너무 야한 거 같은데..”
각도를 바꿔가며 거울에 미모를 과시하던 성녀님이 화장대에 앉았다.
거울을 보며 정성껏 단장하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성녀님이 화장하는 모습은 묘한 마력이 있었다.
“으으..”
하지만 아무것도 못했다. 성녀님의 허락 없이 일어나선 안 됐다.
무릎 꿇은 채 끙끙 앓았다. 애타는 기분을 참고 있을 그때.
벌컥.
노크도 없이 방문이 열렸다.
인간 남자.
그를 본 성녀님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곧바로 일어나 뛰듯이 다가갔다.
“아..! 시우님 오셨어요!”
양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렸다. 머리를 깊게 숙인 모습이 무척 공손해 보였다.
친절하지만 동시에 엄격하던 성녀님의 낯선 모습. 믿을 수 없었다.
“오는데 불편함은 없으셨는지요.”
“별로? 텔레포트로 오니까 편하더라.”
“아! 정말 다행이네요.”
*
시우가 성녀에게 성큼 다가섰다.
그녀의 자태를 감상했다. 터질 것 같은 윗가슴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유두를 겨우 가렸다.
“이 옷은 뭐야?”
“시, 시우님 좋아하실까 봐 입었어요. 너무 야한가요?”
“아냐 딱 좋아.”
“흣..!”
허락도 없이 껴안았다. 서로 배꼽이 닿을 정도로 밀착했다.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고 숨을 들이켰다.
“이 향수도 괜찮네.”
“아.. 기억해둘게요.”
달콤한 체향을 즐기다 시선을 돌렸다.
무릎 꿇은 채 아무것도 못 하는 에반 녀석이 보였다.
놈을 비웃으며 성녀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아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