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83 - 183화 - 아카데미(22)
183화 - 아카데미(22)
앤이 허름한 건물에 들어섰다.
익숙한 길을 따라 거대한 문 앞에 섰다.
“후욱.. 후욱..”
지친 숨을 내쉬며 열쇠를 꺼내 들었다.
동그란 원판 부분에 엄지손가락을 댔다. 열쇠를 구멍에 넣고 돌린 순간.
따끔.
원판에서 튀어나온 가시에 손가락을 찔렸다.
자연스레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열쇠를 타고 문에 스며들었다.
구구궁.
약간의 먼지와 함께 거대한 문이 열렸다.
들어가서 양팔을 펼쳤다.
“스으읍.”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먼지 가득한 창고인데도 상쾌했다. 느껴지는 공기부터 달랐다.
“하아..”
히죽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벽과 천장. 사방에 도배된 잘생긴 남자사진이 보였다.
사진의 주인공은 바로 강수호.
고등학교부터 노려왔던 사냥감이자 그녀의 낭군님.
창고 선반에 정리된 물건을 일일이 살폈다.
부작용 때문에 사용이 금지된 도핑 물약부터 포박용 마도구까지.
“흐음..”
보통 사람이라면 뜨악할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익숙했다. 적어도 기억을 잃은 한 달 동안 구매한 물건은 아니다.
“아!”
드디어 낯선 물건을 발견했다. 기억이 사라진 동안에 구매한 것들. 그것들을 한데 모아 정리했다.
‘플레시아 꽃잎 농축액···? 미약이네? 마약도 있고.’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을지 고민하다가 다이어리를 집어 들었다.
[수호 관찰 일지]
-제나년이 자꾸만 수호에게 달라붙는다. 이년을 어떻게 떼어내지. 확 죽여 버릴까.
-수호는 친절하면서 은근히 벽이 있다. 그게 멋진 거지만.. 도저히 답이 없다. 차라리 강제로 해 버릴까?
그녀가 작성한 기록들. 모두 수호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다.
“음.. 이건 다 아는 거고.”
다이어리를 촤르륵 넘겼다. 끝부분으로 넘어갔다.
모르는 내용이 나왔다. 사라진 한 달의 기억이 담긴 메모들.
-크흐흐.. 수호랑 파트너가 되다니. 정말 운이 좋았다.
-세상에! 드디어 수호의 약점을 잡았다.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영상이 조금 약해서 문제긴 한데··· 이걸 미끼로 사용하면 될 거 같아.
“영상?”
머리를 뒤져 봤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혀를 차곤 계속 읽었다.
-이 계획만 성공하면 수호는 내 거야! 먼저 제대로 된 영상을 찍고··· 차근차근 마약까지 중독시키면 끝! 나한테 벗어나지 못할 거야. 히히힛!
미간을 찡그렸다. 분명 자기 필체인데 낯설었다. 마치 남이 쓴 것 같았다.
“끄응. 도대체 영상이 뭐지?”
머리를 굴렸다.
‘아무래도 약점을 잡은 것 같긴 한데···.’
고민하다보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아 됐어.”
힘들게 머리 굴릴 시간에 들이받는 걸 선택했다.
[내 노예♥]
뚜르르.. 뚜르르.. 뚜르르..
“왜 이리 안 받아?”
미간이 팍 찡그려졌다.
신호가 한참 갔는데 전화를 안 받았다. 주머니를 더듬었지만 피자빵은 이미 먹고 없었다.
띡.
“아! 수호야?”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이게..!”
두꺼운 손으로 화면을 두드렸다.
[수호. 전화 안 받아? 영상에 대해 할 말 있는데?]
지이잉! 지이잉!
곧장 걸려 오는 전화에 눈을 빛냈다. 생각보다 제대로 된 약점인 것 같았다.
사라진 영상과 기억이 아쉬웠다.
딸각.
“여보세요?”
-···갑자기 영상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다가 툭 찔러봤다.
“무슨 소리긴.. 우리가 말할 영상이면 뻔하지 않아?”
-너..! 서, 설마··· 기억이라도 돌아온 거야?!
다급해진 목소리를 듣고 눈가를 좁혔다. 지금 이 순간 확신했다. 영상은 강수호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글쎄 어떨까..”
-이익! 좋은 말로 할 때 당장 지워! 어차피 나한테 원본 있다고! 더 이상 나도 안 참아! 아직도 내가 호군줄 알아!
기억이 사라진 것도 강수호와 연관된 일임을 직감했다.
“하..”
뒤통수가 뻐근했다. 배신감이 치밀었다. 얼마나 잘해줬는데···.
빠드득 이를 갈았다.
분노로 떨리는 목소리를 감췄다. 최대한 태연하게 말했다.
“영상에 대해 서로 할 말이 많을 거 같은데··· 우리 만날까?”
-···좋아. 어디서?
“뭐 어디 근처 카페나..”
-아니. 밖에서 보자.
“응..?”
당혹스러웠다. 처음 들어 보는 단호한 음성이었다.
-도시 밖에서 보자고.
전화를 끊은 앤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뭐지..?”
병원에 입원한 사이에 수호가 달라진 것 같았다.
*
전화를 끊은 강수호가 이를 갈았다.
“이년이..”
스마트폰을 잡은 손이 덜덜 떨렸다. 두려움이 아닌 분노 때문이었다.
영상가지고 지긋지긋하게 우려 먹던 앤. 그년이 또 돌아왔다.
열불이 터졌다. 벽돌로 내려칠 때 힘 뺀 것을 뒤늦게 후회했다.
‘감히..!’
좋게 좋게. 말로 해서 끝나면 가장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남들에겐 비밀로 했지만 얼마 전. 그는 5성에 올랐다. 그런데 앤은 아직도 4성.
그냥 싸워도 이길 테지만 준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곧장 집안 창고를 열었다. 비상용으로 구비해 둔 아티팩트를 쓸어 담았다.
마지막으로···.
혹시 모를 보험으로 예약 문자까지 걸었다.
“후..”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도시 밖. 아까와는 다른 이유로 손끝이 떨렸다.
‘난 용사야. 앤따위한테 또 당할 순 없다고.’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떨림이 멈췄다.
허리에 검을 찼다. 눈매를 굳히며 집을 나섰다.
***
한편.
국외 텔레포트 거점.
“어..”
입국 심사대에 근무하던 남자가 입을 쩍 벌렸다.
눈앞에 있는 여자의 미모에 넋이나갔다. 턱을 타고 침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이, 이혜진님? 써, 썬글라스를 벗어 주셔야 하는데요.”
“마력패턴이면 본인확인은 되지 않나요?”
“호, 혹시 모르니까요.”
“뭐··· 그래요.”
대수롭지 않게 슬쩍 치운 썬글라스. 그 속에 감춰진 얼굴에 남자의 턱이 툭 떨어졌다.
허겁지겁 침을 닦았다. 겨우 정신 차렸다.
“헙..! 화, 확인됐습니다. 이혜진님. 서울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머. 친절하셔라 고마워요.”
남자의 인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수속이 끝났다.
다시 썬글라스를 낀 이혜진이 발걸음을 옮겼다. 공항처럼 생긴 건물을 빠져나왔다.
“흐응.. 역시 서울은 공기부터 달라.”
단아하고 깨끗한 목소리에 시선이 쏠렸다. 아나운서라고 해도 믿을 만큼 듣기 좋은 소리였다.
빙긋 미소 지은 그녀가 발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커피색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가 매끈했다. 한번 쏠린 시선이 흩어지질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늘씬한 각선미를 타고 올라가면 풍만한 골반이 보였다. 당장 티비에 나오는 탑티어 여배우와 견줘도 모자람 없는 미모였다. 아니 오히려 차고 넘쳤다.
하얀 블라우스에 감싸인 풍만한 무언가가 걸을 때마다 출렁였다.
“헉.. 야 저기 좀 봐.”
“왜? 허어! 쥐, 쥑인다.. 악! 왜 때려.”
“새끼야 조용히 말해. 다 들리잖아!”
빨간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사람들의 시선에 가슴이 간질거렸다.
“흠흠. 저기요.”
힐끔 살피니 20대 초반 청년이었다. 당당히 펴진 가슴에서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누구?”
남자가 딱 벌어진 어깨를 자랑하며 씨익 웃었다.
“아하하. 저 이상한 사람 아닙니다. 그쪽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데. 커피나 한잔 하실래요?”
“어머.”
입가에 웃음기가 자리 잡았다.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었다.
이혜진의 미소에 남자가 헤벌쭉 웃었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끝까지 차올랐다.
“아! 술이면 더 좋고요. 곧 저녁인데 같이 식사 어때요?”
피식 웃은 그녀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는 실망을 줄 차례였다.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흔들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저 유부녀예요.”
믿을 수 없다는듯 남자의 눈이 커졌다.
“네..?”
입을 쩍 벌린 그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그쪽만한 아들도 있는걸요.”
“마, 말도 안 돼. 저보다 어려 보이는데..?”
입을 뻐끔거리던 남자가 눈빛을 굳혔다.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유부녀여도 상관없습니다. 오히려 좋네요.”
그녀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하..”
좋았던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임자 있는 사람에게 들이대는 사람은 정말 질색이었다.
“그냥 가세요. 혼나기 전에.”
“누나 째려보니까 더 귀엽다. 그러지 말고 나랑 한 번만 해 보면··· 아악!”
헌팅남의 정강이를 하이힐로 걷어찼다.
고통에 못 이겨 낑낑거리는 그를 툭 밀었다. 바닥을 나뒹군 남자가 이를 갈았다.
“이 씨.. 흡?!”
욕지거리가 나오던 입이 다물렸다. 어느샌가 허공에 떠오른 단검이 턱밑에 대어져 있었다.
남자의 목에서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히익.. 죄, 죄송합니다!”
“꺼져.”
창백하게 질린 남자가 바닥을 기어 도망갔다.
“정말.. 한심하긴.”
공중에 떠 있던 단검이 그녀의 손목으로 돌아왔다. 쭈욱 늘어나더니 뱀처럼 휘감겼다. 자연스럽게 손목시계로 변형됐다.
가라앉으려는 기분을 다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대기하던 운전 기사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사모님.”
“김기사님. 오랜만이네요.”
리무진 뒷좌석에 앉은 이혜진이 스마트폰을 빼 들었다.
단축번호 1번을 눌렀다.
[아들♥♥♥]
뚜르르.. 뚜르르..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이혜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수호가 바쁜가..?”
고개를 갸웃거린 그녀가 이번엔 딸에게 전화 걸었다.
뚜르르.. 딸깍.
-엄마? 갑자기 웬일이야?
이혜진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현아니? 엄마 서울 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