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95 - 195화 - 아카데미(34)
195화 - 아카데미(34)
강수호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주먹을 꽉 쥐고 시우를 노려봤다.
‘이 자식이 감히 엄마를···!’
환상속에서 엄마를 범하던 남자. 후두둑 하고 쏟아지던 물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아른거렸다.
찾기만 하면 주먹으로 패주리라 다짐했던 그 녀석이었다.
“이 개..”
-크라아악!!
그때. 수십 마리의 괴물들의 시선이 쏠렸다.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농밀한 살기에 피부가 따가웠다. 뒷덜미에서 식은땀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생각해 보니 지금은 놈과 싸울 때가 아니었다.
“위, 위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십 마리의 키메라가 달려들었다.
-캬아아악!
집채만 한 괴물들이 달려든 순간.
촤아악!
푸른 참격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억..?”
시끄럽던 공간이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트럭보다 큰 멧돼지부터 머리 세 개인 도마뱀까지.
모조리 썰려 나갔다. 검을 휘두르는 것도 보지 못 했는데, 앤보다 강해 보였던 괴물들이 단번에 몰살당했다.
‘말도 안 돼..!’
입이 쩍 벌어졌다. 압도적인 무력이었다. 같은 생도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사방에서 진한 피비린내가 확 풍겼다.
“미친..”
꽉 쥐어졌던 주먹이 슬그머니 풀렸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욕을 다시 삼켰다.
‘제기랄!’
엄마를 희롱한 녀석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맹렬히 고민하다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
“구, 구해줘서.. 고, 고맙다..”
엄마를 탐한 녀석에게 목숨을 구원받다니.
굴욕감이 치밀었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른 척해야 할 상황이었다.
‘절대 못 이겨.’
싸워 보기도 전에 깨달았다.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토막난 키메라를 보기만 해도 패배감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됐고. 넌 어머니한테 고마워해라. 아! 누나한테도.”
성큼 다가온 시우가 멱살을 움켜쥐었다.
“뭐, 뭐야!”
“네 어머니한테 데려다줄 테니 가만 있어.”
“아악!”
마치 짐짝처럼. 그를 집어 들더니 천장에 난 구멍으로 뛰어올랐다.
급격히 가해진 가속도에 머리가 아찔했다. 박살 난 뼈에 내장이라도 찔렀는지 숨이 턱 막혔다.
“커, 컥..!”
순식간에 지상으로 올라왔다. 잘려 나간 정문을 통해 푸른 하늘이 보였다.
사방에 널린 시체가 한둘이 아니었다. 수십 명의 흑마법사가 토막난 채 널브러져 있었다.
‘미친..’
고통도 잊고 입을 쩍 벌린 순간.
“어머니한테 내가 구해줬다고 꼭 말해라.”
“뭐.. 끄아아아악!!”
휘이이잉!
강렬한 바람이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한순간 중력이 사라지며 몸이 부웅 떠올랐다.
망할 녀석이 그를 집어던진 것이다.
“개새끼야아악!”
마치 포탄처럼 하늘을 날며 이를 갈았다.
체감상 대략 5초 정도. 하늘을 날다가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수호야!”
공중에서 힘겹게 눈동자를 돌렸다. 부모님과 정체 모를 중년 남자가 보였다.
‘어, 엄마..!’
그녀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환상과 달리 옷차림이 단정했다.
스타킹도 찢어지지 않았고, 정체 모를 액체에 범벅된 상태도 아니었다.
“크윽.”
팔을 허우적거렸다. 이대로 땅바닥에 부딪쳤다간 저승으로 갈게 뻔했다.
‘개자식 곱게 데려다주면 어디 덧나나!’
땅바닥에 닿기 직전. 뭘 어떻게 한 건지 속도가 확 줄었다.
자연스럽게 엄마가 있는 곳 근처에 툭 하고 떨어졌다.
“수호야!”
엄마가 곧바로 달려왔다.
풍만한 무언가가 그를 꽉 껴안았다. 익숙하고 그리웠던 포근한 감촉.
‘엄마!’
따뜻한 품에 안기자 긴장이 확 풀렸다. 습관처럼 숨을 깊게 들이켰다가 흠칫했다.
‘으으..?’
익숙했던 엄마 품에서 낯선 냄새가 났다.
‘이건..’
생각을 이어가기 힘들었다. 참아왔던 고통이 밀려오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결국 기절하듯 잠들었다.
***
강수호를 집어 던진 시우가 검을 뽑아 들었다. 처남이자 아들 녀석을 구했으니 새아빠 도리는 끝났다.
이제 적당히 날뛰다 도시로 돌아가면 상황은 끝이었다.
콰앙!
무너진 돌더미 사이에서 흑마법사 하나가 튀어나왔다.
“웬 놈이냐!”
소리치던 그가 눈을 부릅떴다. 주변을 둘러보더니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흑사탑 1층엔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가 가득했다. 반쯤 박살 난 것이 폐허나 다름없었다.
“뭐야! 이 지경이 됐는데 경보가 안 울렸다고..?”
“마법진이 불량인가 보지.”
“개소리 마라!”
시우가 피식 웃었다.
마법진이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항마력을 담은 내력으로 몇몇 마법진을 짓누르는 중이었다.
물론 흑사탑에 가득한 모든 마법진을 제압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해 보이는 마법진 몇 개를 찍었다.
우연히도 그중 하나가 경보와 관련된 것으로 보였다. 덕분에 한 명씩 기어 나오는 흑마법사를 처리할 수 있었다.
“네놈..! 겁도 없이 흑사탑에 쳐들어오다니···! 제발 죽여달라 빌게 해 주마!”
흑마법사가 시뻘게진 얼굴로 저주를 내뱉었다. 그러면서 손은 조용히 움직였다. 슬금슬금 허리춤의 지팡이를 향해 다가갔다.
핏!
손가락을 뻗었다. 섬전처럼 날아간 지풍이 미간을 꿰뚫었다.
털썩.
적이 지팡이를 잡을 때까지 기다려줄 이유가 없었다.
녀석이 쓰러지고 또 다른 흑마법사가 튀어나왔다.
“놈!”
심술궂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꼬장꼬장한 입매를 꾹 다물며 날아왔다.
‘6성 최상급.’
이제는 시체가 된. 르카도라고 소개했던 녀석보다 강했다.
그가 지팡이를 뻗더니 소리쳤다.
“미쳐 날뛰어라!”
검은색 마력이 소리 없이 날아왔다.
곧장 대응했다. 항마력을 담은 내력을 육체에 휘둘렀다. 호신강기와 충돌한 검은 기운이 파지직 거리더니 소멸됐다.
“뭣!?”
상대가 당황했는지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눈을 파먹는 공포!”
마기가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역시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지금까지 수십 명의 흑마법사를 죽이며 반복된 상황이었다.
‘저주 별거 없네.’
정신에 작용하는 저주는 상대방에게 미약한 감정을 심는 것부터 시작이다. 강제로 씨앗을 심고 증폭시켜 정신을 파괴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정신 오염에 면역이다. 게다가 항마력마저 가졌다. 저주는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핏 하고 날아간 지풍이 배리어를 뚫고 심장마저 꿰뚫었다.
“끄으..! 썩어들어가는 피!”
놈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평생 저주를 갈고 닦은 흑마법사가 죽기 직전에 내뱉은 저주.
‘음..’
몸이 약간 무거워졌다. 확실히 육체에 작용하는 저주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약간의 피로마저 항마력에 중화돼 사라졌다.
흑마법사가 눈을 부릅떴다.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쿨럭.. 하, 항마! 네놈 항마 특성을 가졌구나!”
녀석의 얼굴이 질투로 일그러졌다. 항마력은 손에 꼽힐 정도로 강력한 전투형 특성이었다.
“빌어먹을..”
노인은 피를 토하더니 허물어졌다.
시체 위로 희끗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6성 최상급 답지않게 쉽게 죽는다 싶더니 수작을 부렸다.
‘영혼?’
곧바로 검기를 날렸다.
푸른 참격이 스쳐 지나갔으나 놈은 멀쩡했다.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에 비웃음이 가득했다.
‘쯧.’
검 자루를 제대로 잡고 정신을 집중했다. 영혼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검기로 벨순 없었다.
지금까지 검기만 사용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마법진을 억누르느라 내력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기 때문이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마법진을 짓누르던 내력을 회수했다.
그리고 검을 휘둘렀다. 눈부신 광채와 함께 반월형 참격이 뻗어 나갔다.
-끼에에엑!
마치 영혼의 비명. 듣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소리와 함께 희끗한 무언가가 타들어 갔다.
-아아악!!
검강에 잘려 나간 영혼은 흔적도 없이 소멸됐다.
구구궁!
건물이 무너질 것처럼 흔들렸다.
-웨에에엥! 웨에에엥!
사방에서 시끄러운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억누르던 마법진이 발동한 것이다.
“뭐야! 헉..!”
허겁지겁 튀어나온 젊은 흑마법사가 경악했다. 바닥에 쓰러진 시체를 보며 소리쳤다.
“자, 장로님?!”
놈을 시작으로 사방에서 흑의인들이 튀어나왔다.
“웬 놈이냐!”
“뭐야! 혼자서 여길 쳐들어왔다고?”
마치 바퀴벌레 같았다. 온갖 구멍에서 다양한 형태의 키메라들이 기어나왔다.
“네놈 여기가 어디라··· 컥!”
건방지게 나불거리는 젊은 녀석의 상체를 베어 버렸다. 채찍처럼 길어진 검기에 중년 남자가 소리쳤다.
“최소 6성급 기사다! 모두 조심해!”
콰아앙!
반쯤 무너진 잔해 속에서 노인이 튀어나왔다. 농밀한 마기가 눈에 보일 것처럼 짙었다.
그자를 발견한 흑의인들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부탑주님!”
7성급 흑마도사. 여기서 만난 마법사 중에 가장 강했다.
“놈! 감히 흑사탑을 건들다니···! 개돼지로 만들어서 평생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그 말과 동시에 어깨가 짓눌렸다. 천근거석이라도 올려진 듯 온몸이 무거워졌다.
드디어 싸워볼만한 상대가 나타났다.
“하하..!”
우웅!
강렬한 광채를 머금은 검강을 휘둘렀다. 몸을 얽어매던 마력을 모조리 잘라버렸다.
“검강!”
공포에 질린 누군가의 말과 동시에.
흑마법사 한 명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저주를 무시하고 땅을 박찼다.
제대로 날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