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09 - 209화 - 무협지구(4)
209화 - 무협지구(4)
시우가 마을의 유일한 객잔에 도착했다.
문을 열자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기름칠이 안 됐는지 뻑뻑했다.
“음..?”
의자에서 졸던 남자가 반사적으로 박도를 붙잡았다. 그 자연스러운 행동이 이곳의 치안을 말해줬다.
“외지인?”
턱수염 가득한 중년인이 천천히 경계를 풀었다.
“오랜만에 손님이군. 식사는 따로 없고 하룻밤에 은자 서른냥이오.”
터무니없이 비싼가격이었다. 그래도 화폐가 통하는 걸 보니 바깥이랑 왕래가 있는듯했다.
흥정하기도 귀찮았다.
예전 무영신투의 창고를 털었기에 금은 넘쳤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주먹만 한 금덩이를 손가락으로 뜯어냈다. 찰흙처럼 떨어져 나온 덩어리를 굴려 동그랗게 말았다. 그리고 꾸욱 눌렀다.
손톱 크기의 납작한 금조각이 만들어졌다. 툭 내밀며 말했다.
“이거면 되나?”
중년인이 두 눈을 크게 뜨더니 태도가 돌변했다.
“충분하고도 남습니다! 제일 좋은 방으로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까딱이는데 눈치 보던 그가 말했다.
“흠흠.. 무사님 딱 봐도 얼굴에 귀티가 나는 것이 아주 부유해 보이십니다. 혹시 이건 안 필요하십니까? 밤에 사용하시면 주무시기 편할 겁니다.”
중년 남자가 목곽을 내밀었다. 열어 보니 검은색 막대기 세 개 들어 있었다. 코끝에 쌉싸름한 향이 맴돌았다.
절에서 피우는 향처럼 생긴 막대기였다. 자세히 살폈는데 적어도 독은 아닌 것 같았다.
“이게 뭔가?”
“예?”
두 눈을 끔벅이던 그가 입을 쩍벌렸다.
“설마 기충연향(忌蟲煙香)도 없이 여기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기충연향?”
“허.. 그 많은 독충들을 뚫고 오시다니. 생각보다 외공이 뛰어나신가 보군요.”
헛기침하던 그가 향초에 대해 설명했다.
“불 붙이면 빠르게 타들어 가면서 연기가 나는데. 그 연기를 쐬면 반나절 가량은 독충이 달려들지 않을 겁니다. 녀석들이 꺼리는 약초를 모아 만든 향초입니다.”
“이런 게 있었다고? 독곡 근처 마을에선 못 들어 봤는데?”
“하하. 이건 우리 마을에서 비전으로 만든 겁니다. 입구 주변이나 떠도는 어중이떠중이들은 당연히 모르지요. 여기까지 들어오는 채집꾼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들이라고 제 밥줄을 알리겠습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결국 몇몇 이들만 아는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지요. 저는 무사님이 여기까지 오셨길래 당연히 아실 줄 알았습니다.”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 다른 채집꾼들이 독곡을 오가는 방법이 바로 이것이었다.
향초값으로 금조각을 던져 주자 헤벌쭉 웃었다. 굽실거리는 그와 함께 방에 도착했다.
“여기가 제일 넓은 방입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널찍한 방에 침상이 4개 있었다. 솔직히 돈값은 못했다. 하지만 며칠 쉬기엔 충분했다.
“이 정도면 됐소.”
“하하. 그럼 편히 쉬십시오.”
“아, 잠깐.”
“예?”
나가려던 그를 붙잡았다.
“혹시 근처에 산황초 군락지가 어딘지 아시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는데.”
“아.. 역시 산황초를 구하러 오셨나 보군요. 그거라면 길잡이를 고용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이어지는 설명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내고 침상에 앉았다.
삐걱.
퀴퀴한 냄새가 올라왔다. 인벤토리에서 최고급 매트리스를 꺼내 침상위에 던졌다.
푹신하고 깨끗한 매트에 누워 눈을 감았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며 쌓인 피로를 풀생각이었다.
*
두 시간 정도 푹 자고 일어나니 개운했다. 강인한 육체덕에 피로가 싹 풀렸다.
“흐음..”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객잔주인의 설명을 떠올렸다. 길잡이를 고용해도 산황초 수십 개를 캐는데 보통 한 달에서 두달 정도 걸린다고 한다.
5일이면 효과가 사라지는 약초를 계속 캐고 있으면 의심을 살게 분명했다.
‘그건 딱히 상관없지만.’
의심 좀 산다고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래도 한두 달은 너무 길었다.
독곡 깊숙이 들어갈수록 산황초를 구할 확률이 오른다. 당연히 독물들의 수준도 높아지고 더 많이 튀어나온다.
‘화염방사기로 쓸어버릴까.’
살짝 충동이 일었지만 생각으로 그쳤다. 그랬다간 산황초까지 몽땅 타버릴 것이다.
‘마력코어를 계속 쓰면 너무 느려.’
실제로 시간이 흐르진 않겠지만 다른 세상에 계속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어찌할까 고민하다 미간을 찌푸렸다.
해결책이 떠오를듯 말 듯.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아!”
인벤토리에서 낡아빠진 서책을 꺼냈다. 흑마법사들을 소탕하고 창고에서 얻어냈던 책.
‘염화비술(念化秘術).’
마력 없이 의식의 힘만으로 적을 타격하고 제압하는 비술.
모든 마력을 버리는 게 입문 조건이어서 다음을 기약했었다. 기이한 안개가 깔린 이곳이면 가능할지도 몰랐다.
무릎을 툭툭 치다가 책장을 넘겼다.
*
이틀 후.
염화비술 해석본을 정독하고 책을 덮었다.
“후우..”
바닥에 놓인 사과를 노려보며 정신을 집중했다.
‘움직여라!’
시간이 흐르고 눈이 뻐근해질 무렵. 미간 사이에서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파각!
머릿속에서 무언가 뚫리는 기분과 함께. 희끗한 무언가가 사과를 향해 쏘아졌다.
약간의 탈력감을 느끼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처음으로 성공했다. 눈을 감고 조금 전 감각을 떠올렸다.
‘이렇게 했었나.’
쉬익! 환청과도 같은 소리와 함께 무언가 쏘아졌다. 자세히 살피니 반투명한 남색 실이었다.
보고 싶다고 생각하자 쏘아지던 실이 멈췄다.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처음엔 뻣뻣했지만 갈수록 자연스러워졌다.
‘아!’
겨우 이틀 만에 염화비술에 입문하는데 성공했다. 높은 무공덕인지 사일로 단련된 영혼덕인진 모르겠지만 빠른 속도였다.
정염위사(精念爲絲).
념(念)을 정련해 실로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염화비술 1성을 달성한 증거였다. 의식의 힘만으로 만든 실.
손을 뻗자 실이 날아들었다. 손바닥에 휘감긴 실뭉치를 살폈다.
반투명한 남색 실. 만져 보니 서늘했다.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니 약간의 저항과 함께 쑥 통과했다.
‘신기하긴 한데.’
이게 끝이라면 익힌 보람이 없었다. 사과를 노려보며 집중했다.
미간 사이에서 남색 실이 쏘아졌다.
찰나만에 사과에 꽂혀 사라졌다. 어지간한 고수라도 피하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사과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지만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건 의식을 가진 존재에게 통하는 비술이었다.
스스슥.
마침 무언가 기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크기의 작은 도롱뇽이었다.
침상 사이로 들어가는 녀석을 보다가 정염위사를 쏘았다.
파앗!
찰나만에 날아든 그것이 도롱뇽 머리에 꽂혔다.
‘멈춰라!’
쉴 새 없이 기어 다니던 녀석이 동작을 멈췄다. 박제된 것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1분이 넘도록 바르르 떨기만 했다. 멈춰버린 녀석을 툭툭 건드려봤지만 그대로였다.
석상처럼 굳어 버린 녀석을 보며 흡족하게 끄덕였다.
작은 짐승이지만 의식의 힘만으로 상대를 통제했다. 단순 염력인 허공섭물과 다르게 정신으로 육체를 제압한 것이다.
*
독곡에 들어온 지 3일째.
객잔주인의 소개를 받고 길잡이를 고용했다.
“헤헤. 저희 형제만 믿으십쇼.”
쥐상 남자 두 명이 머리를 조아렸다. 겉으론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그럼 기충연향만 피우고 출발하겠습니다.”
“···그러지.”
형제가 씨익 웃자 희미한 파동이 느껴졌다. 뒷덜미를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이게 염화비술에서 말하던 감각 강화인가.’
그들의 감정. 탐욕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놈들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았다.
턱을 쓰다듬다가 그들을 따라 숲으로 향했다.
사삭.
바위틈에 숨어 있는 거미를 내려다봤다. 주먹만 한 녀석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오감도 예민해졌다.’
마을 밖에 나오자 달라진 점이 확 와 닿았다. 염화비술 효과로 감각이 강화됐다.
얼마나 걸었을까.
형제 중 동생이 노란 풀을 가리켰다.
“이게 산황초입니다.”
상점에서 구매했던 것과 다르게 파릇파릇했다. 금색에 가까운 노란색이었다.
툭.
뿌리까지 조심스레 뽑았다. 흔들어 보니 박하 향이 확 풍겼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머리가 맑아졌다.
흡족하게 끄덕이고 품속에 넣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한 포기가 끝이었다.
“산황초 무더기가 있는 군락지를 안다고 하지 않았소? 설마 그게 여기요?”
쥐상머리 남자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거긴 한참 더 가야 합니다.”
두 시간가량 더 걸었다.
길잡이들이 헉헉댈때쯤. 10미터쯤 되는 공터에 도착했다.
“여기입니.. 어엇?!”
땅이 엉망이었다. 멧돼지가 헤집어놓은 밭처럼 뒤집어져 있었다.
자신만만하게 안내하던 길잡이들이 당황했다.
“자, 잠시만요. 여기서 기다리시면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뭐라 말할 사이도 없이 그들이 허겁지겁 떠났다.
막대기를 집어 들고 엉망이 된 땅을 휘적였다. 노란 풀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메추리알 정도 크기의 푸른색 알만 가득했다.
‘에휴.’
허겁지겁 멀어지는 놈들을 빤히 보다가 한숨을 내뱉었다. 살의와 탐욕. 염화비술로 감지한 감정은 사실이었다.
-쉬시식. 쉬이익!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땅속에서 푸른 뿔을 가진 뱀들이 기어나왔다. 등에 작은 피막이 달려 잠깐은 날수도 있다는 청각비사였다.
안개 너머 저 멀리. 쥐상 형제와 눈이 마주쳤다.
악의(惡意)가 피부로 느껴졌다.
“하..”
녀석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비릿한 미소와 함께 그를 비웃었다.
“형님! 성공입니다! 이제 저놈이 가진 금은 다 우리 겁니다!”
“크크.. 순진해 빠진 새끼. 청각비사에 물리면 제아무리 고수라도.. 어어..?”
히죽거리던 그가 입을 쩍 벌렸다. 턱이 빠진 것처럼 뚝 소리가 났다.
“저, 저게 뭐야!”
순간 속도가 화살보다 배는 빠르다는 청각비사. 날개 달린 독사 수십 마리가 동시에 날아들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긴 묵봉이 튀어나왔다. 어찌나 무거운지 후웅 하는 바람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그런 철봉이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휘둘러졌다.
파파팍!
달려들던 수십 마리의 뱀들이 동시에 터져 나갔다. 휘돌려진 묵봉에 모조리 육편으로 변했다.
“하, 한 번이라도 물리면..!”
도륙당하는 청각비사를 보니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오륙십 마리가 동시에 덮쳤지만 단 한 마리도 도달하지 못했다.
“히익..!”
“튀, 튀어!”
형제들이 곧바로 뒤돌아 달렸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였다.
쒜에에액!
허공을 가로 지르는 소리와 함께.
퍼억!
“아아악!!”
고통섞인 형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동생이 고개를 돌렸다가 기겁했다.
뭉툭한 강철봉이 날카로운 창이라도 되는 것처럼 허벅지를 관통했다.
어찌나 세게 박혔는지 아직도 웅웅 진동했다.
“사, 살려 줘!”
“형 미, 미안!”
간절히 손 뻗는 형을 버리고 땅을 박찼다. 몇 걸음이나 걸었을까 몸이 덜컥 멈춰버렸다.
“읍..!?”
마비 독에 당한 것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말도 못 하고 끙끙거리는 사이.
저벅저벅.
어느새 등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