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10 - 210화 - 무협지구(5)
210화 - 무협지구(5)
길잡이 형제를 저승으로 보내준 뒤.
마을로 돌아간 시우가 곧장 객잔으로 향했다.
끼익.
“누구.. 헛?”
졸고 있던 객잔 주인이 화들짝 놀랐다.
“···무사님 벌써 돌아오셨군요.”
그가 어색하게 웃으며 눈치를 살폈다. 반사적으로 움켜쥔 박도를 슬그머니 놓았다. 의미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뻣뻣하게 굳은 얼굴을 내려다보며 저벅저벅 걸어갔다.
“아하하.. 가, 가셨던 일은 잘 됐습- 아아악!!”
파악!
손등에 젓가락을 박아버렸다. 녀석이 비명을 질러댔다.
“끄윽..! 왜, 왜 이러십니까!”
울상이 된 얼굴로 부들거렸다.
옆자리에 털썩 앉아 태평한 어조로 말했다.
“자네가 소개해준 길잡이가 영 형편없던데?”
“서, 설마 그놈들이 또.. 저, 전 모르는 일입니다!”
창백해진 안색으로 벌벌 떨며 말했다.
“지, 진짜입니다. 분명 외공의 고수니 수작부리지 말라고··· 큭!”
놈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거짓간파를 쓸 필요도 없었다. 신체 반응으로 보아 거짓말은 아니었다.
“다른 길잡이는 없나? 이번엔 좀 제대로 된 사람이었으면 좋겠는데.”
“그, 그게..”
손등에 박힌 젓가락을 툭툭 쳤다. 식은땀을 흘리던 녀석이 말했다.
“무, 무사님. 이런 데서 사는 놈들 중에 제대로 된 놈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두씨 형제가 그나마 쓸 만한 길잡이··· 흡!”
미간을 찡그리자 녀석이 황급히 말했다.
“이, 있습니다. 있긴 있는데···.”
녀석이 변명하듯 떠들어댔다. 한참을 듣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보지. 이번에도 별로면.. 손등이 아니라 여기다.”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리키니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
약간 낡은 듯한 목조 건물 앞에 도착했다.
객잔주인이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 준 길잡이의 집이었다.
쿵쿵쿵!
“···누구?”
문을 두드리니 희미한 음성이 들렸다.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치 늙어 죽기 직전의 노인 같았다.
“···여기가 갈천이란 자의 집 맞소?”
“쿨럭.. 쿨럭! 으으..”
발로 땅을 끄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한참이 흐른 뒤 문이 열렸다.
초췌한 안색의 30대 남자가 나타났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듯 창백했다.
얼굴색이 하얗게 질린 것을 넘어 보랏빛이었다.
“내가 갈천.. 커헉..!”
피를 토하곤 바닥에 허물어졌다.
“하..”
정신을 잃은 그를 보고 있으니 한숨이 튀어나왔다.
최고의 길잡이란 놈이 독에 중독돼서 죽기 일보 직전이었다.
“에휴..”
잠시 고민하다가 인벤토리에서 산황초를 꺼냈다.
독곡에 들어오기 전에 구매했던 노란 풀. 딱히 아깝진 않았다. 캔지 4일째라 약성을 잃기 직전이었다.
산황초를 둥글게 말아 환처럼 만들었다. 갈천이란 길잡이의 입속에 튕겨넣었다.
‘실험이나 해볼까.’
목숨도 살려줄 겸 염화비술이나 연습해 보기로 했다.
정신을 집중했다. 미간 사이에서 정염위사를 뿜어냈다.
반투명한 남색 실을 정수리에 꽂아 넣고 읊조렸다.
‘씹어라.’
찡한 두통과 함께 남자의 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각인형처럼 어색한 동작이었지만 분명 움직였다.
“으음..”
두통이 점점 심해졌다. 단순히 멈추라는 지시와 다르게 몸을 조종하는 것은 정신력 소모가 심했다.
그래도 성공했다. 10초가량 우물거리던 남자가 약초를 삼켰다.
마력 한 줌 없이 의식만으로 사람을 조종한 것이다. 염화비술에 익숙해지고 경지가 오르면 어찌될지 상상해봤다.
정염위사에 당해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는 상대를 떠올렸다.
‘···난폭한 여자들 조교 할 때 편하겠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남자를 살폈다. 안색이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아직도 보랏빛이었다.
입가에 포션을 쪼르륵 붓고 손을 뻗었다.
우웅-
마력코어를 연결했다. 혼원기를 침투시켜 전신을 휩쓸었다. 독기를 한데모아 불태우고, 재생의 힘까지 불어넣었다.
과정은 길었지만 한순간이었다. 10분의 1정도 마력을 소모한 뒤 끊었다.
독곡에선 마력을 채우기 귀찮았으니까.
“으으..”
그것으로 충분했는지 남자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
*
사경을 헤매던 갈천이 눈을 떴다.
‘으으..’
흐릿해진 시야가 잡혔다. 낯선 남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 여긴..”
둘러보니 본인의 집 입구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죽다 살아난 것이다.
“다시 확인하지. 당신이 갈천 맞소?”
남자의 목소리를 듣다가 깨달았다.
“아..”
저자가 목숨을 구해 준 것이다. 억지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끄응.. 제가 갈천 맞습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대협.”
말하면서 또 한 번 놀랐다. 몸 상태가 제법 괜찮았다. 분명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거동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됐다.
“자네가 독곡 최고의 길잡이라던데···.”
남자의 의심 가득한 목소리에 갈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가 어찌 최고라고 말하겠습니까. 그저 경력이 가장 오래됐을 뿐입니다.”
그보다 오래된 길잡이는 없었다. 이미 죽었거나 한몫잡고 독곡 밖으로 나갔으니까.
“좋네. 내가 목숨도 구해줬는데 길 안내 좀 부탁해도 되겠는가? 보수는 넉넉히 주지.”
“···예. 당연히 가능합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몸 상태가..”
휘익 날아온 무언가를 잡아챘다. 매끈하고 투명한 병에 빨간 액체가 찰랑거렸다.
“이건..?”
“마시면 회복될 걸세.”
머뭇거리다 마셨다.
“허어..?”
눈이 절로 커졌다.
반사적으로 가슴팍을 더듬었다. 방금 전까지 숨 쉬기도 힘겨웠는데 활력이 넘쳐흘렀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효과란 말인가!’
대충 던져 준 약이 엄청난 보물이었다. 이런 걸 턱턱 내밀다니. 얼마나 귀한 신분일지 짐작도 안 갔다.
‘그런자가 뭐 하러 독곡까지 온단말인가.’
의문이 들었지만 접어뒀다. 그가 신경 쓸 내용은 아니었다.
“원하신다면 바로 안내하겠습니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사실 물어보나 마나 뻔했다. 산황초. 외부인이 이곳에 오는 목적은 십중팔구 하나였다.
“산황초 군락지로 안내하게.”
“예. 얼마나 필요하십니까? 제가 봐둔 곳이 제법 됩니다. 합하면 열 포기 정도···”
“백 포기. 아니지.. 이왕 온 김에 넉넉히 캐야겠어. 이백 포기 정도면 충분하겠네.”
“이, 이백 포기요? 대, 대협! 산황초는 캔지 5일이 흐르면 약효가 모두 사라집니다. 한 번에 그렇게 많이 캐봐야 의미 없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네.”
“그으.. 하아..! 알겠습니다.”
머뭇거리던 그가 말을 이었다.
“독곡 초입에 제가 봐둔 곳이 몇 군데 있습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 일단 그것들을 채집한 다음에.. 그래도 모자라다고 하시면 중심부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좋네.”
“···허나 중심부에 갔다간 대협은 몰라도 저는 살아나오지 못할 겁니다. 입구까지만 안내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저도 중심부엔 가본적이 없어 도움이 안 될겁니다.”
“음.. 그렇게 하게.”
기충연향을 피워 연기를 쐰 그들이 우거진 수풀로 사라졌다.
*
촤악! 촤악!
갈천이 정글도로 가시덩굴을 자르며 길을 냈다.
힘들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 덩굴에 잘못 찔렸다간 팔을 잘라야 할 수도 있었다.
“후우..”
이마에 흐른 땀을 닦으며 돌아봤다. 바로 뒤에서 태평하게 따라오는 최시우란 남자가 보였다.
‘허..’
숨 하나 거칠어지지 않은 것을 보고 놀랐다. 날고 긴다 하는 이들도 독곡에선 맥을 추리지 못한다.
내공도 없이 독물 가득한 숲을 헤치는 것은 쉽지 않다. 어지간한 외공 고수들도 죽는 소릴 내기 마련이다.
그런데 저런 체력이라니. 10년간 안내했던 사람 중에 가장 뛰어났다.
‘대단하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가 흡족하다는 듯 말했다.
“이전 길잡이보다 훨씬 빠르군. 꽤 실력 있는 거 같은데 뭐 하다가 중독된 거요?”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 채집꾼들이 실종되는 일이 잦아서 조심한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중독돼 있더군요. 정말 죽을힘을 다해 마을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해독약을 먹고 잠들었다. 그런데 자는 중에 독이 다시 발작해 죽을뻔했다.
최시우란 남자가 그를 깨우지 않았다면 자다가 죽었을 것이다.
사실 죽다 살아나자 마자 독곡에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목숨을 구해 준 은혜 때문에 안내하는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가면···. 잠시만.”
목소리를 확 낮췄다. 조심스레 안개 너머를 살피니 쿠르륵..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호랑이보다 큰 멧돼지가 자고 있었다. 성인 남자 팔뚝보다 긴 어금니에서 독액이 뚝뚝 흘러내렸다.
‘추, 추산저!’
독곡 초입에서 가장 위험한 존재였다. 추산저는 영역 본능이 강했다.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 공격하는 흉폭한 놈이었다.
게다가 성격도 집요해 한 번 노린 사냥감은 끝까지 추적한다.
‘운도 없군.’
옛날. 추산저가 동료를 찢어 죽이고 바위를 박살 냈던 장면이 떠올랐다.
꿀꺽.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 죽여 말했다.
“무, 무사님. 멀리 돌아가시지요. 저 녀석은 극히 위험한 놈이라 조심해야 합니다.”
“됐네. 내가 해결하지.”
“네..? 어어..?”
갈천이 당황했다. 추산저에 대해 설명하기도 전에 최시우가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쿠륵?
당연하게도 갈색 멧돼지가 눈을 떴다. 머리를 좌우로 흔들더니 이쪽을 노려봤다.
시뻘건 안광이 도깨비불 같아 오금이 저렸다.
“대, 대협! 조심..!”
-꾸이이익!
집채만 한 멧돼지가 돌진했다. 땅이 쿵쿵 울렸다. 어찌나 빠른지 멧돼지가 주욱 늘어나는 것처럼 보였다. 몸이 굳을 만큼 맹렬한 기세였다.
날카로운 어금니가 남자에게 닿기 직전.
휘릭 하는 소리와 함께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그것만으로 맹렬한 돌진이 빗나갔다.
콰아앙!
거대한 나무가 박살 났다. 성인 남자 두 명이 껴안아도 남을 정도로 두꺼운 나무가 산산조각 났다.
갈천이 이를 악물었다. 지금이라도 도망갈지 말지 강렬히 고민하던 그때.
“어..?”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바닥에 쓰러진 녀석이 움직이질 않았다. 바위를 부수고도 멀쩡히 날뛰던 추산저답지 않았다.
자세히 살폈다가 입을 쩍 벌렸다.
추산저 머리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미간이 꿰뚫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