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0 - 220화 - 무협지구(15)
220화 - 무협지구(15)
정염위사에 당한 초절정 고수가 이를 악물었다.
“끄으..”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지고, 전신에 지렁이처럼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녀석에게 지풍을 날려 혈도를 짚었다. 이제 정염위사가 풀려도 움직이지 못할 것이다.
우두머리를 제압한 짧은 사이.
“크아악!”
짐승 같은 괴성과 함께 사방에서 검기들이 쏟아졌다.
초절정에 한 발 걸친 암살자들이 검강을 휘둘렀다. 핏빛 광채가 명장로를 향해 쏟아졌다.
“장로님!”
놀란 마일영이 소리쳤으나 그리 위험해 보이진 않았다. 소향이와 당화린이 주변에서 명장로를 도왔으니까.
“죽어라!”
그들을 잠시 살핀 순간. 강렬한 기운이 빠르게 쇄도했다. 피로 이루어진 듯 검붉은 검강이 세 개나 날아들었다.
우웅!
손에 쥐고 있던 검이 강렬한 광채로 뒤덮였다.
망설임 없이 검강 사이로 파고들었다.
촤아악!
한 끗 차이로 스쳐 지나간 검강을 뒤로하고, 막 초절정에 오른 세 명을 썰어 버렸다.
“끄읍..!”
심장이 잘려 나갔음에도 비명하나 지르지 않았다. 꽤 독한 놈들이었다.
허나 그 죽음을 시작으로.
한순간이나마 팽팽하던 전황이 급격하게 기울었다.
서걱!
수십의 목이 허공을 날고, 암살자들이 하나둘 쓰러졌다. 사로잡은 몇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시체로 변했다.
시끄럽던 객잔이 고요함을 되찾았다.
“이, 이게 갑자기 무슨.. 쿨럭..!”
안 그래도 지쳤던 마일영이 식은땀을 질질 흘렸다. 내공이 바닥나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녀석을 무시하고 당화린과 소향이부터 살폈다.
“다들 괜찮아?”
“괜찮아요.”
“응. 시우 너는?”
“나도 멀쩡해.”
혹시나 하고 꼼꼼히 살폈다.
소향이의 잘려 나간 옷깃에 작게 혀를 찼다. 그래도 다행히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음?’
그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아무래도 걱정받는 것 자체에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머리까지 쓰다듬어줬다간 머리카락이 은색으로 물들 것만 같았다.
‘참자.’
이어 당화린을 살피는 데 그녀가 두 눈을 깜박이며 한쪽을 가리켰다.
“어..? 시우야 저거 좀 봐.”
털썩!
주변에서 하나둘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점혈로 제압해놨던 암살자들이었다.
“그어어..”
얼굴이 하나 같이 일그러졌다. 머리가 급속도로 하얘지더니 주름이 자글자글 늘었다.
곧 미라처럼 쪼그라들더니 힘없이 쓰러졌다. 마치 시간이 빠르게 흐른 것처럼 보였다.
“···저게 강해진 대가인가?”
“으.. 끔찍해.”
당화린이 소름 돋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환약을 먹고 강해진 대가는 죽음이었다.
“저리 될지 알고 먹었을까?”
“글쎄..”
죽을 걸 알면서 독을 집어먹은 점소이부터 느꼈지만 정신 나간 놈들이었다.
‘마치.. 광신도 같군.’
죽음도 두려워 않는 미친놈들이었다.
한쪽에서 꿈틀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끄으..”
다행히 암살자 중 한 명이 남아 있었다. 아직도 뻣뻣히 굳어 있는 숙수였다.
“···!”
손에 쥐고 있던 환약을 빼앗았다. 이것을 먹으니 하나 같이 기운이 폭증했다.
한순간 경지를 뛰어넘는 비약이라니.
“이게 도대체 뭐냐?”
입의 마비를 풀어줬으나 대답이 없었다.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더니 무언가 깨물었다.
“흐흐..”
입꼬리를 끌어올려 히죽거렸다.
“우웨웩..!”
비웃음과 함께 피를 토했다. 검은색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독?”
곧바로 자결이라니. 대단하긴 했으나 그래 봤자였다.
우웅!
놈의 심장 부근에 손바닥을 대고 혼원기를 밀어 넣었다. 뱃속에서부터 퍼진 독기에 내장이 녹아내리는 중이었다.
“끄으읍!!”
암살자가 눈을 부릅떴다. 몸속을 마음대로 헤집던 혼원기가 맹독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남은 한 방울까지 깔끔하게 태워 버렸다.
“커허억.. 꺽!”
이어 턱을 후려쳐 강제로 입을 벌렸다. 포션까지 들이부었다.
효과는 탁월했다.
황천 가기 직전이던 녀석이 멀쩡해졌다.
“누구 맘대로 죽으려고?”
이제 놈의 인생에서 남은 건 고문밖에 없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암살자의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동그란 단약을 눈앞에 흔들었다.
“다시 묻지. 이게 도대체 뭐냐?”
역시나 대답이 없었다.
“쯧쯧. 그냥 곱게 말하면 서로 편할 텐데.”
우웅!
손가락 끝에 혼원기를 응집했다. 혼원기엔 쾌감만 담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당연히 다른 감각도 가능했다.
독물에 몸을 담그며 절절히 느꼈던 고통을 꾹꾹 눌러 담았다.
우우웅!
동그랗게 뭉친 혼원기 구슬이 진동했다. 투명하던 기운이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었다.
그것을 미간 사이에 툭 찔러넣었다.
“끄으으읍!?”
눈을 부릅뜬 암살자가 이를 악물었다. 빠드득 어금니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삼키지 못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으으으..!!”
몸이 굳어 움직이지도 못하고 전신을 경련했다.
우웅!
다시 한번 혼원기를 모으자 녀석이 기겁했다.
“그, 그만! 그만! 다 말하겠소!”
“귀찮으니까 빨리 말해라.”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치니 암살자가 다급히 말했다.
“그 환약은 승천단(昇天團)이란 것이오!”
“승천단?”
“먹기만 하면 경지를 돌파하는 하늘이 내린 비약이오.”
“하늘은 개뿔. 먹으면 죽던데 해결법은 없나?”
비웃듯 말하니 얼굴이 굳었다.
다시 입 다문 녀석에게 혼원기를 주입했다.
“끄아아악! 어, 없소! 선천진기가 모두 불타는 것인데. 그런 게 있을 리가.. 커헉..!”
선천진기라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닌 가장 순수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 기운을 인지할 수도 없었다.
혹시나 사용한다 해도 수명이 깎인다. 말 그대로 생명을 유지하는 필수적인 기운이었으니까.
승천단은 수명을 불태워 한순간 강해지는 역천의 단약이었다.
초절정에서 먹으면 어찌될까 궁금하긴 했다. 하지만 먹어볼 생각은 없었다.
‘화경에 오르는 게 그리 쉬울리 없다.’
놈의 이마를 톡톡 치면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다.
“왜 우릴 습격한 거냐?”
“사, 사혈방! 살아남은 사혈방 제자들이 전 재산을 모아 우리 살막에 의뢰한 거요!”
“살막? 우리가 여길 지날진 어찌 알고?”
“···이 시기라면 요녕에 갈게 뻔하지 않소. 지날 만한 경로에 자리 잡고 기다린 거요.”
살막이라면 지독하기로 소문난 암살자 집단이었다. 하지만 녀석 말은 태반이 거짓이었다.
“적어도 사혈방은 아니군.”
벌벌 떨던 암살자가 멈칫했다. 겁먹은 듯 굴던 것도 가짜였다.
애초에 살막도 아니었다. 살막과 충돌하기 바란 이간질이었다.
녀석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내가 원한 산 놈들이라고 해 봐야 몇 되지 않는데.. 이런 암살자를 고용할 만한 놈들은···. 사혈방이 아니라면 혈교인가?”
암살자의 눈가에 아주 미세한 경련이 생겼다.
“혈교가 왜 나를?”
잠깐 고민한 사이. 몇 개나 되는 이유가 한꺼번에 떠올랐다.
청봉산부터 모용상단, 최근 독곡까지. 본의 아니게 놈들을 몇 차례나 방해했다.
‘독곡 일이 들켰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암살자들이 습격하던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놈들의 공격은 그와 명장로에게 집중됐었다.
그와 명장로가 가진 공통점.
“사일검법?”
암살자의 심장 박동 속도가 미세하게 빨라졌다.
옆에서 듣고 있던 명장로가 말했다.
“사일검법? 그러고 보니 예전에 나를 습격한 놈들하고 결이 비슷하군. 이자들이 혈교란 말인가?”
“아마도 그런 듯 합니다. 혹시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글쎄.. 나는 40년간 점창파를 나선적도 없거늘..”
“사일검법 때문인 것 같긴합니다.”
고민하던 명장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신살무공을 익힌 자들은 실종되거나 사고에 휩쓸리는 일이 잦았네. 설마 이자들이?”
“신살무공? 그게 습격당할 이유가 됩니까?”
“그건 나도 의문일세. 과거 혈마에게 대적한 무공이라서? 허나 그게 지금 와서 무슨 의미가 있겠나? 단순한 복수?”
명장로가 답을 찾듯 혼자 중얼거렸다.
암살자의 이마에 딱밤을 때린 뒤 물었다.
“이봐 할 말 없나? 어렵사리 초절정에 올랐을 텐데 고문당하다 죽는 게 아깝지도 않나?”
“큭..”
눈을 감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죽일 테면 죽이란 태도였다.
“나 참.. 혈교놈들은 뭐 이리 입이 무거운지.. 혈마 그 자식이 엉덩이라도 대준다더냐?
암살자가 눈을 부릅떴다.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보인 반응 중에 가장 컸다.
“미, 미친놈이 감히..!”
부들거리는 암살자를 비웃었다.
“혈마 엉덩이 한번 어찌 해보려고 목숨까지 바치다니. 지독한 놈들이로다.”
“어어억..!”
놈의 눈깔이 뒤집어지기 직전이었다. 어찌나 분노했는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꺽꺽거렸다.
피식 웃고 명장로에게 말했다.
“적어도 혈교인 건 확실한 듯합니다.”
“···그렇군.”
“자세한 이유가 궁금하긴 한데 고문해서 캐내긴 시간이 아깝군요. 가까운 무림맹 지부에 넘기고 갈길 가지요.”
***
요녕.
임시로 세워진 거대한 천막에서 회의가 열렸다.
중년부터 하얀 수염난 노인까지. 이십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으나 조용했다.
“음..”
누구도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분위기가 점점 무거워졌다.
한 중년인이 헛기침하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오룡. 그 아이들이 모용세가한테 잡혀 있으니 이를 어쩐단 말입니까.”
어물쩍 피해왔던 주제가 올라오자 몇몇 이들의 인상이 구겨졌다. 오룡이 속한 문파나 가문의 대표들이었다.
“그게..”
누구도 차마 말을 못 했다.
결국 한 청년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젊은 청년이 미간을 찡그리자 모두가 흠칫거린 것이다. 마치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침묵하던 청년이 입을 뗐다.
“내 손자 교육을 잘못 시켰어. 그렇게 생각 없는 짓거릴 할 줄이야. 그대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이의 말에.
중년인이 기겁했다. 손사래 치며 다급히 말했다.
“아, 아닙니다! 검왕 어르신.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실수 좀 할 수도 있지요!”
청년의 정체가 검왕이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