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1 - 221화 - 무협지구(16)
221화 - 무협지구(16)
“아, 아닙니다! 검왕 어르신.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실수 좀 할 수도 있지요!”
검왕은 화경에 올라 젊음마저 되찾은 절대 고수.
그런 자의 입에서 사죄가 튀어나오게 하다니.
“이미 지나간 일을 탓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모용세가가 내건 조건에 집중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중년인이 서둘러 말을 이으며 검왕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나 괘씸하게 여길까 두려웠다. 친해져도 모자랄 판에 척을 져선 곤란했다.
눈을 굴리던 한 늙은이도 동의했다.
“험험. 맞습니다. 일단 급한 일부터 이야기하지요. 모용세가 놈들이 인질을 석방하는데 조건을 내걸었다고요?”
“예. 토벌대를 해산하고 모용세가의 안전을 보장하랍니다. 그러면 1년마다 한 명씩 석방하겠다고 합니다.”
“1년에 한 명이면···. 적어도 5년은 안전을 보장해 달란 것인가..”
5년은 꽤나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몰랐다.
“음..”
회의장이 침묵에 휩싸였다.
사실 받아들여선 안 될 조건이었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무림 공적과 협상했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문제였다.
“이걸 어째야 할지..”
그런데 하필 오룡이 속한 가문들은 하나 같이 명망 높은 가문이라 문제였다.
게다가 오룡들은 차기 가주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말을 잇지 못할 때. 검왕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적들의 의도에 놀아날 이유가 없네. 후발대가 모이는 즉시 곧바로 토벌을 시작하지.”
무림맹 군사 제갈영이 기겁했다.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미친..’
남궁 세가 사람들이 뻣뻣한 건 알았지만 제 손자 목숨까지 내팽개칠 줄은 몰랐다.
“어르신! 그랬다간 오룡들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검왕이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도 성인이니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야.”
군사가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모용세가엔 검왕의 손자만 잡혀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아들도 인질로 잡혀 있었다.
“오룡은 장차 정파를 지탱할 대들보입니다! 이리 쉽게 포기해선 안 됩니다!”
검왕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애초에 1년 후에 풀어 주겠다는 말도 믿을 수 없네. 게다가 한 명만 풀어 주겠다니.. 누굴 먼저 풀어 줄지 어찌 정한단 말인가. 우릴 이간질하려는 놈들의 수작이 괘씸하군.”
군사가 머뭇거렸다. 그도 사실 저 말이 맞다는 것은 알지만 아들 목숨이 더 중요했다.
“···사도련이 말썽인데 지금 모용세가를 치는 건 시기상조입니다. 일단 평화적으로 해결하고..”
“아니. 맹주께서 사도련주를 억제하고 있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토벌을 끝내야 하네. 이대로 모용세가를 내버려 두는 것은 화근을 키우는 어리석은 행동일세.”
“윽..”
“게다가 한 번이라도 예외를 뒀다간 무림 공적이란 이름이 가벼워지지 않겠는가. 그건 안 될 말이지.”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눈치 보며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림맹 군사 제갈영도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돌연 듣기 좋은 여성의 목소리가 회의장에 울려 퍼졌다.
“맞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토벌해야 합니다. 더 이상 미뤘다간 무림의 정기가 크게 상할 것입니다.”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군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낙화신녀. 설마 미래라도 보신 것입니까?”
차분한 인상의 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모용세가를 내버려 뒀다간 전 무림이 피바다에 잠길 것입니다.”
불길한 예언에 모두가 미간을 찌푸렸다.
일개 점쟁이의 말이라 흘려들을 순 없었다.
10년 전.
돌연 예언의 힘을 잃은 그녀는 땅에 떨어진 꽃, 낙화신녀라 조롱받았으나 그것도 옛말이었다.
최근 다시 예언의 힘이 돌아왔는지. 심심치 않게 미래를 맞추곤 했다.
정확도는 열에 서넛 수준이었으나 그것만으로 대단한 일이었다.
덕분에 낙화신녀의 의미는 정반대로 바뀌었다.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꽃처럼 귀히 여겨졌다.
눈썹 끝을 치켜든 군사가 물었다.
“···정확히 어떤 미래를 보신 겁니까.”
“핏속에서 태어난 혈인이 등장해 무림을 피바다로 물들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혈인..?”
군사가 입을 다물었다. 열에 서넛. 틀리면 다행이지만 만약 그녀의 말이 맞다면.
무림이 삼할 확률로 큰 재난을 치른단 이야기였다.
불편한 정적이 흐를 때. 천막 밖에서 전령 목소리가 들렸다.
“군사님.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괜찮으니 들어와 말하게.”
“점창파 명장로께서 도착했습니다. 그분께서 사일검수를 데려오셨는데..”
그나마 반가운 소식에 군사의 얼굴이 풀어졌다.
“사일검수? 사혈방을 홀로 멸했다는 그자 말이냐? 소문의 반만 진짜여도 제법 큰 힘이 되겠군.”
“예. 그런데.. 그..”
머뭇거리는 전령에게 혀를 찼다.
“좋은 일을 전하는데 왜 그리 머뭇거린단 말이냐.”
찔끔한 전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그게.. 잠깐 오해가 쌓여 시비가 좀..”
거기까지 말했을 때.
바깥에서 와아아! 하는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읏..?!”
차분히 앉아 있던 낙화신녀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붉은 입술이 벌려지고, 넋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아..”
홀린 듯 자리에서 일어나 천막 밖으로 향했다.
“갑자기 어딜 가는..”
누군가 말을 걸었으나 무시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어딘가로 향했다. 곧 함성소리가 들리는 곳에 도착했다.
“허! 소문이 진짜였어.”
“과연 몽산패도는 상대도 안 되는군. 저자가 사일검수라고?”
시장통마냥 사람들이 가득했다. 그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뭐야! 누가 미는.. 헉! 낙화신녀!”
“시, 신녀님!”
궁장차림의 미부인. 낙화신녀의 등장에 사람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소란이 일어났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훤하게 뚫린 길을 쉴 새 없이 걸었다. 결국 임시로 세워진 대련장에 도착했다.
그 위에 서 있는 한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 봤다.
“다시 말해 봐라. 계집년이 어쨌다고?”
“끄윽.. 제, 제가 자모해씁니다아.. 커흑..!”
몽산패도의 멱살을 움켜쥔 남자를 본 순간.
낙화신녀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짜릿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아아!”
주먹을 쥐던 사일검수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벼락 같은 무언가가 척추를 타고 전신에 퍼졌다.
“흐으으으읏!!”
털썩.
주저앉은 낙화신녀 가랑이 사이로 무언가 흘러내렸다.
끈적한 액체가 한가득 고였다.
*
시우가 바닥에 주저앉은 미부인을 보며 눈가를 좁혔다.
소향이를 희롱한 몽산패도를 교육하던 중.
어떤 여자가 눈을 마주치더니 말 그대로 지려 버렸다.
펑퍼짐한 궁장 치마를 입어 티는 안 났지만. 민감해진 감각을 속일 순 없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어처구니없었지만 괴상한 일은 계속됐다.
“부디..”
그녀가 간절한 표정으로 시간을 달라 한 것이다.
-나, 낙화신녀?!
-오오.. 듣던 대로 참으로 아름다우시군..
주변 반응덕에 예언자로 유명한 낙화신녀임은 알았지만. 여전히 이해는 안 갔다.
고민하다 다른 일행에게 양해를 구했다.
배정받은 숙소로 단둘이 향하며 머리를 굴렸다.
‘잠깐. 예언자면..’
힐끔 돌아보니 전형적인 동양 미녀가 보였다.
양손을 배에 올린 채 뒤따르는 중이었다. 공손한 자세가 마치 사극에서 보던 궁녀같은 느낌이었다.
‘혹시 옛날에 봤던 그 무림맹원 엄마?’
과거 이류 시절.
청봉산에서 마주쳤던 무림맹원이 떠올랐다. 분명 그녀의 어머니가 예언자라고 했었다.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배정받은 숙소에 도착했다.
딸깍.
방문이 닫힌 순간.
“미천한 종이 주인님을 뵙습니다.”
곱게 차려입은 미부인이 무릎 꿇더니 공손히 절했다.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주인님?”
처음 보는 여자가 분명한데 다짜고짜 주인님이라니.
“저한테 왜 주인님이라는 겁니까?”
귀부인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주인님.. 제발 말씀을 편히 해주시길 부탁드리옵니다.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좋아. 지금 좀 황당하니까 제대로 설명해 봐.”
“예. 방금 전 주인님과 마주친 순간. 수많은 미래를 보았습니다.”
“미래를 봤다고?”
낙화신녀의 얼굴이 발그레 해졌다.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예. 주인님께서 친히 그.. 은총을.. 하아..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꿇어앉은 그녀가 자꾸만 허벅지를 비비적거렸다. 어딘가 불편한지 달뜬 숨결을 계속 내뱉었다.
‘은총? 설마···.’
쪼륵 하고 흐르는 미세한 물방울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떤 그녀가 말했다.
“하아.. 주인님께 교육받던 미래를 본 순간.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날이 오늘을 위함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 미래에 나한테 조교라도 당했다고?”
“그렇사옵니다. 부끄럽게도 바보 같던 저는 주인님에게 벗어나려 몸부림쳤습니다. 허나 당연히 역부족이었지요. 결국 스스로 종이 되길 맹세하였습니다.”
노예라도 된 듯 구는 미녀를 다시 살폈다.
금실로 장식된 화려한 궁장이 잘 어울렸다. 볼록 튀어나온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가 보였다. 잘록한 허리와 대비되어 육덕진 몸매가 도드라졌다.
‘몸매는 합격.’
우유처럼 하얀 피부에 동그란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무릎 꿇은 채 커다란 눈망울로 올려다 봤다. 은근히 고집 있어 보이는 눈매가 유순하게 풀려 있었다.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래를 봤다니.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쉽사리 믿긴 힘든 일이었다.
‘일단 먹고 생각해도 될 것 같긴 한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낙화신녀가 머리를 조아리더니 말했다.
“주인님. 부디 제가 봉사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주시겠습니까.”
빨간 입술이 쩌억 벌어졌다. 음란한 구멍 사이로 말캉한 혓바닥이 유혹하듯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