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5 - 225화 - 무협지구(20)
225화 - 무협지구(20)
“제가 북문대 지휘를 맡기로 한 청유화입니다.”
모두가 말이 없자 청유화가 말을 이었다.
“혹여 불만 있으신 분은 지금 말씀하시지요. 토벌이 시작되고 분란을 피우신다면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처벌하겠습니다.”
눈가를 가늘게 좁힌 낭왕이 갑자기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나는 마음에 안 드는데? 화산파에서 귀하게 자란 아가씨가 지휘라니. 어찌 믿고 따르겠나.”
“···.”
청유화가 침묵하자 빠르게 말을 이었다.
“곱게자란 검봉께서 실전을 얼마나 겪어 봤을까 의문이오만.”
이백 여명의 무림인들이 웅성거렸다.
실실거리던 낭왕이 말했다.
“차라리 얼마 전 사혈방을 멸했다는 사일검수가 지휘를 맡는 게 어떻소?”
낭왕이 갑자기 가만있는 그를 끌어들였다.
순간 시선이 쏠렸다.
검봉 청유화와 잠시 눈을 마주치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관심 없으니 지휘는 아무나 하시오.”
당연히 낭왕보단 화산제일미였다. 게다가 지휘에 대해선 거의 문외한이었다. 굳이 지휘를 맡을 이유가 없었다.
낭왕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으나 곧 펴졌다.
“험.. 사일검수께서 관심 없다면 내가 하지. 규중 아가씨보단 내가 나을 테니.”
청유화가 작게 한숨 쉬더니 태연하게 앞으로 나섰다.
“좋아요. 시간도 없으니 깔끔하게 검으로 결정 짓지요.”
“음..?”
“어차피 강호란 강자존. 제가 진다면 그대의 지휘에 따르겠습니다.”
낭왕이 눈가를 꿈틀했다. 등에 메고 있던 거대한 박도를 뽑아 들었다.
“···좋소. 검봉의 명성이 얼마나 사실일지 한 번 봅시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쾅!
진각과 함께 땅이 터져 나갔다.
“하압!”
근육질 거한의 신형이 주욱 늘어졌다.
후웅!
허공을 쪼개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만 한 박도가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기습적인 공격이었다. 맹렬한 기세였으나 청유화의 표정은 그대로였다.
차앙!
사뿐사뿐 걸으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녀의 은빛 장검이 순간 흐릿해졌다. 두 개로 분열하더니 목과 심장을 동시에 노렸다.
기겁한 낭왕이 목을 뒤로 쭉 뺐다. 불안정한 자세로 심장 쪽 검격을 막았다.
커다란 박도와 얇은 장검이 만난 순간.
쩌엉!
거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구경하던 낭인들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충돌 결과를 확인한 그들이 입을 벌렸다.
“큭..”
낭왕이 세 걸음이나 물러나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와 반대로 청유화는 제자리에서 고고하게 서 있었다.
‘화산의 검은 변(變)과 환(幻)이 주력인가.’
대련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생각에 잠겨 있는 소향이가 보였다.
하얀 손가락을 허공에 까딱거렸는데. 신기하게도 조금 전 검격이 담겨 있었다.
한 번 본 것만으로 무언가 배운 것이다.
‘대단한데.’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며 끄덕거렸다. 귀여운 모습에 머리라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방해하지 않고 청유화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더 하시겠습니까?”
검봉의 차분한 어조에 낭왕이 인상을 구겼다.
입가를 씰룩이다 표정을 풀고 말했다.
“흐.. 제가 졌습니다. 명문의 제자답게 내공이 깊으시군요. 저 같은 잡배랑은 비교도 안 됩니다.”
청유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본인도 실력 차이를 느꼈을 텐데. 단순한 내공 차이라 말하는 것이 뻔뻔했다.
작게 혀 차더니 시선을 돌렸다.
“납득했다면 됐습니다. 사일검수 그대는요?”
청유화가 이쪽을 빤히 쳐다 봤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눈빛에 미약한 경멸이 느껴졌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아까 말했듯 누가 지휘하든 상관없습니다.”
“···좋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으니 본론으로 들어가죠. 사일검수, 낭왕, 해산파······ 방금 호명한 분들은 이리 오시지요.”
십여 명의 무인들이 모였다. 가장 실력 좋은 무인들이었다. 소향이는 그의 일행이라 뺀듯했다.
그녀가 기막을 치더니 말했다.
“앞으로 지시는 반말로 하겠습니다. 너희들은 조장이 되어 각자 스무 명의 무인들을 이끌면서······.”
***
한편 모용세가 정문.
검왕이 이끄는 본대가 모용세가를 향해 당당히 진군했다.
선두에 있던 무인이 검왕에게 공손히 말했다.
“어르신. 정보대로라면 저 담벼락이 몽연미리환진의 축입니다. 무너지면 한동안 무력화될겁니다.”
“알겠으니 비켜있게.”
검왕이 홀로 앞으로 나섰다.
“모두 전투 준비.”
나직한 목소리가 모두의 귓가에 들렸다. 마치 바로 옆에서 말하는 것처럼 또렷했다.
스릉.
검을 뽑아 들더니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러곤 천천히 내리그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내려치기처럼 보였는데 이변이 일어났다.
구구궁!
돌연 묵직한 기파가 몰아쳤다. 삼장 높이의 담벼락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앙!
산에 짓눌린 듯 폭삭 주저앉아 가루로 변했다.
일검에 진법을 무너뜨린 검왕이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입한다.”
검을 횡으로 긋자 수많은 머리가 동시에 잘려 나갔다. 담벼락 뒤에서 기습을 준비하던 모용세가 무사들이었다.
그 위용에 본대의 사기가 치솟았다.
“와아아아!”
기세등등해진 본대가 함성을 지른 순간.
콰과과광!!
파공성과 함께 집채만 한 주먹 형상이 날아들었다.
막 달려들던 토벌대의 내공이 진탕됐다. 단순히 주변에 있는 것만으로 피를 토했다.
표정을 굳힌 검왕이 허공에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
콰아아앙!
철검과 권강이 맞닿자 강렬한 충격파가 사방을 휩쓸었다.
“아아아악!!”
여파만으로 수십 명이 허공을 날아 튕겨 나갔다.
무표정한 중년인이 하늘을 밟으며 나타났다. 모용세가 태상장로인 모용원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검왕이 입을 뗐다.
“아직도 믿기지 않는군. 강직하던 그대가 어찌 혈교같은 사마외도와 어울린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투항하게.”
마지막 자비였다.
그런데 모용원은 대꾸도 없었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표정 변화 하나 없는 뻣뻣한 태도가 마치 인형 같았다.
검왕이 미간을 꿈틀했다.
“자네···.”
무어라 말하려던 그가 흠칫하더니 검을 휘둘렀다.
쩌어엉!
검강이 무형의 기세와 부딪쳐 굉음이 울렸다.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한 사내가 튀어나왔다.
“하하하. 검이 제법 매섭습니다.”
“화경?”
검왕이 눈가를 좁혔다. 남자가 누군지는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다. 모용세가 가주 모용휘였다.
그는 누구도 모르게 화경에 올라 있었다.
“하하하하! 무림맹 잡졸들이 이리 많이 모이다니.”
웅혼한 내공에 하늘이 웅웅 진동했다.
“으으..”
한 무림맹 무사가 신음을 내뱉었다. 단순히 옆에 있는 것만으로 내기가 진탕됐다.
그의 표정이 불안감으로 물들었다.
이 대 일.
누가 봐도 불리한 상황이었다.
만약 검왕이 죽으면 그들은 일방적으로 도륙당할 것이다.
침을 꿀꺽 삼키며 하늘을 올려다 봤다.
두 화경의 고수가 검왕을 포위하듯 좁혀들어갔다. 모용휘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검왕. 지금이라도 투항하시오. 섭섭지 않게 대우하겠다 약속하지. 만약 거부한다면.. 멀쩡히 죽지도 못할 것이오.”
“그대들의 실력으로 그게 될까···.”
“흐..! 사실 기대도 안 했소.”
가주 모용휘가 나직하게 말했다.
“되도록 사로잡되 불가능하면 죽여도 좋다.”
“예.”
태상장로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무토막처럼 가만히 서서 입만 벌렸다.
감정이라곤 일체 느껴지지 않는 괴이한 목소리였다.
쩌저정!
갑작스럽게 튀어나간 태상장로가 검왕과 맞붙기 시작했다. 주먹과 검이 만나 쉴 새 없이 폭음이 울렸다.
빈틈을 노리던 모용휘가 흠칫했다. 곧바로 뒤돌아 주먹을 뻗었다.
“웬 놈이냐!”
콰아앙!
소리 없이 손바닥을 내지르던 누군가가 한 발 물러났다.
“클클클. 어린 아해가 제법이로다.”
옷에 구멍이 숭숭 뚫린 노인이었다. 추레한 모습이었으나 눈동자는 번갯불이 튀는 것처럼 형형했다.
“걸왕!”
“자네는 나랑 놀지.”
개방의 방주 걸왕. 거지 노인이 씨익 웃더니 손바닥을 내질렀다.
우르릉!
용울음소리가 들리더니 뜨거운 공기가 몰아쳤다. 붉은 화염이 허공에서 일어나더니 용모양으로 변해 날아들었다.
콰아앙!
화경의 고수들이 본격적인 전투에 돌입하자 대기가 진동했다.
무림맹 무사가 흠칫 몸을 떨었다.
“다들 정신 차리고 돌격해라! 진법부터 제대로 깨야 한다!”
“예!”
두 무리가 충돌하고 치열한 전투가 시작됐다. 수많은 이들의 목이 잘리고 심장이 꿰뚫렸다.
***
화산제일미 청유화가 남몰래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구구궁!
정문 쪽에서 충돌음이 들리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각이 지났다.
북문대가 출발할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뜻이다.
‘드디어..’
조급한 마음이 자꾸만 고개를 들었다. 티 내지 않으려 최선을 다 했지만 소용 없었다.
‘가가.. 제발 무사하시길..’
잡혀 있는 연인을 생각하니 버티기 힘들었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조용히 말했다.
“모두 출발한다.”
누군가 긴장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그 소리와 함께 북문대가 담벼락을 타넘었다.
낭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개가 없는데? 몽연미리 어쩌고 하는 진이 설치돼 있다고 하지 않았소?”
“담벼락 전체가 진법의 축이다. 본대가 정문을 뚫었을 테니 없는 게 정상이다.”
“찝찝한데..”
“조용.”
“아 예.”
툴툴거리는 낭왕을 보고 있으니 짜증이 치밀었다.
‘하여간 낭인들이란..’
튀어나오려는 한숨을 억지로 삼켰다. 낭왕만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었다.
대열 중간에서 따라오는 한 남자도 거슬렸다.
‘저자가 사일검수라고?’
명성에 기대했건만 직접 만나 보니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두 여자와 바짝 붙어 있는 모습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서로의 옷깃이 닿을 정도로 가까웠다.
‘천박하긴.’
부끄러움도 모르는 것 같았다. 한시도 떨어지지 않는 그들을 보니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문득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모습에 아주 잠깐 멍해졌다.
‘나도 언젠가 가가랑..’
저도 모르게 연인을 떠올리다 흠칫했다. 남녀가 유별한데 망측한 생각이었다.
‘하아..’
쓸데없는 것에 신경 끄고 전방에 집중했다. 본대가 시선을 제대로 끌었는지 적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산책하기 좋게 조성된 숲길을 지나 점점 깊숙이 들어갔다.
한참을 걸어 긴장이 조금 풀릴 무렵.
그녀의 귓가에 전음이 들렸다.
-전방에 매복이오.
흠칫 놀라 굳으려는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자연스럽게 걸으며 최시우라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작게 눈짓하는 것을 보니 그가 보낸 전음이 분명했다.
감각을 집중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길쭉하게 이어진 숲길만 보였다.
‘···나보다 감각이 뛰어나다고?’
거기까지 생각하다 흠칫 놀랐다. 주변 조장들의 눈빛이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10명이 넘는 이에게 동시에 전음을 날린 것이다.
‘어떻게···?’
그러면서 미세한 기운 하나 흘리지 않았다. 내공을 다루는 감각이 얼마나 섬세한지 알 수 있었다.
‘···.’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약간 자존심이 상했지만 좋은 일이긴 했다. 단순 호색한보단 강자가 동료인 것이 좋았으니까. 그녀에겐 꼭 성공해야 할 임무가 있었다.
-최소협. 정확한 위치가 어디죠?
-가장 가까운 놈이 스무장 앞에 있는 나무 속이오.
전음이 가리킨 나무를 자세히 살폈다. 미묘한 이질감이 들긴 했다. 허나 그뿐이었다.
신경 쓰지 않았다면 무심코 넘어갈 수준. 사실 지금도 확실하진 않았다. 고민 끝에 한 번만 믿어보기로 했다.
-···모두 전투 준비.
조장들에게 일일이 전음을 보낸 뒤. 아무것도 모르는 척 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다섯 걸음이 남은 순간.
스릉!
기습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새하얀 검기가 섬전처럼 날아가 나무를 갈랐다.
“커억!”
나무 기둥이 허상처럼 일그러지더니 피가 튀었다. 상체가 잘려 나간 적이 털썩 쓰러졌다.
저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졌다.
‘···진짜였어.’
분노섞인 고함이 숲을 뒤흔들었다.
“들켰다! 모두 쳐라!”
숲이 통째로 일그러지더니 백명이 넘는 적들이 튀어나왔다. 진법 속에 숨어 있던 모용세가 무사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