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2 - 232화 - 무협지구(27)
232화 - 무협지구(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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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유화가 미간을 찌푸렸다.
오룡을 찾기 위해 모용세가를 수색하던 중. 갑작스레 주변에 안개가 차올랐다.
‘진법..?’
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몇 걸음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인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진법에 갇혔다. 어느새 옆에 있던 동료들도 모두 사라졌다.
‘이런.’
붉은 입술을 깨물며 멈춰 섰다. 허공에 검기를 흩뿌렸지만 변화는 없었다.
기감을 끌어올려 진법에 대해 파악하려던 찰나.
후웅!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다급하게 몸을 비틀었지만 늦었다.
촤아악!
“읏..!”
허리춤에 둔탁한 통증이 느껴졌다. 사람보다 큰 박도가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차앙!
곧바로 검을 뽑아 들고 겨눴다. 안개 너머 흐릿한 사람 형상을 노려봤다.
안개가 살짝 흩어지며 근육질 거한이 나타났다.
“낭왕..!”
“크흐흐.. 검봉. 이렇게 보니 정말 반갑구나. 네년을 처음 볼 때부터 이날만 기다렸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렸다. 제 키만 한 박도를 어깨에 걸치고 껄렁거렸다.
히죽거리는 얼굴이 보기만 해도 역겨웠다.
“하.. 당신 미쳤어?”
“흐흐흐.. 그럴 리가. 난 지극히 제정신이다.”
낭왕이 더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끈적하게 훑어보는 눈빛에 소름이 돋았다. 징그러운 벌레가 피부를 기어 다니는 느낌이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에 음욕이 가득했다. 뭘 노리고 온 건지 뻔했다.
“쓰레기 같은 낭인 놈.”
“푸흐흐! 계집년 입이 제법 험하구나. 그 예쁜 입술을 본좌의 육봉으로 틀어막아야겠다.”
“역겨운 놈. 그냥 죽어라.”
타앗!
땅을 박차려던 청유화가 비틀거렸다. 머리가 아찔했다.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아..?”
현기증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하마터면 검도 놓치고 그대로 쓰러질 뻔했다.
“크하하하하! 이 개 같은 년! 드디어 걸렸구나!!”
베인 옆구리가 화끈거렸다. 내공을 사용함과 동시에 독기운이 거칠게 일어났다.
‘독!’
평범한 독이 아니었다. 산공독이라도 당한 듯 내공이 유실되기 시작했다. 단전에 구멍이라도 난 것 같았다.
당장 내공을 끌어올렸다. 독을 제압해 태워 버리려 했다.
“어딜!”
히죽거리던 낭왕이 달려들었다.
거대한 박도가 벼락 같이 내리꽂혔다.
까앙!
청유화의 가느다란 팔이 튕겨 나갔다. 눈을 크게 뜬 그녀가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어떻게···?”
박도에 담긴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스며든 경력에 팔이 저릿거렸다. 지금껏 보여 준 실력보다 훨씬 강했다.
낭왕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 몸이 너 같이 곱게 자란년보다 약할 것 같으냐!”
“이 비열한..”
“푸핫! 무엇이 비열하지? 독? 애초에 독따위가 없어도 네년은 내 상대가 아니다.”
“···그럼 해독하고 제대로 붙어 볼 테냐?”
“크하하! 내가 왜? 헛소리 그만하고 아양이나 떨거라! 날 지아비로 모시겠다면 살려는 주마.”
“퉷! 네놈을 섬길바엔 죽겠다.”
청유화가 낭왕을 노려봤다. 눈동자엔 떨림하나 없었다.
“쩝.”
입맛을 다신 낭왕이 달려들었다.
까앙! 까앙!
거대한 박도에 청유화가 연신 뒷걸음질 쳤다.
주륵.
입가에서 핏물이 올라왔다. 박도에 담긴 거력에 내공이 진탕됐다. 낭왕은 그녀보다 고수였다.
파악!
“윽..!”
기습적으로 날아온 비도가 어깨에 박혔다. 알고 있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낭왕의 공격을 막는 것만 해도 한계였다.
언제 온 건지 주변에 십여 명의 기척이 느껴졌다.
한쪽 귀가 잘린 낭인이 안개를 헤치고 다가왔다.
“키힛! 개 같은 년! 내 귀를 자를 땐 이렇게 될 줄 몰랐지!”
“흐읏.. 다, 당신들.. 정신 나갔.. 큭..!”
까앙! 까앙!
낭왕이 쉴 새 없이 박도를 휘둘렀다.
“크하하하! 내 형제들을 건들면 누구라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청유화의 검이 튕겨 날아갔다.
“큿..!”
몇 걸음이나 물러난 그녀가 사방을 경계했다. 품 안에서 짧은 단검을 뽑아 들고 겨눴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스르륵 내려간 소매덕에 새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사내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혀, 형님. 잡아다 키우면 안 됩니까?”
땀과 먼지로 흐트러졌음에도 미모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야릇한 느낌에 심장이 떨렸다.
“맞습니다. 산속 깊은 곳에 숨겨두고···.”
“···헛소리! 이년은 모용세가 진법에 걸려 죽은 것이다. 아쉽지만 여기서 맛 보는 거로 끝내야 한다.”
망설이던 낭왕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최상급 여자는 흔치 않았지만 목숨이 더 귀했다.
화산파에게 걸렸다간 그들은 죽은 목숨이었다.
“···예.”
“이..!”
무어라 소리치려던 청유화가 비틀거렸다. 내공이 바닥나 단검을 들고 있기도 힘들었다.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터졌다. 붉은 핏방울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하아.. 하아..”
비틀거리던 그녀가 거친 숨결을 내뱉었다. 아까 비도에 찔린 어깨부근이 화끈거렸다.
‘이건..?’
시야가 흐릿했다. 감각이 이상했다. 피부에 닿는 공기가 뜨거워졌다. 가벼운 바람에도 소름이 돋았다.
“크핫! 천상의 여선도 가랑이를 벌린다는 춘약이다. 네년이라고 얼마나 버티겠느냐! 포기하고 지아비 모실 준비나 하거라!”
“춘약..?”
몽롱해져가는 정신에 머리를 붕붕 흔들었다. 혀끝을 으득 깨물었다.
‘가가.. 죄송해요..’
아릿한 통증에 흐려져 가는 정신을 붙잡았다.
‘저놈들한테 희롱당할 바엔..’
눈동자에 결심이 서리고. 단검을 역수로 잡았다.
심장을 찔러 자결할 생각이었다.
“엇?! 머, 멈춰!”
기겁한 낭왕이 손을 뻗었을 때.
그보다 빠른 자가 있었다.
터업.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순간 이동하듯 나타난 시우였다.
“그래. 귀한 목숨을 이리 버리면 안 되지.”
“아..?”
당황한 청유화에게서 단검을 빼앗았다. 고운 얼굴에 상처라도 났다간 곤란했다.
“어, 어떻게 여길..? 지, 진법은?”
주춤 물러난 낭왕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진법?”
검지 손가락을 하늘로 뻗었다. 주변에 가득하던 안개가 회오리쳤다.
손끝. 하나의 점으로 수축해 응집됐다. 안개가 뭉친 회색 구슬을 태워 버렸다.
“이것 말인가?”
주변 10미터 안개가 사라졌다. 그 속에 숨어 있던 낭인들이 훤히 드러났다.
낭왕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그, 그럴 리가! 말도 안 돼!”
진법을 장난감처럼 다뤘다. 화경의 고수가 아닌 이상 저리 자유로울 순 없었다.
화경이 아니라면.
눈을 부릅뜬 낭왕이 소리쳤다.
“쳐라! 놈을 죽여!”
명령과 동시에. 모두가 동시에 뒤돌아 도망쳤다. 뻔한 놈들이었다.
허공에 손가락을 툭 찍었다.
피잇.
한 줄기 지풍이 십여 가닥으로 갈라졌다. 번개처럼 날아가 그들의 척추를 꿰뚫었다.
“끄아아악!”
버러지처럼 땅에 처박힌 낭인들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반신이 마비된 상실감을 견디지 못 했다.
겨우 지풍. 단 한수에 모조리 제압됐다.
낭왕도 별 다를 것 없었다. 스며든 경력에 양다리가 아작났다. 힘줄마저 조각나 축 늘어졌다.
“크으윽..!”
바닥을 기어 도망가려는 낭왕에게 다가갔다. 이상한 점이 있었다.
“그런데 네놈은 어떻게 진법을 이용한 거냐? 뭘 어찌 알고?”
벌벌 떨던 낭왕이 다급히 말했다.
“사, 살려만 주시면 다 말하겠습니다! 커흑..! 제발..”
발로 녀석의 머리를 툭툭 차면서 말했다.
“헛소리 말고 선택해라. 말하고 곱게 죽을지. 고문당하다 더럽게 죽을지.”
“그, 그게..”
망설이는 녀석에게 피식 웃었다.
“됐다. 보나 마나 혈교에서 키우던 잡졸이겠지.”
“아, 아니..!”
촤악!
손끝을 휘둘러 검기를 흩뿌렸다.
“끄아아악!”
사지가 잘려 나간 낭왕이 비명을 내질렀다.
다시 한 번 손가락을 뻗었다. 분열된 지풍이 놈들을 기절시켰다.
무림맹에 넘겨 고문시킬 생각이었다.
사방이 조용해진 가운데.
“으읏.. 으으..”
청유화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독이라도 발작한 건지 움직이질 못했다.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가며 눈을 마주쳤다.
눈동자가 거칠게 떨렸다.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며 이쪽을 경계했다.
‘예쁘긴 하네.’
놀라지 않도록 천천히 손을 뻗었다. 흠칫한 그녀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하, 하지..”
턱이 굳었는지 말도 제대로 못했다. 무슨 생각인지 그녀가 이쪽을 노려봤다.
혓바닥을 천천히 내밀더니 으득 깨물었다.
“허.”
하지만 혀는 멀쩡했다. 힘도 들어가지 않는 턱으로 깨물 순 없었다. 투명한 침방울만 뚝뚝 떨어질 뿐이었다.
“아으..”
혀가 잘린다고 죽지도 않겠지만 보기 영 그랬다.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깨물지 못하게 막았다.
“으으..”
그녀의 눈빛에 절망이 차올랐다.
입이 파르르 떨렸다. 최선을 다해 깨물려는 것 같은데 힘이 하나도 없었다. 잘근잘근 애무하는 느낌만 들었다.
“그만. 치료해주려는 거니 얌전히 있으시오.”
부욱!
옆구리 쪽 무복을 찢었다. 뽀얀 속살 옆,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 하지.. 마아..”
미약하게 흔드는 고갯짓이 그녀가 할수 있는 반항의 전부였다.
‘지금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곤란하지.’
일단 시간도 없었다. 이곳은 사방에 적들이 널린 곳. 당화린과 소향이가 눈앞에 있어야 안심될 것 같았다.
게다가 억지로 해 봐야 의미 없었다. 아까처럼 자결하거나 복수하려들 게 뻔했다.
‘적당히 호감이나 쌓아야지.’
그녀의 눈가에 눈물까지 차올랐다. 빨개진 눈으로 노려봤다.
“진짜 치료하려는 거니 안심하시오. 이제 시작하겠소.”
주머니에서 꺼내는 척. 최상급 포션병을 꺼내 들었다.
주르륵.
붉은 액체를 옆구리에 흘려 넣었다.
“으읏..!”
외간 남자에게 속살을 보였다. 누군가에겐 죽을 만큼 치욕적인 일이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인지 아예 눈을 감아버렸다. 몸에 바짝 들어간 힘이 경계심을 말해줬다.
치료해주고도 욕먹긴 싫었다. 이럴 땐 생색을 제대로 내야 했다.
“이 약이 엄청나게 귀한 거란 것은 알아두시오. 심장이 터진 사람도 되살릴 수 있을 정도로.”
“아으..?”
사실 재생력만으로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운만으로 상처를 치유하는 건 너무 이질적이었다.
“됐군.”
어느새 매끈해진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흐으읏!?”
움찔거리는 그녀에게 눈짓했다.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해진 거 보이시오?”
그녀의 고개를 들어 상처를 볼 수 있게 했다. 커다란 눈동자에 경악이 차올랐다.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런.. 여기도 상처가 있군. 치료해 드리겠소.”
부욱!
어깨쪽 옷자락을 거침없이 찢었다. 상처를 찾는단 핑계로 하얀 속살을 마음대로 감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