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38 - 238화 - 무협지구(33)
238화 - 무협지구(33)
번쩍.
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번쩍였다.
요녕에 도착한 시우가 주변을 둘러보자 널찍한 방이 보였다.
‘좋네.’
보법을 밟으며 검을 휘둘러도 될 정도로 넓었다. 이런 방이 열 개가 넘었다.
무림맹에게 받은 장원이었는데 제법 마음에 들었다. 요녕에 지낼데가 없는 그를 위해 보상 중 하나를 미리 준 것이다.
‘응접실이 이쪽이던가.’
긴 복도를 따라 걸었다. 청유화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곧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녀가 보였다. 탁자를 툭툭툭 두드리는 게 상당히 조급해 보였다.
기척을 내자 그녀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아..! 오셨군요.”
“유화 소저. 미안하오. 수련 좀 하다가 늦었소.”
“아니에요. 막 화경에 올라 경지를 다스려야 한다는 거 알아요.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온 제 잘못이죠.”
허리를 꼿꼿이 편 반듯한 자세였다. 그런데 말이 꽤 빨랐다.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무슨 이유로 찾아왔을지 감이 왔다.
‘남궁 뭐시기 때문에 왔겠지.’
오룡들 심장을 본 순간 오늘을 예상했다. 물씬 풍기는 피 냄새에서 혈원이 느껴졌었다. 혈교가 수작 부려논 게 분명했다.
모른 척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잠깐 안 봤다고 정말 반갑군. 그동안 잘 지냈소? 상처는 다 나았고?”
그녀가 흠칫했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더니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아랫배를 꾹꾹 문질러지며 치료받았던 기억이 떠오른 듯했다.
“아.. 덕분에요. 그땐 정말 고마웠어요.”
“그게 뭐 별거라고. 신경 쓸 것 없소. 아! 좋은 차가 있는데 한잔 하시겠소?”
“차는 괜찮아요. 기다리면서 이미 마셨어요.”
“음.. 정말 좋은 차인데 아쉽군. 다음엔 꼭 맛보길 바라오.”
적당히 안부를 묻다가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여긴 무슨 일로? 아, 혹시 토벌 보상이라도 확정 된 것이오?”
그녀가 천천히 고개 저었다.
“아니요. 토벌 보상은 곧 있을 회의에서 결정될 거예요. 그것 때문은 아니고···.”
청유화가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딱 봐도 할 말이 있어 보였다.
“그게..”
차분히 기다려주니 머뭇거리던 그녀가 입을 뗐다.
“저번에 저 치료하면서 사용하셨던 그 약.. 심장이 터진 사람도 살릴 수 있다고 하셨는데 정말인가요?”
드디어 뿌려 뒀던 미끼에 반응이 왔다.
“심장? 당연히 가능하오. 즉사하지만 않는다면 거의 모든 외상을 치료할 수 있다고 보면 되오.”
“아..!”
순간 청유화의 눈이 커졌다. 꾹 다물렸던 입매가 활짝 피었다. 미녀가 웃자 방안이 밝아진 느낌이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감상하며 말했다.
“뭐.. 당연히 꽤 많은 양이 필요하지. 한 방울로 모든 상처를 회복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물건은 아니오.”
대수롭지 않게 말하자, 머뭇거리던 그녀가 물었다.
“···조각난 심장을 회복시킬 정도면.. 얼마나 필요한가요?”
“조각난 심장이라..? 흐음···.”
얼마나 필요할지 계산해봤다.
보통 최상급 포션 한 병이면 가능하다. 막 심장이 박살 난 것이라면 되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포션 사용법에 정통한 의사나 헌터 기준이었다.
이곳에도 나름 의술이 있겠지만 현대와는 결이 달랐다. 포션에 대해 잘 모르니 시행착오도 겪을 것이다. 한 병으론 무리였다.
“아마도 두세 병은 필요하지 않을까 싶소만?”
“두, 두세 병..”
청유화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비약이 얼마나 뛰어난 효과를 가졌는지 몸소 체험했다.
박도에 베인 옆구리를 찰나만에 회복시켰으니.. 여분의 목숨이라고 봐도 무방한 귀중한 약이었다.
“그렇게 많이..”
청유화가 무슨 생각하고 있을지 뻔했다. 차마 그렇게 많은 약을 달라고 할 염치가 없는 것이다.
“어디 아픈데라도 있소? 유화 소저라면 당연히 치료해 드리겠소.”
“아! 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인데 혹시..”
그녀의 얼굴이 희망으로 차올랐지만 안 될 말이었다.
“다른 사람? 그건 당연히 안 되지.”
“아..”
실망한 그녀가 안타까워했지만 단호하게 고개 저었다.
“나는 그저 그대가 마음에 들어서 호의를 베푸는 거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라니.”
미간을 찌푸리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이 약에 대해 퍼뜨린 것은 아니겠지?”
“아, 아니에요.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요.”
“음.. 그건 다행이군. 앞으로도 비밀은 지켜 주리라 믿소. 어중이떠중이들이 치료해 달라 찾아오면 귀찮거든. 약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네.. 비밀은 꼭 지킬게요.”
그녀의 어깨가 축 쳐졌다. 침울해진 얼굴로 바닥만 바라봤다. 약이 그리 많지 않다는 말에 실망한 듯했다.
“허참.. 그대가 슬퍼하니 내가 더 슬프군. 그리 약이 필요하다면 팔수도 있소. 하지만 이건 공짜가 아니오. 소량씩 팔 것이고 대가도 받을 거요.”
그녀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바짝 다가오더니 무릎까지 꿇었다. 양손을 꼬옥 쥐고 올려다 봤다.
“아! 정말 감사해요! 약만 팔아주신다면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을게요!”
“평생? 굳이 그럴 것까진 없소. 내가 원하는 대가는···.”
잠시 뜸 들이다 말했다.
“앞으로 유화 소저에게 편히 말하고 싶은데 어떻소?”
그녀의 미간이 살풋 찡그려졌다. 예상치 못한 대가에 당황한 듯했다.
“···겨우 그것이란 말입니까? 도대체 왜..?”
“당연히 그대랑 친해지고 싶으니까지.”
일부러 노골적인 눈빛을 보냈다. 그녀의 몸매를 느릿하게 위아래로 훑어 봤다.
눈치가 있다면 어떤 뜻인지 알아먹었을 것이다.
“무슨..!”
과연. 청유화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목소리에서 은근히 느껴지던 호의도 자취를 감췄다.
“···저는 연인이 있는 몸입니다.”
“이미 연인이 있다라.. 혹시나 했는데 역시 그랬군.”
그녀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무언가 고민하더니 머리를 휘저었다.
“죄송하지만 역시 안 되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붙잡았다.
“성급히 결정하지 마시오. 남녀 사이에 꼭 연인 관계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소.”
“네..?”
떠나려던 그녀가 멈칫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다양한 관계가 있지 않소. 예를 들면 벗이라던가?”
“벗이요..?”
“일단 함께 시간을 보내는 건 어떻소? 음.. 그대가 싫다고 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을 테니 걱정 하지마시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사실 명예따윈 없지만 내걸었다.
게다가 딱히 거짓말도 아니었다. 그녀가 싫다면 억지로 하진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 거부할 수 있을지도 궁금했다.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때마다 약을 조금씩 내어드리겠소. 어떻소?”
“······좋아요. 믿겠습니다.”
드디어 그녀가 미끼를 물었다. 흡족하게 웃으며 말했다.
“유화야 걱정하지마. 네가 싫다는 건 절대 안 할 테니까. 그저 친해지고 싶을 뿐이야.”
움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던 그녀가 표정을 풀었다.
“···됐어요. 오늘은 뭘할 생각이죠?”
“오늘? 됐어. 시간도 늦었는데 그만 돌아가. 아! 오늘치는 그냥 줄게.”
품에서 포션병을 꺼내 들었다. 아기 주먹만 한 크기였는데, 투명한 크리스털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유리병이었다.
루비색 붉은 액체가 찰랑거렸다.
대형 시설에서도 극소량만 추출되는 최상급 회복 포션. 마력공학이 발달된 아카데미 지구에서도 제법 귀한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못 구할 정돈 아니지만.’
제법 많이 비싸지만 돈으로 살 수 있다. 말도 안 되게 귀한 물건까진 아니란 뜻이었다.
“아..”
그녀가 홀린 듯 포션병을 바라봤다. 고급스러운 유리병을 살살 흔들 때마다 눈동자가 뒤따랐다.
허벅지 위에 곱게 올려진 손끝이 움찔거렸다. 가져가고 싶은 충동을 참고 있는 것이다.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진짜로 심장이 조각났다면.. 이 병 기준으로 두세 개가 필요할 거야.”
“아.. 네, 네..”
이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화들짝 놀랐다. 정신 못 차리는 모습이 살짝 귀여웠다.
“이건 오늘치.”
포션병 뚜껑이 열리고, 딱 한 방울의 붉은 액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스르륵 떠오른 포션 방울을 새로운 병에 담았다. 그것을 건네주자 그녀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청유화가 한 방울의 포션을 소중히 감싸 쥐었다. 이러니저러니해도 거의 공짜로 귀한 약을 받은 것이다.
“됐어. 어차피 그건 효과 확인하라고 준 거야. 한 방울로는 상처에 바르기도 힘들 테니까 여기다 섞어서 써.”
포션을 희석할 때 사용하는 마력수도 줬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고마워요.”
“됐다니까 그러네. 효과 확인해 보고 더 필요하면 다음에 다시 찾아와.”
“네.. 정말 고마워요.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자꾸만 인사하는 그녀를 억지로 보냈다. 내버려 두면 끝이 없을 것 같았다.
포션을 품에 안은 청유화가 떠났다. 두 손으로 소중히 감싼 것이 애라도 품은 듯했다.
“흐음..”
뛰듯이 걷던 그녀의 뒷모습이 곧 사라졌다. 턱을 쓰다듬으며 머리를 굴렸다.
‘몇 번에 걸쳐서 나눠줄까..’
그녀와 뭘 하며 시간을 보낼지 고민했다. 단계적으로 스킨십을 높일 생각에 즐거워졌다. 상상만으로도 기대됐다.
문득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남궁무혁. 그자는 제 애인이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알까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