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0 - 240화 - 무협지구(35)
240화 - 무협지구(35)
화려한 음식이 가득 찬 탁자 앞.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남궁무혁이 앉아 있었다. 불안한 얼굴로 가만 있질 못했다.
툭툭툭.
쉴 새 없이 탁자를 두드리던 그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곧바로 일어나 누군가를 마중했다.
“청진 자네 왔나?”
화산파 제자 청진. 활짝 웃으며 들어온 남자가 포권했다.
“남궁형. 오랜만입니다.”
인사하던 청진이 멈칫했다. 먹음직스러운 음식 향이 방안에 진동했다. 식탁에 온갖 화려한 음식이 가득했다.
가볍게 웃으며 농을 던졌다.
“아니 형님.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하시려고 이렇게 차리신 겁니까. 부담되게.”
부담된다는 말과 달리 표정은 밝았다.
그는 화산파 제자답지 않게 술을 좋아하는 괴짜였다. 먹고 마시는 것이 인생의 낙이었다.
식탁을 쭈욱 훑어보다 눈을 크게 떴다.
“어엇? 모, 몽연화주? 크.. 이 비싼술을! 역시 남궁형은 씀씀이가 다릅니다. 대단해요!”
“됐네.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빨리 앉게.”
“예!”
자리에 앉고 서로의 술잔이 채워졌다. 연노란빛 맑은 액체가 잔에 담겨 찰랑였다.
청진이 입맛을 다셨다. 은은한 연꽃 향기에 참기 힘들었다.
“어디..”
단번에 술잔을 들이킨 그가 눈을 번쩍 떴다.
“크..! 역시 끝내주는군요.”
“입에 맞다니 다행이군. 내가 살 테니 걱정 말고 편히 즐기시게.”
“하하하! 감사합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도사라 돈이 없어서.. 다음에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시지요. 제가 발 벗고 나서겠습니다!”
가벼운 분위기에서 술잔이 오고 갔다.
몽연화주 빈 병이 하나둘 늘어갈 때쯤. 청진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 하고 싶은 말 있으면 그냥 하시지요. 요즘 많이 바쁠 텐데 저한테 연락 주신 이유가 있을 거 아닙니까.”
남궁무혁이 멈칫했다.
확실히 요즘 바쁘긴 했다. 심장 속 벌레에 대해 알아보고 치료를 시도하느라.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벌레에 대해 알아챘단 사실을 혈교에게 들켜서 좋을 것이 없었다.
목숨을 인질 삼아 불합리한 요구를 할 수도 있었으니까. 당연히 기밀이었다.
“···자네가 내가 바쁜 걸 어찌 알았나?”
지나가듯 슬쩍 물었을 때. 청진이 피식거리며 말했다.
“에이..! 모른 척 하시긴! 청사저가 매일 같이 나가던데 같이···. 아, 아닙니다. 그저 토벌이 끝났으니 바쁘겠거니 했지요.”
남궁무혁 표정이 굳어지자 청진이 당황했다. 눈치 빠르게 말을 틀었지만 뻣뻣해진 얼굴은 펴지질 않았다.
“청매가 매일 나갔다고···? 어디로?”
청진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 남궁형. 연인 소식을 왜 저한테 묻습니까. 저야 잘 모르지요.”
“사실 요즘 바빠서 자주 보지 못했네. 그런데 유화도 바빴나 보군?”
“그, 글쎄요.”
“···아는 게 있는 것 같은데 알려줄 수 있겠나?”
“에이!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저야 수련광이니 어디 적당한 곳에서 검이나 휘둘렀겠지요.”
남궁무혁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내가 자네를 도와 준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이러긴가?”
난처한 듯 머뭇거리던 청진이 말했다.
“···확실히 밖으로 자주 나가긴 합니다. 오랜만에 화산에서 내려왔으니 여기저기 구경다니는 것이겠지요.”
“구경? 유화 성격은 자네도 알고 나도 아네. 그녀가 그럴 것 같은가?”
“크흠! 그야..”
“요즘 느낌이 뭔가 이상해. 자네 정말 나한테 할 말 없나?”
눈동자를 굴리던 청진이 망설이다가 입을 뗐다.
“···숨기려는 건 아닙니다. 제가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닌데 괜히 오해만 심어 줄까 싶어서 그런 겁니다.”
“내가 알아서 잘 걸러 들을 테니 걱정 마시게.”
“쩝..”
술잔을 내려놓은 청진이 말했다.
“사실.. 청사저가 아침마다 나가서 해 질 녘에나 돌아옵니다. 수련장에서도 거의 안 보여서 조금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저는 남궁형이랑 나들이라도 다니는 줄 알고..”
안색이 굳은 남궁무혁이 중얼거렸다.
“아침마다···?”
***
청유화가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리깔았다. 앞에 선 두 여자의 시선이 따가웠다.
당화린은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 봤고, 소향이란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눈가를 좁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주눅 들었다.
“그.. 왜, 왜..?”
왠지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스승님한테 평가받는 것만 같았다.
“흐음..”
시선이 한 곳에 쏠렸다. 두 여자가 그녀 상체를 집중적으로 노려봤다.
노골적인 시선에 움찔했다. 저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나며 팔뚝으로 가슴팍을 가렸다.
얼음처럼 차갑던 소향이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우움..”
청유화 가슴과 제 가슴을 번갈아 보더니 입꼬리가 미미하게 올라갔다.
작은 머리를 천천히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좋아. 내가 더 커.”
뜬금없는 말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데도 묘하게 기분이 나빠진 가운데.
암화란 별호를 얻은 당화린이 커다란 가슴을 출렁이며 말했다.
“한동안 자주 볼 것 같은데. 친하게 지내요. 언니라 불러도 될까요?”
“네..? 아.. 그, 그러세요.”
“좋아요. 유화 언니. 앞으로 잘 지내봐요. 대신··· 제가 첫 번째란 것만 알아 둬요.”
“첫..번째?”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뜻인지 물어볼 새도 없었다.
옆에 있던 소향이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말랑해 보이는 볼살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앓는 소릴 냈다.
“우으..”
당화린을 노려보던 그녀가 멈칫했다.
무언가 깨달은 듯 입이 벌어졌다. 두 눈을 깜박이다 갑자기 히 웃더니 말했다.
“아닌데. 내가 첫 번째인데.”
“응..? 무슨 헛소리야.”
소향이의 올라간 입꼬리가 묘하게도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난 시우랑 이미 10년도 전에 만났는 걸.”
“···뭐? 거, 거짓말하지마!”
작게 콧소리까지 낸 소향이가 여유롭게 말했다.
“흐응.. 진짠데에..”
“야! 이리 와봐! 그게 무슨 뜻이야!”
대답도 없이 종종걸음으로 떠나버렸다. 당화린이 다급히 쫓아갔으나 멈추지 않았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을 때 누군가 다가왔다.
“유화 왔어?”
“아.. 사일검수님.”
“사일검수? 그냥 시우라고 편하게 불러.”
“···알았어요.”
“좋아. 일단 따라 와.”
곧 널찍한 방에 도착했다. 사방이 막힌 조용한 곳이었다.
한 방에 외간 남자와 단둘이 있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잘못한 기분이었다.
마치 죄를 범하는 느낌. 마음속 어딘가에 있는 소중한 무언가가 콕콕 찔리는 것만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보상에 대한 회의 결과가 나왔어요.”
“벌써? 꽤 오래 걸릴 줄 알았는데.”
“거의 확정났다고 봐도 무방해요. 사일검수께선..”
“시우라고 하라니까.”
“아.. 시우..님께서 받을 보상은.”
“시우님 말고 그냥 시우라 해.”
“···네. 시우가 받을 보상은 모용세가에서 얻은 재물과 영약의 이할이에요.”
“이할?”
존댓말도 반말도 아닌 이상한 어투에 웃던 시우가 놀랐다.
전체의 오분의 일.
혼자 토벌한 것도 아닌데 보상이 생각보다 많았다. 과한 느낌이었다.
“부족하신가요?”
“아니 전혀. 오히려 넘치는데?”
청유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모용세가에서 얻은 무공서도 원하신다면 읽어보실 수 있을 거예요.”
청봉현에 사천당가를 세우려면 영약이나 재물은 많을수록 좋았다.
끄덕이고 있을 때. 그녀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모용세가에서 관리하던 몇몇 지역이 할당될 거예요. 매년 들어오는 금이나 영약이 상당할 거예요.”
“땅까지 준다고? 좋긴 한데.. 나는 그곳을 관리할 인력이 없는데?”
“걱정 마세요. 10년 동안 무림맹이 대신 관리해 줄 거예요. 그 후에는 직접 사람을 파견하시던가 할당된 지역을 포기하셔야 할 거예요.”
“관리까지 해준다고? ..유화 너 무리한 거 아냐?”
멈칫한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받을만 해서 받은 거니 괘념치 마세요.”
청유화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고생했을 게 뻔했다.
“음.. 아니야. 내가 보기엔 꽤 무리했을 거 같아. 보답을 좀 하고 싶은데?”
두 눈을 깜박이던 그녀가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목숨도 구해주셨고 약도 주시는데 이 정도야..”
“에이 됐어. 자 선물.”
철컥.
그녀의 손목에 팔찌를 끼워줬다. 자연스러운 손짓에 그녀는 반응도 못 했다.
쏙 들어간 팔찌가 피부에 달라붙듯 조여 들었다.
“읏..?”
당황한 청유화가 빼려 하자 다시 쭈욱 커졌다. 두 배는 커진 팔찌가 손목에서 빠져나왔다.
“커, 커졌어..?”
팔찌를 손에든 청유화의 표정이 멍해졌다. 스스로 크기가 변하는 팔찌라니.
“···이게 뭐죠?”
“편리한 장신구라 생각해. 여러 기능이 있는데 크기 조절이랑 ‘클린’이라고 말하면서 내공을 집어넣으면···.”
설명이 이어질수록 입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도, 도대체 어떻게..?”
요괴 부산물로 만든 몇몇 기물들이 신기한 공능을 지녔다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만든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그거 차고 있으면 어지간한 독엔 당하지 않을 거야. 피독주랑 비슷한 거로 생각하면 돼.”
“독까지요..?”
“응. 저번같은 일이 또 있으면 안 되잖아?”
팔찌를 든 손이 잘게 떨렸다. 이것도 엄청나게 귀한 물건이었다.
상처를 단숨에 치유하는 약부터 생각했지만, 말도 안 되는 신기한 물건이 너무 많았다.
“이,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그리고 저는 장신구 같은 거 안 차요.”
팔찌를 돌려주려는 그녀에게 시우가 손을 휘휘 저었다.
“됐어. 이미 준 거니 싫으면 그냥 버려. 이제 수련이나 같이하자.”
“수..련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