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41 - 241화 - 무협지구(36)
241화 - 무협지구(36)
***
이른 새벽.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남궁무혁이 길을 나섰다. 화산파가 머무는 장원을 향해 은밀히 이동했다.
‘후우.. 아닐 거야.’
어두운 골목에 숨어 기척을 죽였다. 장원을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녀린 신형이 대문을 열고 나왔다.
‘청매..!’
진짜로 그녀가 나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인데!
충혈된 눈으로 청유화를 노려봤다. 차림새부터 평소와 달랐다.
단정한 무복 사이 무언가 반짝거렸다.
‘팔찌..?’
가느다란 손목에서 못 보던 장신구가 보였다.
눈에 내공을 집중해 자세히 살폈다. 처음 보는 팔찌였다. 기이한 문양이 각인되어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은 것이 분명했다.
‘내가 준 건 안 껴놓고..?’
검 휘두르는데 방해된다며 어떤 장신구도 사양했는데. 이제 와서 팔찌를 차다니.
배신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주먹을 꽉 쥐었을 때. 돌연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찌푸려진 얼굴로 사방을 둘러봤다.
‘윽.’
곧바로 골목에 숨어 기척을 감췄다. 마음이 흐트러져 하마터면 들킬뻔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녀가 다시 길을 떠났고.
불안한 예감은 항상 적중했다. 그녀가 도착한 장소를 믿고 싶지 않았다.
‘큭..’
커다란 장원. 주인이 누군지는 보자마자 알아챘다. 맹에서 사일검수에게 제공한 집이었다.
“여길 왜..?”
상상하기도 싫은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그녀를 붙잡아 말리고 싶었다.
흐려지려는 이성을 억지로 붙잡았다. 그녀를 믿고 기다렸다.
제자리를 서성이며 얼마나 기다렸을까.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불안감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오늘따라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렀다.
청유화를 믿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그녀가 사내 품에 안겨 교성을 내뱉던 꿈이 자꾸만 떠올랐다.
‘제기랄!’
결국 단전에서 내력을 끌어올렸다. 그녀에 대한 신뢰가 금간 순간이었다.
우웅.
경맥을 타고 흐른 내력이 귀에 집중됐다. 청력이 증폭돼 온갖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천리지청술. 대성하면 천리 바깥 소리도 듣는다는 무공을 펼친 것이다.
잡다한 소음을 걸러냈다. 사일검수 집안에서 들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하아.. 하아..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스치듯 지나갔다. 익숙한 목소리에 눈을 부릅떴다.
귀에 내공을 더욱 밀어 넣었다.
-헤윽..♥ 처, 천천히잇.. 아아아앙!? 뭐, 뭔가 달라졌.. 하아악!
끈적하게 녹아내린 여성의 신음이 들린 순간.
“컥!”
피를 토할 뻔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머릿속이 멈춰버렸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안 돼!!”
곧바로 담벼락을 뛰어넘어 땅을 박찼다.
이를 악물고 무작정 달렸다. 곧 굳게 닫힌 방문이 보였고.
콰앙!
앞뒤 가릴 것 없이 발로 차버렸다. 산산조각 난 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청매!!”
목에 핏대가 생길 정도로 고함치다 멈칫했다.
“무혁? 당신이 여길 왜..?”
지친 듯 숨을 고르던 청유화가 미간을 찡그렸다. 그녀 모습을 보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어어..?”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방안 풍경을 본 순간 실수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막 대련 중이었던 듯. 검을 맞댄 두 여자가 보였다.
애초에 상대가 사일검수도 아니었다. 차기 검봉이라 불리는 소향이란 여인이었다.
소향이의 표정이 팍 찡그려졌다.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무슨 짓이죠? 함부로 들어와서 문까지 부수다니.”
“그, 그게···.”
도저히 변명할 수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머리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팍 숙였다. 어처구니없는 오해로 엄청난 실례를 저질렀다.
“무슨 일이야.”
어디선가 땀으로 흠뻑 젖은 사일검수가 나타났다.
박살 난 문을 보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이건. 네놈이 한 짓이냐?”
“큭.. 죄,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든 수리 해 놓겠습니다.”
남궁무혁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쩔 수 없이 그에게도 고개 숙였다.
소향이란 여인에게 하던 것과 느낌이 달랐다. 치욕감에 버티기 힘들었다.
“죄송해요. 아마도 저 때문에..”
청유화까지 고개 숙이자 더욱 그랬다. 굴욕감에 표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쯧.. 됐으니 나가라. 수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 다음부턴 절대 이런 일 없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떠나던 남궁무혁이 멈칫했다.
“유화 이제 네 차례야. 따라와.”
“아.. 네.”
순간 청유화와 시선이 마주쳤다. 머뭇거리던 그녀가 빙긋 미소 지었다.
“···당신은 나중에 봐요.”
천천히 돌아선 그녀가 떠났다. 사일검수를 따라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유화라고..?’
반말로 친근하게 부르다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어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사정이.. 있겠지.’
한순간이나마 그녀를 믿지 못했던 것이 미안 했다. 두 번이나 의심할 순 없었다.
***
스르륵.. 탁!
문 닫히는 소리에 청유화가 움찔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수련실이 보였다. 대여섯 명이 동시에 대련해도 될 정도로 넓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방이다.
외간 남자와 단둘이 있는 것은 도저히 익숙해지질 않았다. 그래서도 안 되었고.
“저.. 화린 동생은 어딨나요?”
“화린 동생?”
“아.. 언니 동생 하기로 했어요.”
“그래? 잘됐네. 자주 볼 텐데 서로 친해지면 좋지. 아, 화린이는 지쳐서 자고 있어.”
“벌써요? 수련이 힘들었나 보네요? 이 시간에 잠들다니..”
단둘이 수련하러 떠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녹초가 되다니. 신기했다.
“나도 몰랐는데. 화경에 오르면서 기운이 달라졌더라고. 좀 더 민감. 아니, 내공 효율이 달라졌다고 해야 되나? 너무 세게 했나 봐.”
무언가를 떠올리듯 턱을 쓰다듬던 그가 중얼거렸다.
“어쩐지.. 영령이가 그렇게 힘들어하던 게 조금 이상하긴 했어.”
‘영령?’
물어볼 것도 없이 여자 이름이었다.
‘설마 여자가 또 있나..?’
첫 만남때부터 느꼈지만 엄청나게 호색한 사람이었다.
‘아니지..’
어떤 사이인지도 모르는데 성급하게 판단할 순 없었다. 선입견은 무인에게 좋지 않은 습관이었다.
“앞으론 조금 살살해야 하나..”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아, 미안. 갑자기 딴생각이 나서.”
“괜찮아요.”
말하다 보니 수련실 구석에 도착했다. 차 마시기 좋게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는 곳이었다.
‘이상한 의자네..?’
네모난 탁자를 가운데 두고, 길쭉한 두 개의 의자가 있었다. 누워서 자도 될 정도로 길었다.
푸욱.
앉자마자 몸이 살짝 들어갔다. 푹신한 느낌이 신기했다.
부드러운 가죽으로 된 의자를 더듬고 있을 때.
맞은편에 앉은 그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어..?”
두 눈을 깜박거렸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사람 머리만 한 주전자가 허공에서 생겨났다.
주전자에선 뜨거운 김까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청봉밀차인데 맛있을 거야.”
조르륵.
허공에서 튀어나온 잔에 찻물이 담겼다.
‘또 나왔어!’
어느새 건네받은 찻잔을 보고 있으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 암기술인가..?’
하지만 소매가 너무 작았다. 찻잔은 몰라도 주전자는 숨길 수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한 건지 고민하고 있을 그때.
“청봉밀차 싫어해? 다른 거로 줄까?”
찻잔을 빤히 보고 있으니 그런 말이 들렸다.
“아, 아니에요. 청봉밀차 좋아해요.”
사치를 싫어하는 스승님덕에 많이 마셔보진 못했지만 좋아하는 차였다.
호록.
조심스레 마신 순간. 눈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맛있네요. 그것도 엄청.”
“그렇지?”
“약간 씁쓸한 게 단맛이랑 잘 어울려요. 뒷맛도 부드럽고.. 제가 먹어 본 청봉밀차 중에 가장 나아요.”
“음. 영령이가 들으면 좋아하겠다.”
차를 홀짝이고 있으니 긴장이 점점 풀렸다. 전신 곳곳에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하아.. 정말 좋네요.”
그녀를 보며 웃던 시우가 말했다.
“소향이랑 대련은 어땠어?”
“···강하더군요. 나이도 어린데 내공도 깊고 기초도 탄탄해요.”
소향이는 서른인 그녀보다 열 살이나 어렸다. 그런데도 내공은 거의 비슷했다.
정순함만 따지면 더 나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런 내공을 가지게 된 건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그렇지? 소향이가 나이에 비해 강하긴 해.”
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본인이 칭찬들은 것처럼 좋아했다.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흡족하게 웃던 그가 말을 이었다.
“유화 너는 어때? 도움 좀 됐어?”
“네. 소향이는 저랑 검술이 비슷해서.. 정말 큰 도움이 됐어요. 사실 토벌대에서 봤을 때부터 대련을 청하고 싶었어요.”
“다행이네. 화린이도 깨어나면 잘 부탁해.”
“걱정 마세요.”
“음.. 그냥 부탁하긴 좀 그렇고. 나도 무공 좀 알려주고 싶은데 어때?”
“무공이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뻔했다. 하지만 너무 일방적으로 받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다.
“아, 아니에요. 약도 주시는데 무공까지..”
“에이 괜찮아. 약은 이미 주기로 약속한 건데 또 우려 먹을 순 없지. 게다가.. 이대로 가면 얼마 안 가서 소향이한테 따라잡힐 걸?”
“···네?”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 소향이와 실력이 비슷하다지만 아직은 그녀가 위였다.
10년의 경험 차이는 적지 않았다. 소향이의 재능이 대단한 것은 알았지만 쉽게 따라잡힐 거라 여기지는 않았다.
“검은 몰라도 내공은 얼마 안 가서 따라잡힐 거야. 내가 매일 도와주고 있거든.”
“···내공 수련을 도와 준다고요?”
“어. 손목 좀 잡아도 될까?”
손목.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 흐려져가던 경계심이 되살아났다.
“서로 기운을 교류하는 방식인데. 직접 경험해 봐야 이해가 쉬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