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 해피 엔딩.(9)
섹스의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면, 이상하리만큼 생각나는게 없었다.
분명 첫 경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건 오직 하나.
자신이 마왕을 범했다는 사실 단 한 가지 뿐.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제 발 밑에 쓰러져 있는 마왕을 바라보며 용사가 중얼거렸다.
제 좆에서 나온 정액으로 범벅이 된 마왕은 더 이상 악의 축이 아닌, 그저 형편없이 겁탈 당한 여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숨을 헐떡이며 신음을 토해내고, 정액인지 눈물일지 모를 액체로 얼굴을 가득 채운 그 아슬아슬한 모습.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로 얼마나 유린했던지, 봉긋하게 솟아오른 젖가슴이 제 손자국들로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빌어먹을..."
자괴감이 치솟거나, 마왕을 향해 미안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마왕의 질 내에 제 음경을 삽입한 직후 느껴졌던 짙은 만족감.
귀두를 타고 들어와 목구멍 근처까지 울려퍼지는 쾌락의 파장이 아직도 몸 안을 맴도는 것만 같았다.
수치스럽다.
이딴 천박한 몸뚱이에 욕정해버린 끝에 선을 넘어버린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차라리 조금의 음심이라도 있었다면 이 정도로 우울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저 자신의 고간에 달린 것이 시키는대로 움직여, 제 몸이 만족할 때까지 허리를 흔들고는 그것에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고 중얼거리는 꼴이라니.
"바람이라도 쐬야겠어."
마왕을 비어있는 방에 눕혀둔 건 어디까지나 자그마한 변덕에 불과했다.
난잡하게 찢어진 옷 근처에 아른거리는 관능적인 육신 위에 침대보를 덮어준 것 또한, 한 줄기의 변덕일 뿐이었다.
복도를 넘어, 마왕이 앉아있던 옥좌와 홀을 지나 정문을 나선다.
하늘 높이 뜬 달이 오늘따라 처량해 보였다.
"...너무 감정적이게 됐어."
감정을 죽이고, 마왕을 죽였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다.
여신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고 제가 원한대로,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했다면 이런 괴상망측한 생각을 하지도 않았겠지.
용사가 제 가슴께에 뭉쳐져 있던 숨을 천천히 토해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그저 쓰르라미 한 마리가 울고 있는 세상은 과할 정도로 고요했다.
"죽인 만큼 낳게 한다니... 웃기지도 않는 짓을."
언젠가 제 옆집 아저씨가 피우던 연초가 떠올랐다.
연초를 피우는 건 멋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숨을 가리기 위해서 피는 것이라고 했던가.
어렸을 적에는 막연히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지만, 지금 와서는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상처 뿐이던 유년기를 지나 성인이 되었는데도 어째서 나는 그대로 상처 받은 체인가.
'누구 때문인지, 알고 있잖아요?'
"큭..."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에 용사의 주먹이 부르르 떨려왔다.
알지. 잘 알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말고.
이 모든 것이 마왕에 의해 일어난 일들이라는 것을, 그 누구보다 용사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죽인 이는 죽어 마땅하지만, 단순이 죽는 것만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했다.
죽였으니, 되살릴 수 없다면 죽인 만큼 낳아야지.
차갑게 식은 머릿속 안에서 작은 불씨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들어갈까."
더 이상 바깥에 있다가는 마왕이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사가 다시 마왕성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토록 자연스럽게 마왕성 안으로 들어서는 용사라니,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그런 용사의 뒷모습를 보며 마왕이라고 손가락질 했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어두운 조명이 켜진 복도는 어둠의 소굴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로 음산했지만, 인기척 하나 존재하지 않았다.
"...았나요?"
"...했다."
목소리가 들렸다.
마왕을 눕혀두었던 방 안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에 전신의 근육이 뻗뻗하게 굳었다.
누군가가 마왕의 곁에 있다.
설마 아직도 살아남은 마족이 있던 건가?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마왕의 옆에 또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전혀 기분 좋지 않았다. 오히려 끔찍했지. 죽고 싶을 만큼 절망스럽고, 공포스러웠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한 가지 깨달은게 있다면 용사는 그 이름값에 걸맞을 정도로 쓰레기라는 것ㅡ"
하지만 그곳에 있는 건 도망칠 준비를 하는 마왕도, 그녀를 도우러 온 마족도 아니었다.
"아, 용사님! 언제부터 와계셨던 거에요? 소리도 없이 오시다니 깜짝 놀랐잖아요!"
해맑게 인사하는 성녀의 모습에 용사가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엘리가 왜 여기에 있지?
용사의 시선이 다급하게 마왕을 향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아 헐벗은 꼴의 몸과 신체 곳곳에 남아있는 격렬한 섹스의 흔적들.
그리고 바닥에 묻은ㅡ 아니, 쏟아져 있는 정액의 웅덩이까지.
"...설마, 다 봤어?"
"다 보고 말고요! 용사님이 마왕과 거칠게 섹, 아니 교미를 할 때부터 전부 다 봤다고요!"
큰 목소리로 음란한 단어들을 꺼내드는 성녀에 용사의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뭐? 방금 뭐라고...
언제나 성스럽고, 순결하고, 조용하던 성녀가 이런 경박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니.
믿을 수 없었다.
차라리 마족이 성녀의 모습으로 변장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성녀의 신체에 깃든 신성력은 거짓말로도 꾸며낼 수 없는 것이었다.
가짜가 아니라면 남은 경우는 성녀가 이상하게 변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성녀를 이상하게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이 자리에 오직 한 명 뿐이었다.
"대체, 대체 엘리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이 빌어먹을 년아!!"
"큭..."
허벅지를 비비 꼬며 얼굴을 붉히는 성녀를 지나쳐 마왕의 앞에 서자,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려 그를 바라보았다.
상처 가득한 표정.
감히 제가 무엇이 잘났다고 그딴 얼굴을 하는지.
속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을 버티지 못하고 눈앞에 보이는 양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쥐어댔다.
단순히 어깨를 쥐는 것만으로도 마왕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런 속셈이 있었던 거냐?! 엘리를 이딴 꼴로 만드려고?!"
"요, 용사님. 잠시 진정ㅡ"
"씨발 년, 빌어먹을 년!"
분노가 차오를수록 용사의 고간 또한 거칠게 날뛰기 시작했다.
'맨 정신으로 마왕을 범할 수 없다면 분노에 몸을 맡기는 수 밖에 없겠죠.'
분노가 곧 성욕이 되고, 양식이 되어 용사의 하반신에 강렬한 정력을 불어넣는다.
얼마 전까지 미친듯이 정액을 토해냈던 고환이, 다시금 눈앞의 원수를 임신시키기 위해 그 속을 허여멀건 즙으로 가득 채워냈다.
그나마 생각이라는 것을 하던 머리가 제 좆에 지배당하는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그만 두거라."
"왜, 갑자기 겁이라도 나나봐?"
귓가에 들려오는 가냘픈 목소리를 잔뜩 비꼰다.
제아무리 마왕이라도 좆에 박히는 건 싫었나? 그렇게나 헉헉거리며 신음을 내뱉었으면서 말이야!
제 자지를 쳐박는다면 조금 전과 같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그래, 아이를 낳으려면 보지가 망가지더라도 잔뜩 섹스해야지.
심지어 아직 한 명도 낳지 않았으니까.
"...그래."
"..."
"그러니까 제발, 제발 오늘은 여기서 그만둬다오... 가랑이 사이가, 너무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런 용사에게 돌아온 건 마지막 남은 자존심도, 비꼼도 아니었다.
'...마왕이 나한테 빌고 있다고?'
마왕은 용사에게 빌고 있었다.
비록 표정은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용사의 눈에는 그녀의 얼굴이 마치 울상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환각 마법에 당한 것 같은 기분에 머리를 붕붕 흔들며 잡념을 떨쳐내려고 했지만, 눈앞의 환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왕이 나에게 빌고 있다니.
당장에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동그란 눈동자에 머리 끝까지 차올랐던 분노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대로 또 넣었다가는 정말 죽어버릴지도 몰라. 그건, 그건 네가 바라던 것이 아니지 않나?"
"..."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해오는 마왕에 용사가 제 입술을 짓이겼다.
어째서 마왕이 이런 꼴이 되어서는 이토록 애원하고 있는가. 원래라면 개처럼 헐떡이며 내 자지를 탐해야 맞지 않나?
태생부터가 더럽고 천박한 종족이니 분명 그래야 할 터인데 어째서, 이런.
"용사님."
"...엘리."
제 옷자락을 잡아 끄는 손길에 문득 정신이 들었다.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온 성녀에 머릿속을 좀먹어가던 잡념들이 싸그리 날아갔다.
방금 전까지 봤던 건 환상이었다는 것처럼 순수해진 눈매가 용사의 정신을 현실로 불러왔다.
확실히, 머리가 뜨거워져서 헛것을 봤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성녀가, 엘리가 그런 음탕한 말을 내뱉을 리가 없었으니까.
멍청히 성녀를 바라보던 용사가 거칠게 숨을 토해내는 마왕에게 시선을 던졌다.
'떨고 있잖아.'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마왕의 몰골에 용사는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잘게 떨리는 몸.
세상 바깥으로 제 존재감을 드러낸 젖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가녀린 팔과, 끈적한 정액으로 뒤덮힌 흑색의 머리카락.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면 마치 악마의 소행처럼 보이는 붉은 손자국이 가녀린 목덜미에 덕지덕지 묻어, 그곳에서부터 더 내려가면 새하얗고 매끈했던 복부가 만신창이가 된 채로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대체 누가 한 짓이냐, 라고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 모든 건 용사, 자기 자신이 한 일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