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3 - 해피 엔딩(13)
이상한 꿈을 꾼 것 같았다.
분명 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용사가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나를 개처럼 따먹는 꿈을.
몽롱하게 녹아내린 머리를 꾹 부여잡고는 길게 숨을 토해내자, 희미하게 새겨진 기억이 머릿속을 쿵쿵 울려댔다.
'...씨발, 설마.'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느껴지는 하반신에서의 고통.
그리고 무거운 복부까지.
분명 어제 온갖 짓을 해가며 빼냈던 정액이 그 이상의 양이 되어서 자궁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것이 뜻하는 건 단 하나였다.
용사가, 그 쓰레기 같은 새끼가 자고 있는 나를 범했다.
침대보에 눌어붙은 정액 자국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개처럼 따먹어 놓고는 그 새를 못참고 또 따먹었다고?
"...비참하군."
깨어있든, 깨어있지 않든 용사의 좆집이 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것이 그냥 한 줄기의 악몽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울적해진 기분에 반사적으로 마른 웃음이 터져나왔다.
기껏 깨끗한 옷을 찾아 입었는데 또 더러워졌네.
간신히 하반신을 가리고 있던 천조각을 슬며시 들어올리자, 뻐끔거리며 정액을 토해내고 있는 음문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너무도 비참해서 그냥 죽어버리고 싶을 정도야."
뱃속을 가득 채우는 좆물의 무게감 그 이상으로 기분이 무거워졌다.
복부를 꾹 당기는 듯한 기묘한 감각과 함께 느껴지는 허리의 통증.
제 몸뚱아리가 점점 망가지고 있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이 정도로 범해지면서까지 제대로 깨어나지 못했다는게 한심했다.
'아니, 확실히 깨기는 했었는데...'
하지만 기억 속의 나는 분명 깨어났었다.
아무리 강간의 피로로 인해 기절하듯 잠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제 질내를 후벼파는 거대한 음경을 무시하고 계속 잘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뿌옇게 안개가 피어오른 머릿속을 헤집어, 어젯밤의 기억을 천천히 떠올린다.
그러니까,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자궁을 통해 전신으로 퍼지는 쾌락을 이겨내지 못하고 눈을 뜬 순간 보았던 용사의 얼굴.
달빛에 비친, 그 괴물 같은 면상.
"욱, 읍..."
그리고 그 밑에서, 그 괴물의 좆에 꿰뚫린 채로 헐떡이던 나.
마치 망치로 정수리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미친 거야? 남자의 좆에 박혀서는 창녀처럼 헐떡였다고?
내가? 내가? 내가?!
남자일 적 느꼈던 오르가즘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쾌감이었다.
그래, 지금까지도 남아서 온몸을 돌아다니고 있는 짜릿한 전류의 정체가 바로 그것이겠지.
기억해내는 것 조차 두려워서 이 몸뚱이마저 묻어놓으려던 기억이었건만, 왜 기억해 내려고 해서는...
"우웨에에에에엑..."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게워낼 기세로 구역질을 하자, 짙은 녹색의 토사물들이 바닥을 향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씨발, 씨발, 씨발!!!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역겨운 기억과, 그 기억을 떠올리는 순간 기분 좋다는 듯 경련하는 거지 같은 몸뚱이까지.
확실히, 남자였던 존재가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경험이었다.
아니, 남자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자근자근 짓밟는 무자비한 폭행이었다.
"...마왕?"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연신 이어진 구역질에 더 이상 토해낼 것이 없어 내뱉어진 위액이 입가에 질척거렸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에 괜히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죽인 만큼 낳아라.
앞으로 낳아야 할 아이의 수, 약 100만 명.
생각 없이 휘갈긴 듯한 짧은 문장 속에 숨겨진 절망이, 순식간에 내 정신을 뒤덮었다.
"대체 왜 울고 계세ㅡ"
"...알고 있지 않았느냐."
"..."
"어젯밤에, 다 보고 있지 않았느냐..."
뇌를 범하는 듯한 쾌락에 정신을 잃기 전 마주쳤던 푸른색의 눈동자.
음심 가득한 눈동자 속에 비친 제 얼굴이 지금에서야 또렷하게 기억났다.
잔뜩 가버려서는 녹아내린 표정을 하고 있었더랬다.
분명 게임 속의 마왕의 얼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이라고 생각해버린, 그 순간.
이것이 그저 창작물이나 꿈 같은게 아닌 현실이라는 사실 하나가 내 마음을 거칠게 난도질 했다.
"왜, 말리지 않았느냐... 왜, 대체 왜..."
"..."
시야가 뿌옇게 물들고,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에서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린다.
뜨거운 슬픔을 담은 투명한 실선이 내 얼굴을 타고 저 너머로 추락했다.
암컷의 쾌락을 이 몸뚱아리가 알아버린 이상, 더 이상은 빈말로도 용사와의 섹스가 기분 나쁘다고 말할 수 없겠지.
댐에 뚫린 자그마한 구멍은 마침내 거대한 둑을 볼품 없이 망가뜨렸다.
울고, 울고, 또 운다.
잔득 당황한 듯한 성녀의 앞에서, 나는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싫다, 싫어... 죽는 것도, 아픈 것도, 아이를 낳는 것도, 용사에게 범해지는 것도, 범해지면서 쾌락을 느끼는 것까지 전부, 싫단 말이다..."
"..."
펑펑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내고, 또 닦아내도 한 번 쏟아지기 시작한 설움은 결코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저 게임을 했을 뿐이야.
그게 그렇게 잘못 된거라고? 이딴 짓을 당할 정도로?
그러면, 씨발. 다른 녀석들은?!
"왜, 왜 내가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느냔 말이야..."
"마왕..."
한참을 울고 있자니 성녀가 나지막이 나를 불러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리니 보이는 건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
설마 그 성녀가 나에게 저런 얼굴을 보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반사적으로 울음이 멈췄다.
"히끅, 힉..."
"자, 이제 괜찮아요. 제가 잘못했으니까, 네?"
"..히끅."
딸꾹질을 시작하는 내 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손길에 다시 고개를 떨궜다.
면간을 당한 뒤에 돌아오는게 겨우 위로의 말 한 마디라니.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며 크게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몸도 마음도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기에 별로 의욕이 나지 않았다.
"설마 마왕이 울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눈물을 그치고 한참 뒤.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보이기 부끄러워 고개를 돌리고 있자니, 성녀가 우후후 웃으며 말해왔다.
마왕이 울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나 뭐라나.
확실히 능욕 엔딩 전의 마왕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묘사되고는 했었다.
다른 이들에게 눈물을 보이는 일 따위는 절대 없다고 말할 정도로 강인한 정신.
이 몸뚱아리로 인해 여러 보정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로 감정이 격해졌다는 건, 그만큼 서러웠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다던지.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평생 동안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 없는 내가 대체 왜..."
"음, 그거라면 제가 알 것 같은데요?"
이리저리 엉켜있는 머리카락을 풀어내며 중얼거리자 은근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들었다.
알고 있다니, 뭘? 내가 이렇게 울고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만약 내가 울고 있는 이유를 알고 있다면 저딴 식으로 태평하게 반응하는 일 따위는 없어야만 했다.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면 이 정도로 밉상이지는 않았겠지.
"말해봐라."
"그러니까 말이죠..."
하지만 궁금한 건 궁금한 것이었다.
만약 시덥지 않은 소리를 한다면 잔뜩 비웃어주기로 결심하면서, 성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답지 않게 조심스러울 정도로 말을 고르는 것이 꽤 거슬리기는 했지만, 방금 전의 우울함에 비해서는 괜찮은 기분이었다.
아니, 괜찮은 기분일 뻔 했었다.
"아무래도, 임신하신 것 같은데요?"
"...뭐?"
"아니, 그렇잖아요. 평생 동안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은 분이 갑자기 울면서 감정이 격해진다는게."
성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내 정신을 새하얗게 물들기에 충분했다.
뭐? 뭐라고? 내가 뭘 해?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복부에 가져다대니, 어젯밤과는 또 다른 무게감이 내 몸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니, 아니야... 내 뱃속에 있는게 진짜 아기일 리가 없잖아...'
분명 용사가 잔뜩 싸낸 정액의 무게일 터였다.
비운 것보다 더 싸질러 냈으니 처음보다 더 무겁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것이겠지.
하지만 마음 저 깊숙한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은 상대의 말이 맞다며 맞장구를 치고 있었다.
너 임신했어. 용사의 아이를 뱄다고. 남자인 주제에, 자궁 안에 애새끼를 가졌다고!
"그럴, 그럴 리가 없잖, 느냐..."
"그러면, 한 번 확인해 보실래요?"
벌벌 떨며 부정을 내뱉자, 성녀가 제 품에서 자그마한 종잇조각을 꺼내들었다.
그것이 무엇인가 싶어 멍청히 바라보고 있자니 그녀가 설명하기를.
"이건, 저희 교단에서 사용하는 임신 확인용 용지랍니다. 여신님의 축복이 깃들어 있어서 절대 틀리지 않는다구요?"
"...어떻게 쓰는 거지?"
"그 용지에 본인의 체액을 바르면 된답니다."
아니, 그보다 대체 그딴 걸 왜 들고 다니는 건데 이 미친년아.
성녀의 손에 들린 종잇조각을 마구 노려보다가, 반쯤 빼앗듯이 내 손으로 가져왔다.
그래, 절대 틀리지 않으니 내가 임신하지 않았다는 것도 제대로 나타내주겠지.
한 줄이면 임신하지 않은 것이고, 두 줄이면 임신한 것이라고 설명해오는 성녀에 내 보지 안에서 흘러나온 끈적한 즙을 용지 위에 꾹꾹 펴발랐다.
"그거, 피 한 방울로도 확인 가능한데요."
"뭣..."
아니, 그런 건 미리 말하라ㅡ
"앗, 두 줄이네요! 임신 축하드려요!"
"뭐엇..."
이런,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