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7 - 엄마가 되어버린.(4)
드워프 녀석의 말투에 화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상황이 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걱정 반, 기대 반의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이 변태 성녀만이 내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라니.
"...서, 성녀."
"쉬이, 진정하세요. 엄마가 무서워하면 아기도 같이 무서워 한답니다."
"엄마라니 대체 누가ㅡ 으윽...?!"
쿵, 하고 울리는 충격에 몸이 우뚝 멈춰섰다.
분명 처음 겪는 감각임에도 불구하고, 이 몸뚱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지 반사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뱃속의 내장들이 꾸물거리며 움직이는 듯한 감각.
자궁 안에 고이 모셔져 있던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움직임이었다.
'내가, 아기를 낳는다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아기를 낳게 하는 것도 아니고, 아기를 낳아? 내가?
이불보를 꾹 부여잡고는 고개를 돌리자 고통이라는 이름의 거친 칼날이 내 복부를 푹 찍어눌렀다.
"아아아아악?!?!!!"
"조금만 참아요, 조금만! 배에 힘 주시고! 절대 힘 풀면 안 돼요!"
성녀의 손을 꾹 붙잡고는 마구 비명을 내지른다.
하반신을 도려내는 것 같은 거친 통증이 꼬리뼈를 타고 흐르다가 그대로 내장을 뒤흔들었다.
이거, 이러다가 죽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강렬한 감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그러니까, 그, 어떻게 되가고 있는 거야?
헐떡이며 무어라무어라 중얼거렸지만, 그것이 말이 되어 나오는 일은 없었다.
"머리가 보여요! 조금만 더!"
"아, 흐아아아아..."
하반신에 뭉쳐있던 무언가가 펑, 터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그대로 전신이 싸늘하게 식어버린다.
다리, 엉덩이 할 것 없이 마음껏 물들이는 축축함 덕분에 저 너머로 날아갈 뻔한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편해지고 싶어. 더 이상 아프기 싫어. 이 정도면 충분히 노력했잖아?
여자도 아닌데, 내가 이렇게까지 노력을 해야 할 필요가ㅡ
"정신 차리세요!!"
"..."
성녀의 호통에 다시 한 번 복부에 힘을 주었다.
붙잡기 위한 힘이 아닌 밀어내기 위한 힘.
끊어질 듯이 아슬아슬한 숨을 가늘고 길게 내쉬니 아기가 질을 타고 내려오는 감각이 선명하게 전해져 왔다.
내가 아기 낳는 과정을 이렇게나 생생하게 겪게 될 줄은 몰랐는데.
...정말 어이가 없어서.
"으앙, 으앙, 으아아아아앙!!!"
"...축하드려요. 그리고, 고생하셨어요."
아기가 내 뱃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온 건 온몸에 식은땀을 덕지덕지 발라, 볼품없이 탈진할 때 즈음이었다.
무언가 뱃속이 가벼워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 무섭게 곧바로 잠들 뻔 했지만, 귓가에 울리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원래라면 애들 우는 소리 따위 절대 질색했었는데, 지금만큼은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대체 뭐야, 이게.
"귀여운 공주이에요."
"...한 번만, 안아보게 해다오."
"한 번이 아니라 아기가 다 클 때까지는 계속 안고 다니셔야 할 텐데요?"
성녀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내 품에 아기를 안겨주었다.
처음에는 우렁찬 울음을 내지르던 아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훌쩍이는 정도로 칭얼거리더니, 내 품에 안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 같이 잠잠해졌다.
이러니까 진짜 이 애의 엄마가 된 것 같잖아.
"귀엽다."
"아기들은 다 귀엽죠~"
"...그리고, 쭈글쭈글해."
갓 태어난 아기는 거짓말을 조금 보탰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예쁜 모양새는 아니었다.
양수 범벅이 되어 축축하고, 눈은 떴는지 안 떴는지 모르겠고, 피부는 엉망징창으로 쭈글쭈글해서는ㅡ
"못생겼어."
"..."
ㅡ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슬며시 검지 손가락을 가져다대자 입을 우물거리며 쪽쪽 빠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귀에 걸릴 정도로 치솟은 입꼬리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둥글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바보가 된 기분이야. 그것도 엄청난 바보가.
조금 전까지의 고통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마음을 가득 채우는 행복감에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감히 나 따위가 낳은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마왕..."
아기의 배꼽 부분에 길게 이어진 탯줄이 나와의 연결을 의미하는 것 같아 괜스레 기분이 푹신푹신해졌다.
나쁘지 않아.
반사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품에 안긴 아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저 고통을 이겨냈다는 것에서 나오는 뿌듯함인지 아니면 정말로 모성애를 깨우친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다지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기억하고 있다."
퉁명스럽게 말하는 드워프를 향해 싸늘하게 답한다.
아기를 보고도 약속 어쩌구를 운운하다니,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드워프였다.
마족이면 죽인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데?
아기를 낳기 전 했던 말을 되새기며 속으로 욕짓거리를 내뱉는다.
병신 새끼. 어떻게 아기의 목숨을 걸고 그런 쓰레기 같은 약속을 할 수가 있어?!
하지만 이미 내뱉어진 말은 주워담을 수 없는 법이었다.
"..."
"일단 마족은 아니네요"
마족이었다면 머리 부분에 그 특유의 뿔이 나있었을 텐데, 딱히 뿔 같은게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은 안심인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자마자 드워프 자식의 눈매가 날카로워졌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쪼잔한 자식, 꼴 좋다.
그렇게나 펄펄 뛰더니 닭 쫒던 개의 신세가 되어서는 가만히 아기를 바라보고 있는게 꽤나 우스웠다.
"그런데, 정말 용사와의 아기가 맞나?"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한참을 침묵하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해대니 절로 얼굴이 굳었다.
용사와의 아기가 맞냐고? 나를 따먹은 새끼가 그 새끼 밖에 없는데 당연히 그 녀석과의 아기겠지!
그 혐오스러운 종자에게서 이런 귀여운 아기가 태어날 수가 있나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엄마 쪽의 유전자를 많이 물려받은 것 같다며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아기 앞에서 쓸데 없은 소리 할거면 꺼져.
그런 의미를 담아 몸을 돌리니, 귓가에 하나의 선고기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그 아기, 인간도 마족도 아니지 않나."
"...뭐?"
인간과 마족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가 인간도, 마족도 아니라면 대체 무어란 말인가.
뭐, 내가 외계 괴물이라도 낳은 건가? 이런 귀여운 외계 괴물을?
그런 의미를 담아 드워프 녀석을 바라보니, 그는 무언가 고민하는 듯 싶으면서도 천천히 입을 열어왔다.
"드워프다."
"...무슨."
"평범한 인간의 아기보다 몸집이 작은데다, 이 정도로 진한 흙과 철 내음을 풍기는 건 드워프의 아기 밖에 없지."
생각 그 이상으로 벗어나는 대답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
무슨 미친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어떻게 드워프를 낳는데, 응?
품 안에 고이 잠들어 있는 아기가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지금이라도 농담이라고 말해준다면 괜찮을 텐데, 이 빌어먹을 드워프 새끼는 제 망언을 무를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나, 나를 범한 건 용사 밖에 없다..."
호랑이와 사자가 교미를 했는데 뜬금 없이 닭이 태어난거나 마찬가지인 이야기였다.
믿을 수 없어. 그래, 저딴 허무맹랑한 소리를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지.
하지만 그 순간 눈에 띈, 희미하게 자라있는 아기의 머리카락에 나는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아기의 머리카락은 이 몸뚱아리가 가진 흑색도, 용사가 가진 금색도 아닌 깨끗한 흙과 같은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도, 저 드워프 새끼와 같은 색의 갈색을.
"...마왕?"
"..."
"자, 잠시만요! 마왕! 잠시, 만?!"
쿵, 하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설마, 저 녀석에게 범해졌었다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내 몸을 붙잡는 성녀의 손길에도 연신 벽에 머리통을 갖다박자, 잠들어 있던 아기가 태어날 때와 같이 큼직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앙, 으아아아아앙!!!"
"아기가 울잖아요! 어서 달래야ㅡ"
"내버려, 둬라."
아기의 울음소리에 잔뜩 당황한 성녀가 황급히 외쳤지만, 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호들갑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잠시라도 '저게' 사랑스웠다고 생각한 내가 혐오스러워.
행복은 무슨, 만족은 개뿔, 엄마가 되기는 지랄!
이어지는 충격에 시야가 붉게 물들었지만, 내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냥, 죽어버리고 싶어...'
능욕당한 끝에 이성 없는 육인형이 되어버린 마왕 엔딩을 떠올리며, 자살을 꿈꾼다.
용사에게 범해지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몰려있었는데.
억지로 생겨난 아기를 어떻게든 태어나게 하겠다며 이런 꼴까지 되어버렸는데.
어째서.
"아니에요!"
"..."
"고르돌 씨는 절대 아니라구요!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구요!"
성녀의 외침에 눈길을 돌렸다.
무언가 심기가 불편한 듯한 드워프ㅡ 고르돌이 내 품 안의 아기에게서 시선을 향한 채 천천히 손을 뻗어내고 있었다.
'아, 아기를 지켜야...'
내가 왜?
머릿속에 든 의무감에 하나의 의문이 새겨지자, 아기를 지키려던 몸뚱이가 상대의 손길에 허무할 정도로 쉽게 뚫려버렸다.
그대로 내 팔을 스치듯 지나가 작은 몸체를 쥔 투박한 손이 아기를 제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으아아아아앙!!!! 으응, 으앙, 으흥, 응..."
"..."
그렇게 고르돌의 품에 안긴 아기는 방금 전까지 울었던게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순식간에 잠잠해졌다.
...차라리 계속 울고 있었다면 이 정도로 마음이 심란하지는 않았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