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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1화 (21/342)

Chapter 21 - 엄마가 되어버린.(8)

품에 아기를 껴안고 있는 마왕의 모습은, 그녀가 마왕이 아니라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였다.

가련하고, 아름다운 여인.

침대 끝에 바짝 붙어서는 연신 아기의 정수리를 쓰다듬는 손길은 마치 가장 소중한 보물을 대하는 것과 같았다.

용사가 폭주해 마왕을 범한 그 날.

도움을 청하기 위해 고르돌을 찾아가, 마침내 방으로 돌아온 성녀가 본 건 마왕에게 숨을 불어넣고 있는 용사의 모습이었다.

사랑이나 그런 애뜻한 감정이 아닌, 그저 철저하게 죽은 자를 되살리기 위한 행위.

그럼에도 그 속에서 약간의 간절함을 느꼈다면 어떨까.

"괜찮으세요?"

"...으응, 나는 괜찮다."

의기소침하다고 할지, 아니면 잔뜩 겁을 먹었다고 할지.

제 목소리에 몸을 움츠린 마왕이 안타깝게만 보였다.

세상을 멸망시키려 한 존재가 이런 꼴이 되었다니, 과연 어느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옷에 걸친 성의부터 해서 품에 안긴 아기까지, 머리에 솟아오른 자그마한 뿔만 아니었다면 그녀를 보고 마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요소는 존재하지 않았을 터였다.

"출산하신지 얼마 안 됐으니 조금 더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그냥 잠이 오지 않을 뿐이야. 그냥, 그래. 그런 거다."

걱정을 담아 말해도, 마왕은 완고했다.

용사로 인해 복하사를 당할 뻔 한, 아니 복하사를 당했던 그 날 이후로부터 그녀는 잠을 자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죽음 직전에 느꼈던 두려움이 꿈으로 나타나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밤에 찾아올지도 모를 용사?

창백한 얼굴에 새겨진 음울한 황금색의 눈동자와, 그 밑을 진하게 칠한 다크 서클이 그녀를 한층 더 피폐해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그치만, 주무셔야 해요. 엄마가 건강해야 아기도 같이 건강해지죠, 네?"

"괜찮, 괜찮다. 정말로 잠이 오지 않을 뿐이니까..."

칭얼거리기 시작하는 아기에 제 젖을 꺼내 물려주는 모습이 꽤 익숙해 보였다.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도 처음보다 훨씬 커진 아기는 뱃속에 있을 때와 별 다를 바 없는 속도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마왕과 용사 사이에서 태어난 드워프 아기.

그 사실이 신경 쓰였는지 고르돌이 계속해서 얼굴을 비추었지만, 그는 마왕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아기의 상태만 확인하고 서둘러 돌아가고는 했다.

"그리고, 뭐라도 드셔야죠. 저희랑 만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아무것도 안 드셨잖아요."

아무리 마족이라도, 마왕이라도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였다.

먹지 않으면 약해지고, 병이 들며, 결국에는 죽는다.

마왕성은 명색이 마왕성답게 먹을 것들이 많았기에 식사 걱정을 하지 않았지만, 마왕 같은 경우에는 제 의지로 식사를 하지 않고 있었다.

점점 희미해져가는 생존 의지 속에서 치솟는 충동이 그녀의 마음을 좀먹어가고 있는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다.

"죽고 싶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

"그러니까 뭐라도 좀 드세요, 마왕."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로 죽고 싶다.

모순된 감정이 겨우겨우 그녀의 목숨줄을 붙잡고 있었지만, 그 끝이 어떻게 될지는 직접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녀는 어째서 이렇게까지 망가졌을까.

아무리 마왕이라고 해서,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할 필요가 있을까?

차라리 깔끔하게 죽였다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도 되었을 터였다.

하물며 그 날 저녁, 용사에게 범해져 숨이 끊어진 날 끝을 봤다면 찝찝하긴 하더라도 그런대로 끝낼 수 있었겠지.

하지만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용사가 마왕을 살려냈다는 괴상한 결과를 마지막으로 그 가느다란 삶이 주욱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는 아기도 죽어요."

"...윽."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이런 방법 밖에 없었다.

아기의 목숨을 핑계로 마왕을 살려놓으려는 악질적인 행위였지만, 엘리는 그녀가 죽지 않기를 바랬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어머니는 행복해야 한다.

언젠가 보았던 글귀가 엘리의 머릿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다.

"음, 아직까지 아무 것도 입에 대지 않는 건가?"

"고르돌 씨."

"그러다가는 진짜 죽는다. 스프라도 끓여왔으니 먹어라."

문을 열고 들어오는 드워프의 모습에 반색한다.

좋은 지원군의 등장이네요.

처음에는 마왕과을 향한 증오를 숨기지 않았던 그였지만, 요 이틀간 생각을 정리했는지 처음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상태였다.

제 딸아이를 닮은 드워프 아기.

그 드워프 아기를 낳은 마왕.

분명 죽여 없애도 모자랄 정도의 원수였지만, 가장 소중한 존재와 똑 닮은 존재를 낳아주었다는 것에 차마 모질게 대할 수는 없었을 터였다.

"...왜."

"..."

"왜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거지? 너희들에게 있어서 나는 그저 사악한 마왕일 뿐일 텐데... 나는, 너희들의 원수일 터인데."

음울한 시선이 고르돌이 들고 있는 그릇의 모서리를 훑어내렸다.

처음에는 그토록 죽이려고 했던 주제에, 이제는 또 친절하게 구는 까닭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싶었다.

설득을 포기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우울감이 엘리와 고르돌을 덮쳤다.

이제 어떻게 되던 상관 없다는 반응이었다.

"모른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그래도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일단 이걸 먹어야 네 녀석이 산다는 거다."

"...살아서, 의미가 있나?"

그런 말을 하면서도 아기를 향한 시선이 떨어지지 않는게 그들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아기가 없다면 마왕은 죽는다. 설령 그것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아직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아기가 마왕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일단 살아라. 살게 된다면, 언젠가 의미를 찾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

"아기는 내가 안고 있을 테니, 걱정 말고 먹기나 해라"

반쯤 빼앗듯이 아기를 데려오는 고르돌에 마왕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방긋방긋 웃기 시작하는 아기의 모습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산모를 위한 재료들이 잔뜩 들어간 묽은 스프.

숟가락과 함께 그것들을 쥐고 있던 엘리가 뚫어져라 시선을 보내오는 마왕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꼬르륵ㅡ

"푸흐, 귀엽네요."

아니, 그냥 웃음을 감출 수 없었다.

***

갈 곳 없는 분노는 어디로 향하는가.

언젠가 보았던 광경을 떠올리며 용사, 아서가 숨을 내뱉었다.

마족들에게 장난감처럼 다뤄지다가 처참하게 죽은 여인의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

아기를 살려달라며 빌던 그 애처로운 모습 뒤에 행해진 건 자비 없는 윤간 뿐이었다.

구멍이란 구멍에 좆이 박혀서는 새하얀 백탁액의 범벅이 되어 죽어버린 모습이란...

'역시 너희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생명체들이야.'

마족들의 모가지를 전부 잘라내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더랬다.

생기가 빠져나간 눈동자를 감겨주고, 마족들의 정액으로 인해 끈적끈적해진 여인을 품에 안아올린 용사가 코 끝에서 느껴지는 진한 탄내에 이를 악물었다.

마족들에게 존재하는 건 오로지 피와 살육, 그리고 능욕 뿐.

벌써 몇이나 되는 마을이 당하고, 몇이나 되는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분명 제 손으로 살려낸 숫자보다 땅에 묻어준 숫자가 더욱 많을 터였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다들.'

약속을 했었더랬다.

불타오르는 마을 속 공동묘지에 모두를 묻고는 계속해서 약속을 했었더랬다.

이곳에서 희생된 이들을 절대로 잊지 않겠습니다. 마왕은 제가 쓰러뜨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조금만 쉬고 계셔주세요.

총 서른여섯 개의 마을과 열 두 개의 도시, 세 개의 나라에서 행해진 맹세.

모두를 되살려내고야 말겠다는, 그런 숭고한 맹세였다.

'...죽, 고 싶지 않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아기라면, 흐, 얼마든지 낳을 테니. 죽이지 말아, 다오...'

'내 뱃속을, 더 이상 휘젓지 마ㅡ'

마지막에 보았던 마왕의 모습을 떠올린다.

절망이 가득 서린 표정과 함께 아기를 품에 꼭 안고 있던 그 모습.

그리고 그런 마왕을 범하던 자신까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마족을 혐오해 마족을 죽여오던 자신이, 그들과 똑같은 짓거리를 했다니.

"제길..."

세 그루 째의 나무가 우지끈거리며 무너져 내린다.

생기를 잃은 황금색 눈동자가 계속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죽였어, 네가 죽였어, 네가 죽였어.

네가 그토록 혐오하던 마족 놈들의 방식과 똑같이, 마왕을 강간해서 죽여버렸다고!

"으아아아아아!!!"

빌어먹을 년, 씨발 년!

차라리 끝까지 사악했더라면.

아기를 품에 안고는 그토록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이지 않았었더라면.

그랬다면.

그랬다면 이 정도로 자괴감이 들지도 않았을 텐데.

마왕 따위에게 동정심을 품지도 않았을 텐데!

"아기는 얼마든지 낳을 테니 죽이지만 말아달라고?"

하, 웃기지도 않는 소리.

지금껏 여러 마족들을 만나왔지만, 싸우다 죽을 지언정 목숨을 구걸하는 부류는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마왕, 그녀 하나를 제외하고는.

싸우지도 않고, 싸우고 싶어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죽고 싶지도 않아하는 마족을 과연 마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그러고 보면, 아픈 것도 싫다고 했었지.

마왕이라는 이름이 전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그녀는 겁이 많은 존재였다.

"...하."

그리고, 그렇게 깨달은 사실 하나가 증오와 분노로 가득 찬 용사의 마음에 작은 균열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연민이라는 이름의, 기묘한 균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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