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2 - 엄마가 되어버린.(9)
그릇을 가득 채운 스프가 모습을 감추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깔끔하게 사라져, 깨끗한 흰색을 보이고 있는 밑바닥에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 그만큼 배고팠다는거 아니겠어?!
푸스스 웃어보이는 성녀에 부끄러움이 확확 치솟았다.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나아지기는 무슨, 나빠진 적도 없었다."
자존심을 세우며 퉁명스럽게 말해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배가 고파서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 거였던 걸까.
계속해서 위액을 토해냈던 목구멍이 음식을 삼킬 때마다 쓰라렸지만, 아무래도 이 몸뚱아리는 고통을 느끼기 싫은 것 보다는 굶주림을 해결하고픈 욕구가 더 컸던 모양이었다.
"자, 어디 한 번 봐요. 어떻게 됐나 한 번 봐드릴 테니까."
"...저 녀석이 있지 않느냐."
은근슬쩍 내 하복부로 뻗어져 오는 손길에 고개를 돌리며 드워프 녀석을 바라본다.
제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며 시선으로 꿀을 뚝뚝 흘리고 있는 꼴이 상당히 아니꼬왔다.
내 배에서 태어난 내 아기인데, 왜 저 녀석이 계속 안고 있는 거야? 밥도 다 먹었으니까 다시 돌려줘!
그런 의미를 담아 마구 노려봤지만, 내 품에 아기가 안기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일단은 몸 상태를 확인하는게 우선이에요. 겸사겸사 잠도 좀 자고."
"싫다. 그리고, 몸 상태를 확인하는 것 정도는 아기를 안고 있어도 가능하지 않은가?"
쏘아뱉듯이 말해도 바뀌는 건 없었다.
몸이 약해져서인지 아니면 애초부터 그랬는지 몰라도, 억지로 눕혀대는 성녀의 손길에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무, 뭔 놈의 성녀가 이렇게 힘이 세?!
순식간에 배게 위에 머리를 뉘여지자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성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르돌 씨, 잠시 좀 나가 있어 주실 수 있나요?"
"그래, 그렇게 하지."
"아니, 잠ㅡ 흐얏?!"
붙잡으려고 했지만, 옆구리를 찔러오는 손길에 화들짝 놀라버린다.
가, 갑자기 찌르지 마! 안 그래도 아파 죽겠는데...
앉아있던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인내심이 필요했는데, 성녀가 이리저리 쿡쿡 찔러내니 하나하나가 뼈에 사무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용사 그 새끼, 꼭 뒤져라. 진심으로.
"...엄청난 꼴이군."
하반신을 덮고 있던 천조각을 드러내자, 시퍼렇고 새빨갛고 시꺼멓게 물든 복부가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엄청나게 아파야 정상일 텐데, 신경 세포가 전부 죽어버려서인지 딱히 고통이 느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엄청나게 그로테스크 하네.'
실핏줄이 터져 붉게 물든 자국을 만지작거리니 울룩불룩 올라온 자국들이 손가락 끝에 꾹꾹 눌려왔다.
대체 어떻게 섹스를 해야 이딴 꼴이 될 수 있는지 이제는 두려운 것을 넘어서 경이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성검으로 죽였다는게 설마 그 성검이 아니었던 건가...
일리 있는 생각에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하복부를 쓸어내렸다.
"......이 정도면, 자궁이 망가졌을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다가, 성녀가 내뱉는 말에 우뚝 굳어버린다.
뭐가 망가져?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상대가 내뱉은 말을 곱씹는다.
자궁. 여자가 아기를 품는 곳.
그곳이 망가졌다는 건 아기를 품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아기를 품을 수 없다는 건 죽인 만큼 낳을 수 없다는 것과 같았다.
...이제 죽을 때까지 범해지기만 하는 걸까.
질척거리며 흘러나오는 용사의 정액 사이로 작은 핏덩이들이 둥둥 떠내려오고 있는 것을 보며, 작게 숨을 삼켰다.
"뭔가, 방법이 없나?"
백만을 모두 낳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것과, 아기를 낳을 수 없어 죽을 때까지 범해지는 것의 차이는 하늘과 땅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무리 불가능하다 생각되어도 언젠가는 이뤄낼 수 있는 것과 가능성 자체가 막히는 것.
...한심하네.
스스로가 들어도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신성력을 이용해서 치료를 하면 되겠지만, 몸이 이렇게나 망가진 상태에서는 사용하기가 조금 꺼려지네요..."
"...그런가."
아무리 인간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마족은 어디까지나 마족.
좋으나 싫으나 신성력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요전번에 팔이 부러졌을 때도 신성력으로 치유 받으면서 코피를 욍창 쏟아냈었으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해요."
"말해봐라."
"여신님의 힘을 빌리면ㅡ"
"기각! 기각이다."
누구의 힘을 빌려? 여신? 그 쓰레기 자식의 힘을 빌린다고?
용사와 여신.
둘 다 떠올리기만 해도 표정이 찡그려질 정도의 쓰레기들이었지만, 그 중에서 더 역겨운 녀석을 고르라고 한다면 단언컨대 여신 쪽이 압승이었다.
용사 녀석은 그래도 불쌍한 서사가 있기라도 하지, 그 미친 년은 그냥... 후, 말을 말자.
음, 지금 생각해보면 용사가 더 쓰레기인거 같기도 하고.
"그치만, 그 방법이 아니라면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구요!"
"내 몸이 조금 더 나아진 다음 신성력으로 치유하면 되지 않느냐..."
"망가진 모양 그대로 상처가 아물어버리면, 아무리 신성력을 이용한다고 해도 원래의 모습으로 치유되지는 않아요."
신성력은 만능이 아니다.
특히 신성력을 이용한 치유는 더더욱.
그런 이야기를 해오는 성녀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한숨을 푹푹 내뱉는다.
정말 그 방법 밖에 없는 건가? 그 쓰레기 여신의 힘을 빌려야 한다고?
"...알겠다. 방법이 그것 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좋은 선택이에요. 자애와 다산의 여신이시니, 아무리 마왕이라고 하더라도 분명 도움을 주시겠죠."
당신은, 이제 한 아이의 어머니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성녀의 얼굴에는 한 조각의 굳은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나를 반드시 치료해서 아기를 낳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아니, 이거 좋은 건가?'
반드시 아기를 낳게 만들겠다니, 뭔가 어감이 이상하지 않나?
그런 생각에 떨떠름한 시선을 보내봤지만, 성녀의 표정이 바뀌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변태 같던 녀석이 갑자기 이렇게 돌변해서는 진짜 성녀처럼 구는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는데, 나를 걱정해서 진심으로 저런 표정을 짓다니.
허벅지를 끈적하고 붉게 물들이는 체액이 기분 나빠 슬쩍 다리를 움직이니 가랑이 사이가 따끔거렸다.
"그러면, 의식을 시작할게요."
"? 의식? 무슨 의식?"
"제 몸에 여신님을 깃들게 하는 의식이요."
뭐?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멍청히 눈을 끔뻑인다.
방금 전에는 여신의 힘을 빌린다고만ㅡ 아니, 빌린다는게 자기 몸에 빙의시켜서 빌린다는 뜻이었다고?
갑작스럽게 이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전개에 심장이 철렁이기 시작했다.
그 년이라면 또 내 몸을 엉망으로 만들게 분명한데!
여신이 주입한 신성력이 속에서 날뛸 때의 고통이 생생하게 떠올라, 반사적으로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 마라."
"..."
"여신이 나에게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러니까ㅡ"
그런 꼴은 안 된다. 그 쓰레기 여신을 다시 만나라니, 그딴 걸 내가 받아들일 리가 없잖아.
서둘러 팔을 뻗어 성녀의 팔을 붙잡는다.
아니, 붙잡으려고 했지만 그녀가 보내오는 묘한 시선에 몸이 우뚝 멈춰섰다.
"이미 늦어버렸는데요~"
"...윽."
"원래라면 충분히 말릴 수 있었겠지만, 제 귀여운 성녀가 얼마 전에 멋대로 기도를 끊어준 덕분에 조금 빨리 나올 수 있게 됐네요."
순식간에 뒤바뀐 분위기에 침음을 삼킨다.
능욕과 윤간의 여신.
플레이어들이 혐오를 담아 붙여준 별명을 지닌 악질 여신이 성녀의 몸을 빌어 다시 한 번 이 세계에 강림했다.
"오랜만이네요. 아니, 그렇게까지 오랜만은 아니었나? 뭐, 애도 하나 낳았으니까 대충 1년 정도 지난 셈 치죠!"
"..."
"어라, 표정이 왜 이러실까? 마치 길거리에 쏟아진 토사물을 보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네 면상이 그것보다 더 역겨워, 이 썅년아...
반사적으로 튀어나갈 뻔 한 말을 으적으적 씹어삼키며 마른침을 삼켰다.
설마 또 신성력으로 개짓거리를 하려나. 아니면 다른 이상한 짓이라도?
뒤이어 당하게 될 여러 상황들을 상상하고 있자니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는 공포심에 턱이 덜덜 떨려왔다.
성녀의 몸을 빌인 여신이 제 손을 내 하복부에 가져다 댈 때에는 아주 기절할 뻔 했다.
으, 온다. 뭔가 큰게 온ㅡ
"...아?"
"자자, 안 잡아먹으니 안심 하라구요? 이걸로 자궁은 완전 부활이니까, 용사랑 열심히 섹스해서 마구 낳아주세요!"
희미하게 남아있던 고통이 씻은 듯 사라졌다.
손가락으로 콕 찍어내자 푹 들어갔다가 매끈하게 돌아오는 것을 보니, 그 외에 흉측한 멍들도 전부 치유된 듯 싶었다.
어째서?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혼란스러움에 상대를 바라보자, 여신이 푸스스 웃으며 내 정수리에 손을 얹어왔다.
"제가 당신에게 내리는 벌은 '죽인 만큼 낳아라' 인데, 벌써부터 낳지 못하게 되면 재미가 없잖아요?"
"..."
싸늘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며든다.
그래, 이 쓰레기 여신은 원래부터 이런 녀석이었지.
순간적으로 여신의 친절에 속아 넘어갈 뻔한 스스로가 바보 같이 느껴졌다.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말해보세요."
"내가 백만 명을 전부 낳게 된다면, 정말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 주는 게 맞는 건가?"
내 질문에 여신의 입꼬리가 둥글게 휘어졌다.
설마 그런 약속 따위는 전부 거짓말이었다고 할 셈인가?
마른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바라보고 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둥근 입술에서 짧은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물론이죠."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