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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24화 (24/342)

Chapter 24 - 죄와 벌.(2)

차가운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간다.

용사, 아스테리아에게 있어서 차가움이란 언제나 죽음을 의미했다.

낮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얼마 전의 일을 회상했다.

제 배 밑에 깔려서는 차갑게 식어가던 마왕의 모습과 그때 보았던 것들을.

"...큭."

마왕이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한 채, 자신을 바라보다가 결국 심장이 멈춰버렸던 때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생기를 잃어버린 눈동자. 그리고 그 시체의 품에서 서럽게 울던 아기의 모습까지.

이래서야, 내가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 같잖아.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의 행동이 도를 넘았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마왕이었다.

도를 넘어도 한참 넘은 건 자신 뿐만 아니라 상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자네, 또 왜 그렇게 화가 난 건가?"

"고르돌 씨."

또 하나의 나무를 무너뜨린 용사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고르돌, 언제나 일행들의 가장 앞에 서서 마족들을 때려부수는 용맹한 드워프 전사.

하지만 지금의 그는 마족들의 살점으로 장식된 붉은 망치가 아닌, 자그마한 아기를 손에 들고 있었다.

아니, 들고 있다기보다는 안고 있다는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그 아기, 마왕의 아기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드워프야. 나라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네."

인간의 아기보다 더 작은 크기의 아기는 고르돌의 품이 마음에 든 듯 빙긋빙긋 웃고 있었다.

아기가 서럽게 토해내던 울음소리를 들어봤던 용사로서는 그 모습이 어색할 따름이었지만, 굳이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다.

"고르돌 씨도 제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저 한 마디 질문을 던질 뿐.

진지하게 내뱉어진 물음에 고르돌의 표정 또한 새삼 진지해졌다.

용사가 잘못했냐, 잘못하지 않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 것을 따지기에는 이미 그들은 너무 많은 상처를 입었으니, 무슨 일이 있더라도 마왕이라는 존재가 곱게 보일 일 따위는 없을 터였다.

그렇기에 그는 용사를 탓하지 않았다.

본인 또한 용서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용서하지 않을 터인데 감히 그 누구에게 왈가왈부 한단 말인가.

"아니, 나는 자네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그래. 모든 것이 끝났으니 조금 정도는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보는 편도 좋겠지."

"..."

언제나 쫒기듯 옮기던 걸음은 이미 끊겨버린지 오래였다.

마지막 목표인 마왕을 제압해, 마침내 사로잡은 것으로 이미 그들의 여정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그들은 마왕을 처단하기 위해 모인 용사 파티가 아니라, 그저 하나의 청년과 하나의 드워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기억하십니까? 저희 파티가 꾸려지고 나서 가장 처음으로 향했던 마을 말입니다."

"기억하고 말고."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저 과거를 향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고르돌의 품에 안긴 아기는 뭐가 그렇게 좋은지 연신 밝은 목소리로 칭얼거리고 있었지만, 나머지 둘의 표정은 별로 밝지 못했다.

그래,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감히 어떻게 웃을 수 있겠는가.

"마왕에게서, 그녀의 모습을 봤다면 믿으시겠습니까?"

"...흠."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미숙하던 시절 시키기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가장 평범하게 살아가던 여인이, 제 아기를 품에 안고는 가장 치욕스럽게 죽어가던 그 모습이 눈앞에서 생생히 그려졌다.

미쳤지, 미쳤어. 마왕군에 철저히 희생당한 피해자와 마왕을 겹쳐 보다니, 정신이 나가도 단단히 정신 나간게 틀림없었다.

"화가 납니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마왕에게도, 그리고 그런 짓을 해대는 저 자신에게도요."

마왕의 질내는 빈말로도 기분 나쁘다고 할 수 없었다.

가장 처음으로 삽입한 여성기라서 그럴지는 몰라도, 용사에게 있어서는 분노의 분출구임과 통시에 쾌락을 주는 무언가이기도 했다.

성적인 쾌락을 느끼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ㅡ 그리고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그 모든 것을 잊고 쾌락에 빠질 수는 없다'는 생각까지.

그렇게 여러가지 잡념과 감정들이 한데 뭉쳐 용사의 뇌를 거친 짐승으로 변모시켰고, 그것이 결국 그의 자제심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상대는 그 마왕인데, 영원히 고통받고 죽어 마땅한데 이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니..."

"..."

"...희생된 사람들을 향한 모독이지 않습니까, 이런 건."

그들이 누구에게 죽었는지 떠올려라.

고르돌 씨의 아내와 딸이 누구에게 죽었지?

엘프들의 전부인 세계수가 누구 손에 불탔느냔 말이야.

마탑의 마법사들이 목숨을 잃은 건?

그리고 제 친구와 부모님, 사랑하던 소꿉친구를 잃은 건 과연 어떤 존재들 때문이었나.

마족. 전부 마족들의 손에 희생된 것들이었다.

"지금까지 만나온 모든 마족들이 똑같았습니다."

"그랬지."

"그녀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오히려 마족들의 왕인 마왕이니 더욱 사악한 꿍꿍이를 숨기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든 표정과 행동들이 전부 거짓이었다면 어떨까.

그 모든 것들이 자신을 동정과 연민이라는 늪에 천천히 매몰시켜, 목을 조여오려는 술수일지 대체 어떻게 판단하느냔 말이다.

"모르겠군, 나는 전혀 모르겠어."

고르돌이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상당히 지쳐있어서, 더 이상 대화가 이어진다면 곧바로 침묵할 것만 같았다.

그는 그저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며, 자신만의 추억 속으로 빠져들고 싶어할 뿐이었다.

그런 고르돌의 모습을 보며 용사가 깊은 숨을 토해내고는 이내 입을 굳게 닫았다.

용사 또한 마찬가지로, 더 이상은 이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정말 여신님의 말씀대로 마왕이 단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면, 마왕군이란 건 대체 뭐였던 겁니까?"

정말이지, 다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

"내, 내 몸에 손 대지 말거라."

"에이, 같은 여자끼린데 뭐 어때요~"

덜덜 떨며 몸을 움츠리자, 성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 어깨를 스윽 훑어내였다.

흐익, 시팔 진짜 그 손 빨리 안 치워?!

몸뚱이는 여자라도 정신이 남자여서 그런지, 이런 미인이 은근한 표정으로 내 몸을 만져오니 온 몸이 아주 오싹오싹했다.

"마왕 씨, 혹시 여자 좋아해요?"

"어, 어째서 그런 걸 묻는 건가."

"아니, 뭔가 반응이 신기해서 그렇다고나 할까..."

지금 와서야 여자가 좋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남자보다는 더 나았다.

아니, 용사보다는 나았다. 그것도 100억 배는 더!

이번에는 옆구리를 스치는 손가락에 몸을 움찔거리며 벽을 향해 바짝 붙는다.

'무, 뭔가 점점 구석으로 몰고 가는 것 같은데...'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면, 성녀 또한 슬금슬금 다가온다.

마치 포식자가 먹잇감을 몰아대는 것 같은 모습에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갑자기 무슨 스위치가 들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의 성녀는 꽤나 위험해 보였다.

주로 정조적인 의미로.

...물론 이미 처녀도 따이고 애까지 낳았지만, 아무튼.

"마왕 씨도 자위에 대해서 알게 되면 인생 절반 이득 보실 걸요?"

"사, 상관 없다."

"그렇게 말하시면서도 딱히 저항하고 있지 않으시잖아요."

저항하지 않는게 아니라, 못하는 거야.

성녀의 힘에도 밀릴 만큼 약골인 몸뚱이를 가지고 대체 뭘 어떻게 저항하라는 건데?

억울한 심정에 상대를 마구 째려봤지만, 돌아오는 건 쇄골 근처를 꾹 눌러오는 야릇한 손길 뿐이었다.

"햣?! 대,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어라, 여기가 아닌가..."

내 쇄골을 만지작거리던 성녀가 내 비명소리를 듣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몸을 마구잡이로 만진다기보다는 무언가를 찾으려고 그러는 것 같은데, 뭔가 장난감처럼 다뤄지는 것 같아서 별로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만 해. 지금 그만두면 용서해줄 테니까 그만 하라고, 이 빌어먹을 년아!

"...대체 뭘 찾고 있는 건지 몰라도 이제 그만 포기ㅡ"

"혹시 여기?"

"ㅡ해이으이약♥"

...아.

아?

"무, 무슨 짓을..."

순식간에 옆구리, 정확하게 말하자면 갈비뼈 근처를 꾹 짓누르는 손길에 반사적으로 야릇한 신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뭐, 뭐야. 방금 무슨 소리였지? 누, 누가 야동에서 들릴 법한 엄청난 신음소리를 냈는데ㅡ

랄까, 내가 낸 소리잖아...

입을 꾹 틀어막고 눈을 동그랗게 뜨니, 성녀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찾았네요~?"

"무, 무얼 말이냐?"

갈비뼈 근처에서 살랑거리는 성녀의 손가락에 잔뜩 시선을 빼앗긴다.

막아야 해. 이번에는 진짜 막아야 해. 저 미친 성녀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반드시 막아야만 한다고!

요망하게 흔들리는 손가락 끝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내 갈비뼈를 향해 쏘아져 오는 그 순간에 손을 뻗어 빠른 속도로 낚아챈다.

하하 어떠냐, 성녀. 너의 그 느린 손가락으로는 내 갈비뼈를 희롱하지 못ㅡ

"히야아으이엑♥"

"마왕 씨, 사람의 손은 하나가 아니라 두 개라구요?"

"그, 그만 해읏으으으으...♥"

갈비뼈 마디 하나하나 꾹꾹 조여오는 손가락에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뭐, 뭐야 이거.'

대체 내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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