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9 - 죄와 벌.(7)
아파.
머릿속에 든 생각은 오직 그것 뿐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더라.
그 미친 마법사에게 엉망으로 두들겨 맞고는 용사에게 보지를 벌렸지.
개처럼 따먹어 달리는 의미의 말을 내뱉고는 그대로 몸을 맡겼, 었나?
'그런데, 지금 뭐 하고 있었더라?'
사방이 온통 흑색으로 칠해진 세계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여기가 어디야.
"죽어버려, 이 창녀야!"
"히익?!"
무, 뭐였지 방금...
고요하던 세계에서 갑자기 터져나온 외침에 잔뜩 쫄아 바닥에 주저앉는다.
방금 전의 커다란 외침이 거짓이었다는 듯, 세계는 다시 침묵으로 가득 차있었다.
"...설마 꿈인가?"
기이할 정도로 톡 튀어나온 배를 슬슬 문지르자 기묘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마치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복부를 뚫고 튀어나와 나를 죽여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윽, 뭐야, 진짜..."
가슴에서부터 점점 퍼져나가는 공포에 잠식되기 직전, 쿵 하고 울리는 충격이 고간부터 시작해 머리통까지 퍼져나간다.
그 둔중함에 고개를 비틀자 음문 사이에서 한 줄기 붉은색이 흘러내렸다.
어라, 피? 왜 갑자기 피가 나지? 그것도 가랑이 사이에서?
피가 날 이유가 없는데 피가 나는 건 조금 이상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씨발 년!!!"
"꺄악?!?!?!!!"
다시 한 번 들려오는 목소리.
그리고 전신으로 퍼져가는 고통까지.
처음에는 한 줄기였던 선혈이 두 줄기가 되고, 마침내 여러 다발이 되기까지는 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마치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핏덩이들과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이 새하얀 몸뚱이를 도화지 삼아 가학적인 그림을 그려내고 있었다.
"아파, 아파, 너무, 아파..."
죽어버릴 정도로 아팠다.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저 칠흑 너머를 향해 손을 뻗어봤지만, 그 손아귀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건 거친 신음과 짐승과도 같은 목소리 뿐이었다.
"그냥, 죽어! 죽어버려! 죽어버리라고 이 썅년아!!!"
"하흑..."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의 충격에 비명을 삼킨다.
어찌나 아프던지, 비명은 커녕 제대로 된 소리조차 되지 못한 희미한 음성이 허공을 향해 산산이 깨져나갔다.
'이제, 싫어.'
아픈 것도, 영문 모를 외침도, 그리고 용사 그 자식의 면상을 떠올리는 것도 전부!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꿈이여야만 했다.
이딴 몸뚱아리에 깃들어 강간을 당하고, 애를 낳고, 무자비하게 맞고, 또 강간당하는 것 따위가 현실일 리가 없었으니까.
그런 것 따위는 전부ㅡ
'꿈일 리가 없잖아요?'
"헉..."
ㅡ꿈, 이여야만, 했는데...
"아, 아아? 아?! 아아아아아악?!?!?!!!!"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
그만 빼 줘! 내가 잘못했어! 그러려고 그랬던게 아니야!
그냥 힘들어서 그랬어. 모든 걸 포기하고, 그 마법사의 말대로 아기나 낳는 육인형이 된다면 편해질까봐 그랬던 거라고!
그러니까 그만 해. 이제 그만 해. 진짜 아프단 말이야.
아프다니까? 그러니까 제발 그만!
그만, 그만, 그만ㅡ
제발엄마살려줘요저더이상은죽어버려아기가있는데이대로죽고싶지않아파죽어버려...
"빼, 빼라, 빼줘, 빼주세요, 제발..."
용사의 허리놀림에 서로의 배꼽이 맞닿을 때마다 뱃속이 삐걱거렸다.
얼마 전에 치료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계 직전까지 몰려버린 자궁이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며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각, 가윽, 가오오, 옥..."
"...씨발."
순간 시야가 희고 검게 변하자, 전신을 마구잡이로 흔들던 움직임이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춰섰다.
'사, 살았, 나? 나, 살았어? 살았, 어?'
잔뜩 망가진 모니터처럼 점멸하는 뇌를 억지로 일깨워,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인다.
고통에 저항하기 위해 용사의 몸을 긁어내렸던 손 끝에서 부러진 손톱들에서 검붉은 핏방울을 뚝뚝 흘러내렸다.
더 이상은 싫어.
마치 1톤 트럭에라도 치인 것처럼 말을 듣지 않는 팔로 엉금엉금 기어, 침대의 끝에 그대로 몸을 파묻었다.
아니, 정확히는 처박았다.
...으.
"...제가 잘못해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그러니가 제발 살려, 흑, 주세요..."
"..."
보지 깊숙히 처박혀 있던 자지가 어찌나 기다랗던지, 질내를 빠져나가는 감각이 하체 전체에 생생히 느껴질 정도였다.
용사의 좆이 빠져나가며 느껴지는 뜨거움에 보지가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아파, 아파, 아파...'
윤활이 제대로 되지 않아 피가 날 때까지 엉망으로 범해진 질은 이미 상처로 가득해 애액 대신 검붉은 선혈을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었다.
몸을 덜덜 떨며 흘끔거리며 상대를 바라봤지만, 뿌옇게 물든 풍경에 무슨 표정인지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겨우겨우라, 시야 따위는 사치에 불과할 뿐이었다.
"다, 다음부터는 꼭, 미리 준비 할 테니까아..."
"..."
"한 번만, 봐, 주세요... 흑..."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피로 물든 허벅지 위로 툭, 떨어져 내렸다.
***
고르돌은 품에 안긴 아기를 그 무엇보다 소중하게 껴안고 있었다.
잃어버린 제 딸을 닮은 드워프 아기.
분명 마왕과 용사, 마족과 인간 사이에서 났는데도 불구하고 드워프로 태어난 아기였다.
"꺄아, 꺄!"
"요 녀석, 내가 그렇게도 좋으냐?"
마왕도, 하물며 용사조차 닮지 않는 그 모습은 그의 만족감을 끌어올리기에 충분했다.
그 둘이 아닌 나를 쏟 빼닮은 아기라니, 마치 딸아이가 살아돌아온 것 같지 않은가.
불완전하게나마 잃어버린 것을 돌려받은 고르돌에게 있어, 아기 이외의 것들은 하등 상관 없는 것들일 뿐이었다.
용사든 마왕이든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네 이름을 마키나라고 짓는다면, 싫으냐?"
"꺄아! 아부, 아부우!"
손을 뻗어 자신의 수염을 쥐려는 듯한 움직임에 고르돌이 빙긋 웃어보였다.
언젠가의 제 딸과 같은 모습.
분명 이대로 수염을 내줬다가 상상 이상의 힘에 눈물을 찔끔거렸던 기억이 있었더랬다.
"으하하, 힘 하나는 장사급이로구나!"
그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제 수염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그는 눈물을 찔끔거릴 수 밖에 없었다.
제 머릿속에 남아있던 행복한 추억, 절대 되찾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 바로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먹먹함에 고르돌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구름이 잔뜩 끼어서 어두컴컴해진 하늘이 그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는 듯 싶었다.
"여보,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마왕과 용사 사이에서 태어난 드워프 아기에게 죽어버린 제 딸의 이름을 붙이다니.
아무리 짙은 향수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고 하더라도, 이런 짓을 하는 건 절대 용납 될 수 없는 행위였다.
이미 아내와 딸을 잃고, 제 남성기를 잘라낸 드워프가 다시 행복을 찾겠다고?
"지금이라도, 행복하면 안 되는 걸까."
잘 알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제 품에 안긴 아기에게 죽어버린 제 딸의 이름을 붙여주더라도 결국 진짜 제 딸이 아니라는 것 쯤은.
하지만, 그만 둘 수 없었다.
이 모든 것들이 한 조각의 미련으로 빚어진 환상이라 하더라도, 그는 그 작은 희망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다.
"고르돌."
하늘을 흘러가는 구름을 멍하니 바라보던 고르돌의 등 뒤에서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음성.
함께 전장을 헤쳐오며 무수히 들었던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리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마법사, 에밀리였다.
"...에밀리인가."
"뭐하는 짓이야?"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순간 쏘아져 나오는 뾰족함에 반사적으로 입을 악문다.
마치 악귀처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옷가지와 손아귀에 피를 잔뜩 묻힌 모습은 좋게 보아도 살인마의 그것이라고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눈치가 빠른 이들이라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무거운 분위기에 고르돌이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짓이냐니, 무얼 말이지?"
사실 반쯤 시치미를 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정도로 화가 나 자신을 찾아온다면 분명 한 가지 이유 밖에 없을 테니까.
'이 아이 만큼은 안 된다.'
마왕이 어떻게 되었든, 그에게는 크게 상관이 없었다.
고르돌에게 있어서 마왕이란 그저 제 딸아이와 닮은 아이를 낳아준 모체일 뿐이었다.
살아있다면 죽지 않도록 최소한의 신경은 써주겠지만, 아기보다 소중하지는 않았다.
"그 아기 말이야, 아기! 더러운 뱃속에서 튀어나온 가증스러운 마족 애새끼 말이야!!"
"말 조심해라, 에밀리. 이 아이는 드워프야."
더러운 뱃속에서 태어난 마족 애새끼.
제 품에 안긴 아기를 지칭하는 경멸에 고르돌의 눈가가 마치 경련히듯이 꿈틀거렸다.
그래, 알고 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이 아이가 마왕의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것은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으우으응..."
"마왕은, 어떻게 했지?"
내려앉은 공기에 아기가 금방이라도 울 듯이 웅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아기의 등을 토닥여 달랠 여유도 없이 고르돌은 아기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상대를 노려보며 질문을 내뱉었다.
"어떻게 했으면, 왜?"
생기 없는 눈동자가 그의 품 안에 담긴 아기의 모습을 가득 담아냈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아기. 제 뱃속에서 나왔다고 꽤나 소중히 여기는 것 같던데ㅡ
ㅡ죽이면, 과연 어떤 얼굴로 절망할까?"
그 싸늘한 선언을 끝으로, 고르돌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