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1 - 죄와 벌.(9)
진한 부유감이 전신을 감싼다.
누군가가 내 뒷목을 받쳐주고 있은 듯한 감각이 느껴져, 천천히 머리를 움직이니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멍하니 떠오르는 생각에 잠시 멈춰서자 얼굴 위로 툭, 하고 뜨거움이 떨어져 내렸다.
"...마왕."
"...아."
그 뜨거움이 순식간에 차가움으로 변하는 순간 눈을 뜬 내게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성녀의 얼굴이었다.
물기로 가득 젖어있는 푸른색 눈동자가 깜빡이자 내 눈가 근처로 물방울이 후드득 추락했다.
성녀가, 왜 나를 보면서 울고 있지?
처음에 든 생각은 그것이었다.
"일어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이번에는 정말 죽는 줄 알고, 흑..."
"...죽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머릿속에 뿌연 안개가 낀 것처럼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었더라?
끙끙거리며 떠올리려 했지만, 검게 물든 머릿속은 더 이상의 기억을 내주기 싫다는 것처럼 거칠게 요동칠 뿐이었다.
...뭐, 별로 중요한 일도 아니겠지.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설마, 용사 그 녀석이 내가 자고 있는 사이 또 덮치기라도 했나?"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성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이쪽이 눈치가 그리 빠르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런 건 말을 해주지 않으면 알 수가 없었다.
저 혼자 심각해져서는 연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성녀의 모습에 괜스레 나까지 심각해져야 할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으음, 잠들어 있을 때 범한 것 같지는 않은데..."
아무런 이상도 느껴지지 않는 하반신에 고개를 갸웃한다.
만약 용사 그 새끼가 나를 범했다면, 내 보지가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었다.
아니, 멀쩡하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뱃속이 텅 비어있지는 않았겠지.
얼마 전에 느꼈던 그 무게감에 표정을 찡그리며, 슬쩍 다리를 오므렸다.
"마왕,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으시는 건가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냐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무언가 수수께끼라도 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저 울적한 얼굴을 보다니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으니 답답할 따름이었다.
...원래 여자들은 다 이런가?
어쩌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같은 걸 원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니에요, 기억나지 않으신다면 그걸로 좋겠죠."
"...싱겁군."
웅얼거리듯 말하는 성녀에, 언젠가 동영상 업로드 사이트에서 봤던 여러 시츄에이션 중 하나가 떠올랐다.
'몰라! 기억 안 나면 말고!'
분명 여자친구가 이렇게 말할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이었는데ㅡ
아무래도 스치듯 본 장면이라 그런지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집중해서 볼 걸.
괜히 후회감이 무럭무럭 자라났다.
"음, 그래도 기억 나지 않을 정도로 하찮은 일이지 않았겠느냐?"
"..."
뭐야, 왜 또 대답이 없는데.
입을 꾹 다물고는 슬쩍 고개를 돌린 성녀에 한숨을 폭 내쉰다.
내뱉어진 숨결에 상대가 움찔거리는 것이 육안으로 보일 정도였지만, 딱히 그것에 대해서 지적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또 내가 자고 있는 사이에 몹쓸 짓이라도 했나?"
전적이 있으니 의심하는 건 당연했다.
자고 있을 때 남의 보지에 손가락은 넣는 건 대체 어디서 배운 걸까.
그런 생각을 담아 시선을 보내니, 성녀가 잠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왕 씨의 가슴이 너무 탐스러워 보여서 그만..."
"웃, 사, 사람이 자고 있을 때는 마음대로 만지지 말거라!"
큰 소리로 호통을 치니 아하하, 웃으며 제 볼을 긁적인다.
그래서, 아까 운 건 대체 왜 그랬던건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에 시선을 거두지 않자,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싶다가도 제 눈가를 훔치며 말을 꺼낸다.
"사실 마왕 씨의 가슴 감촉이 너무 훌륭해서ㅡ"
"드디어 미친 게냐?!"
그러면 그렇지, 이 미친 년!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여 성녀의 정수리를 내려칠까 하다가도, 잘못했다가는 역으로 덮쳐질 것 같은 위기감에 팔로 가슴을 가린다.
이미 옷으로 잔뜩 가려져 있기는 했지만, 아무튼 또 가려! 일단 가려!
"심지어 모유 맛도 훌륭ㅡ"
"그만! 그만 말하거라! 그만!"
선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발언에 열이 잔뜩 올랐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식히려고 손부채질을 해대니, 성녀가 나를 향해 애매한 미소를 쏘아내었다.
뭔데 그 웃음은.
괜히 기분이 나빠져 손을 움직여 투닥거리니, 잔뜩 엄살을 부리며 뒤로 나자빠졌다.
"...성녀."
"네, 마왕 씨. 말씀하세요."
"역시, 아픈 것 보다는 기분 좋은 쪽이 더 괜찮을까?"
한숨을 토해내듯 내뱉어진 말에 성녀의 몸이 잠시, 아주 잠시 멈추어 섰다.
...왜, 갑자기 내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니까 이상했나?
"무, 물론 용사와 교접을 하며 기분이 좋아지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니다. 그냥, 그냥..."
아픈 것 보다는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콜록! 콜록, 콜록콜록?!"
순간 목이 메이는 것 같은 감각에 마른 기침을 토해낸다.
확실히 거부감이 들 정도로 역겨운 말이기는 했다.
남자 새끼와 섹스를 하는데, 아프기는 싫으니까 기분 좋아지고 싶다고?
...우웩.
"아, 아무튼 그런 거다."
차마 말을 이어나가지 못하고 어물거리며 대충 넘긴다.
더 이상 이야기를 계속 했다가는 돌이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나저나, 아기는 어디에 있느냐?"
"아기는 고르돌 씨가 데리고 있어요."
"칫."
그 드워프, 마음대로 남의 아기를 데려가고 말이야.
바깥 공기가 쌀쌀한데, 설마 밖으로 데려가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그러다가 감기라도 들면 정말 큰일인데.
언젠가 들었던 '아기는 감에 걸리면 위험하다.' 같은 말을 떠올리며 입술을 짓이겼다.
"찾으러 가야겠다."
"아마 정원에 있을 거에요. 아기를 데리고 자주 그쪽으로 가셨으니까."
"그렇군, 그러면 정원으로 가도록 하지."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언제 올지 모를 드워프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직접 찾는 편이 낫겠지.
"...그런데, 어디로 가야 정원이 나오지? 성녀, 알고 있나?"
"..."
고갤 갸웃거리며 묻자 성녀의 표정이 묘해졌다.
...뭔가 실수라도 했ㅡ
'아, 시팔 여기 마왕성이었지.'
마왕이 마왕성의 구조도, 길도 모르는 경우가 있을 수 있나?
한 가지 커다란 깨달음을 얻음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여기서 머리가 이상한 녀석으로 오해받지 않으려면 대체 무슨 대사를 날려야 할까.
어물거리며 성녀의 시선을 피해내던 끝에 내가 내린 답은 바로 '당당해지기' 였다.
"마왕이라고 마왕성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는 건 아니다."
"..."
"그, 그런거니까 잘 알아두도록 해라."
뾰족해진 눈동자를 슬며시 피하며 빠른 걸음으로 방 밖으로 나선다.
정원이니까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겠지.
뒤따라오는 성녀를 애써 무시하며 길게 이어진 복도를 걸어나갔다.
"악취미적인 그림이네요."
"동감한다. 이 성에 살던 놈들은 분명 머리 어딘가가 심각하게 망가진 녀석들이었겠지."
랄까, 그 성에 살던 녀석이 바로 나였다.
물론 몸뚱이 뿐이었지만.
"...취소하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몸이 뻣뻣이 굳은 채로 어색하게 걸음을 옮겼다.
기괴한 그림들이 걸린 복도를 걸어가는 두 미녀라, 뭔가 언벨런스하네.
당황과 어색함을 숨기기 위해 아무런 생각으로 머릿속을 꽉꽉 채워냈다.
"마왕, 한 가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래."
"마왕군은 어땠나요?"
마왕군이 어땠냐니...
예상치 못한 질문에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대체 무슨 답변을 원하고 이런 물음을 던진건지는 모르겠지만, 가볍게 지나갈 질문이 이니라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훌륭했다, 같은 소리를 한다면 바로 모가지가 잘리려나?'
사실 그런 대답을 할 생각도 없기는 했다.
그 병신들이 훌륭하다니, 그것들보다는 차라리 게임 마스코트 역할을 하던 요정이 훨씬 훌륭할 터였다.
말도 걸어줘, 무슨 선택지를 골라도 훌륭하다며 칭찬해줘, 심지어 귀엽기까지.
나레이션이나 가이드 같은 느낌의 캐릭터였기에 스토리 상 중요힌 역할이거나 야한 컷신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인기가 있었다.
하드할 정도로 윤간 당하는 이 게임에서 유일하게 힐링을 맡고 있던 존재라고나 할까, 아무튼...
"웃긴 녀석들이었지."
"..."
"내가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질 않던 녀석들이었다."
헛웃음을 내뱉으며 성녀의 말에 답한다.
다른 의미를 하나도 담지 않은 말 그대로의 답변.
단탈리온이었나?
용사가 나타날 마을을 습격해 반으로 갈라질 운명이던 녀석을 그렇게나 말려봤지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들어 쳐먹지 않았더랬지.
가서 용사를 해치우고 오라며 힘을 줘도, 가지 말라고 말려도, 심지어 다른 마족들을 추가로 붙여서 보내도 언제나 반으로 갈라지던 녀석.
물론 그것 말고도 마왕의 복장을 터지게 만들 법한 캐릭터들은 많았지만, 가장 먼저 기억에 남는 건 바로 그 단탈리온이라는 캐릭터였다.
"특히 단탈리온이라는 녀석은, 인간 마을을 습격하지 말라고 그렇게나 말려도 결국 저 혼자 죽어버리더군."
"...그렇군요."
태연하게 내뱉어진 말에 성녀가 나를 보며 묘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또 왜 그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