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7 - 가고 싶지 않아.(5)
또 다시 여기다.
커다랗게 그려진 마왕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용사가 한숨을 토해냈다.
제 보지를 쑤시며 좆을 넣어달라고 애원하는 마왕.
하지만 그 눈동자에 서려있던 그 진한 두려움에 어떻게든 참아낼 수 있었더랬다.
"하지만 범해야 해."
마왕을 범해야만 했다.
이번에 참은 건 어디까지나 제 소꿉친구의 얼굴이 떠올라서 그랬을 뿐이었지, 다른 이유가 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니 다음에는 반드시, 범해야 했다.
"꼭, 다시 살려내고야 말겠어."
혹여 에밀리가 단탈리온의 체액을 마왕에게 먹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마왕을 범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생기를 잃은 눈으로 살려달라며 애원하던 마왕의 모습 따위는, 아리엘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큭, 젠장, 제기랄..."
곧 터질듯이 부풀어 오른 자지에 용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고통스럽다.
불알을 가득 채운 정액을 마음껏 쏟아내고 싶다.
충동이 극에 달하니 제 좆에서 강렬한 통증이 느껴질 정도였다.
"엘리?"
그러다가 문득, 복도를 지나가는 엘리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그녀를 부른다.
처음에는 그가 부른 줄도 몰랐는지 멍하니 걷던 성녀가,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제 이름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용사님."
무언가 멍해보이는 엘리에 용사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엘리, 괜찮아? 표정이 안 좋아보이는데..."
"...괜찮아요.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런 거에요."
어쩌면 단탈리온의 체액을 해독한 것이 이유일지도 몰랐다.
신성력을 사용한 뒤의 엘리는 언제나 피곤한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했었으니까.
"용사님은, 마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온 질문에 용사의 말문이 막혔다.
마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니.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라서, 오히려 당황해버렸다.
"제가 이상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본 마왕 씨는 다른 마족들과 달랐어요."
"엘리."
인정할 수 없었다.
무언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을 꺼낸 상대의 이름을 읊조리자, 엘리가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인정하지 않으시겠죠. 그래도, 그래도 말이에요."
"..."
"한 번 정도는, 마왕과 대화를 해보는 건 어떨까요?"
떠나가는 엘리의 뒷모습에, 용사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대화라.
마족과, 그것도 마왕과 대화를 하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대화로 무언가가 달라질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마족들과 피 튀기는 혈전을 벌여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대화란 상대를 속일 때 사용하는 수단이었으니, 속지 않으려면 먼저 검을 휘둘러야만 했다.
그런데, 그 마족들의 왕 만큼은 다르다고?
"빌어먹을..."
마왕의 초상화를 노려본 용사가, 그대로 주먹을 휘둘렀다.
쿵, 하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퍼지니 조금은 화가 가라앉는 것 같기도 했다.
"후우..."
결국에는 다시 원점이이었다.
몸 속에서 끓어오르는 증오와, 마왕이 보여주는 연약한 모습.
그리고 죽은 제 소꿉친구의 얼굴까지.
무엇 하나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용사는 결국 엘리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엘리가 허튼 소리를 할 리는 없으니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이미 마왕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지만, 엘리의 말 정도라면 한 번 정도는 들어볼 의향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마왕이 다른 마족들과 다르다면.
정말로 마왕이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지금까지 견뎌왔던 그 모든 고난과 역경은 대체 무엇 때문이었던 것인가.
"역시, 나는 못 믿겠어."
마왕이라는 직함을 달고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하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다른 마족들을 막아 냈어야만 했다.
그들을 막아내지 못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인간들에게 큰 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
걸음을 옮긴다.
정말로 에밀리의 말이 맞다면, 앞으로 그들 사이에는 대화가 아닌 오로지 섹스만이 존재할 터였다.
아리엘을 되살릴 수만 있다면, 용사는 그 어떠한 짓이라도 기꺼이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마왕?"
하지만, 그것도 마왕이 살아있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
싸늘하다. 그리고 뜨겁다.
손목을 타고 흐르는 검붉은 액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바닥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거울 조각이 깨진 바닥에 몸을 눕히니 뾰족한 파편들이 연약힌 피부를 뚫고 들어왔다.
"...아."
몸이 식어가는게 느껴졌다.
죽음. 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것.
마왕의 몸뚱아리가 되기 전, 원래의 세계에 있을 때도 포기했던 행위를 이토록 간단하게 해버리다니.
'더럽게도 늦게 죽는구나.'
그때도 그랬었지.
커터칼로 손목을 긋고는 멍하니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그 때, 바닥에 흩어지는 붉은색에 지레 겁을 먹었더랬다.
겁을 먹으니 정신을 차렸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이불로 손목을 꾹꾹 짓눌렀었지.
"......엄마."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해.
어렴풋이 떠오르는 부드러운 미소에 절로 눈물이 솟아났다.
바닥을 물들이는 끈적한 혈흔이 곧 있으면 찾아올 내 최후를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헉, 허억, 흐..."
심장 박동이 점점 느려지고, 몸이 차가워진다.
가빠져 오는 숨에 헉헉거리며 고개를 돌리자, 망가진 거울 거치대에 붙은 자그마한 파편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겁에 질린 표정.
황금빛 눈동자를 덜덜 떨며,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한 여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역시 죽는 건 싫어."
무서웠다.
점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도, 분명 아팠을 터인 손목에 어떠한 감각도 느껴지지 않는 것도, 전부 다.
몸을 움직여 지혈을 해보려고 했지만, 생기가 빠져나간 신체는 도통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죽어.'
점점 사라져가는 현실감에 스르르 눈이 감겼다.
"마왕?"
귓가에 들려오는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대로 죽어버렸겠지.
"...용, 사?"
잔뜩 쉰 목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렸다.
피가 꽤나 빠져나가서 그런지 시야가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용사의 얼굴 만큼은 빌어먹을 정도로 선명하게만 보였다.
"씨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
날카로운 욕설이 귓가를 파고 들었지만, 딱히 반응하지는 않았다.
아니, 반응할 수 없었다는게 더 옳은 말이겠지.
"왜 이딴 짓을 한 건데, 대체 왜?! 살고 싶다고 말했잖아, 아픈 건 싫다고 말했잖아!!"
그 눈동자에 담긴 건 분노와 배신감이었다.
마치 또 속아버린 사람처럼 떨쳐낼 수 없는 배신감에 휩싸인 용사가 구멍 난 듯 피를 쏟아내고 있는 내 손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나는 속인 적이 없는데, 왜 속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이대로 죽겠다고? 무엇 하나 설명하지도, 증명하지도, 바꿔놓지도 못했으면서?"
"..."
"용납할 리가 없잖아."
무엇을.
"흣...?!"
내 손목을 꾹꾹 누르는 압박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거울 파편으로 난도질한 손목이 지혈되는 순간, 삶에 대한 희망을 느낀 신체가 제멋대로 죽어버린 신경들을 되살려 냈다.
'아파, 아파, 아파... 아프기 싫어. 더 이상은 아프기 싫어. 죽고 싶지 않아...'
손목이 불에 타는 듯한 감각에 훌쩍이기 시작하자, 용사가 내 몸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보지에 용사의 좆이 처박히는 상상을 하자 몸이 잘게 떨려왔다.
용사가 내 몸뚱이를 침대에 내려놓을 때 즈음에는 히끅거리며 딸꾹질을 할 정도였다.
"어째서, 나를 살린 게냐. 그냥 죽게 내버려 뒀으면 좋았을 것을..."
"..."
여전히 내 손목을 움켜쥐고 있는 용사에게 묻자, 상대가 나를 내려다보며 표정을 굳혔다.
여러가지 감정이 뒤섞인 거대한 파도.
그것은 분노와 비슷했지만, 분노보다는 갈망에 더욱 더 가까운 감정이었다.
"네가 살아야 할 이유가 생겼으니까."
"...내가 살아야 할 이유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콜록, 콜록!"
바짝 말라버린 목구멍에서 형편 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싶어서 멍하니 용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상대가 제 입꼬리를 일그러뜨리며 입을 열었다.
"네가 아리엘을 낳을 때까지는 절대 죽게 두지 않을 거야."
절대로.
두 눈에서 느껴지는 질척한 감정이 내 심장을 절로 섬짓하게 만들었다.
덕분에 이제서라도 깨달았다.
용사가 나를 살린 건, 오로지 제 소꿉친구의 부활만을 위해서라는 것을.
"...역시는, 역시구나."
쓰레기 같은 새끼.
하지만, 한결 같아서 오히려 마음에 드는 역겨움이었다.
이대로라면 마음 놓고 혐오할 수 있으니, 나에게 있어서도 좋은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왜, 아주 그냥 지금부터 범하지 않고?"
"..."
가벼운 도발이었다.
지금껏 쌓여진 성욕들이 있을 테니, 저 혼자 분노해서는 나를 마구잡이로 강간할게 뻔했다.
'지금은 그냥 생각을 놓아버리고 싶으니까...'
돌아가기 위해서는 백만 명을 낳아야 하는 나와, 소꿉친구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나를 범해야 하는 용사.
...어째서 내가 자기 소꿉친구를 낳을 거라고 말하는 건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그래. 너 다워서 참 보기 좋구나, 용사."
비꼬듯이 튀어나간 말에 용사가 으드득 이를 갈았다.
너도 알잖아. 우리는 절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어.
어디까지나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을 달려나갈 뿐이지.
"..."
용사가 바지춤에서 제 거대한 양물을 꺼내는 광경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