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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39화 (39/342)

Chapter 39 - 눈먼 자들.(1)

그런 식으로 답하기는 했지만, 역시 그 망할 년이 원하는 대로 해주기는 싫었다.

천천히 나오렴, 제발 천천히 나오렴.

툭 튀어나온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리니, 뭔가 아기가 천천히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뭐야, 아직도 안 낳은 거야?"

옆에서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몸이 바짝 굳어졌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에밀리, 당장 나가세요!"

"내가 왜?"

"마왕 씨가 당신을 무서워 하잖아요! 그러다 뱃속의 아기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할거에요?!"

물론 성녀의 외침에 더 크게 놀라기는 했지만, 마법사 년과 같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방 밖으로 나가는 꼴이란.

과연 이 뱃속에 있는게 저 망할 년의 스승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부디 아니기를 빌었다.

'...제 스승을 낳았다고 죽여버릴지 누가 알아.'

첫 인상부터 쓰레기여서 그런지, 상대가 신경도 안 쓴다거나 짓지도 않은 죄를 용서 해준다거나 하는 가정을 하지는 않았다.

최악이 죽음, 그 다음이 영원히 괴롭힘 당하는 것.

나만 보면 발기를 해대는 용사만 하더라도 최악 중의 최악이었는데, 거기에 마법사까지 더해진다면 더 이상 버틸 자신이 없었다.

"마왕 씨, 지금은 조금 괜찮으세요?"

"..그래, 그 마법사 녀석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낫구나."

저 잘했죠? 같은 표정으로 달라붙는 성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했다. 잘했어.

유일한 내 편이 겨우 이런 변태 성녀 뿐이라는게 조금 슬프기는 했지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저 엄청나게 비싼 여자인거 아세요? 성녀가 편 들어준다는 건 곧 여신님이 편을 들어준다는 것과 다름 없는 일이라구요!"

...그건 별로 내키지 않는데.

제 말에 내 표정이 점점 어두워지자 성녀가 허둥지둥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을 저지른 강아지 같은 모습에, 반사적으로 손이 뻗어졌다.

쓰담, 쓰담.

"...마왕 씨?"

맹한 얼굴로 올려다 보는게 귀엽다.

솔직히 입만 다물고 있으면 귀여운 얼굴의 미인이라서, 확실히 보는 맛이 있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모니터 속에서만 존재 했었는데 이렇게 머리까지 쓰다듬을 수 있다니.

"실수다, 실수."

"그런 것 치고는 지금도 쓰다듬고 계시잖아요."

정곡을 찔려서 순간 손짓이 멈췄다.

이, 이건 불가항력이었어!

은근슬쩍 얼굴을 붉히는 성녀의 모습에 슬며시 손을 내렸다.

아니, 내리려고 했는데 붙잡혔다.

"왜 그만해요? 더 해도 되는데!"

싫은데. 내가 하기 싫다니까?

하악거리는 거친 숨소리에 섞인 목소리가 뭔가 무서웠다.

그래, 얘는 원래 이런 녀석이었지.

본능에 몸을 맡긴 스스로의 선택을 후회하며, 그대로 몸을 움츠렸다.

"...미안, 하다."

"..."

힘 없이 중얼거리며 사과를 내뱉으니, 성녀의 몸이 우뚝 굳었다.

순간적으로 덮쳐진다는 상상을 해서 그런지 심장이 쿵쾅거렸다.

더 이상 기분 좋아지고 싶지 않아.

이 몸뚱아리로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건, 내 정신을 파먹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네가 원하는 건, 아기를 낳고 나서 얼마든지 해줄 테니까. 제발 지금 만큼은 참아다오..."

비굴한 말이 튀어나갔다.

그저 아기를 낳을 때까지는 시달리기 싫어서 내뱉는 변명이었지만, 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갑자기 심각한 표정이 되어버렸다.

왜 이러지.

눈을 끔뻑거리니 성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땅이 꺼져라 내뱉어지는 한숨에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몸이 움찔거렸다.

"마왕 씨."

"왜, 왜 그러느냐."

양 어깨를 붙잡아오는 손길에 히익, 하고 숨을 집어삼킨다.

가까워. 그리고 무서워.

힘이 별로 들어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성녀의 손이 닿은 어깨가 아파왔다.

...설마 신성력이라도 집어넣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일부러 그러시는거죠?"

"무, 뭘?"

"일부러 그렇게 암컷처럼 구시냐고요."

성녀는 변태 같고, 무언가 맹한 것 같지만 하는 말들은 대부분 직구였다.

한 마디로 하자면 돌려 말하는 걸 하지 못한다고나 할까.

'...지금, 뭐?'

물론 그녀는 그게 내 역린인지도 모르고 내뱉은 말이겠지.

암컷처럼 군다.

여자가 되어간다.

유일하게 남은 정체성이 범해지는 듯한 감각에 내 정신이 찢겨지는 것만 같았다.

"...나가라."

"네?"

"나가라. 지금 당장."

너무 화가 나면 오히려 침착해진다고 했었나.

싸늘하게 식은 머릿속을 어떻게든 내리누르며, 성녀에게 일갈했다.

나가. 지금 당장 나가.

내 목소리에 담긴 분노를 알아차렸는지, 성녀의 표정이 희게 질렸다.

"아니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니ㅡ"

"변명하지 마라! 나가라면, 당장, 나가!!!"

"..."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성녀가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심했나 싶어서 무어라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했지만, 상대가 방 밖으로 나가는게 훨씬 빨랐다.

"바보구나, 정말로."

꾹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둥근 배를 꼭 껴안았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있는게 이토록 외로운 일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오늘따라 특히 더 기분이 울적했다.

***

"아, 쁘아. 아, 빠아!!"

"그래, 옳지. 옳지!"

제 다리를 붙잡고는 천천히 걸음마를 떼기 시작하는 마키나에 고르돌이 환하게 미소지었다.

아슬아슬하게 서서는, 저를 올려다 보며 잘했냐는 듯 웃어보이는게 어찌나 귀엽던지.

박수를 치며 벙글거리니 아이 또한 꺄르르 웃어왔다.

"행복해 보이네?"

"...에밀리."

그렇게 한참을 웃고 있던 고르들이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표정을 굳혔다.

어쩌다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정색하는 지경까지 오게 된 걸까.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면서도, 그의 몸은 착실하게 제 딸을 품에 안아들고 있었다.

"너무 경계하지 않아도 좋아. 이제는 아무 짓도 하지 않을 거니까."

"꺄하아아!!"

에밀리가 손가락을 흔들자 허공에서 작은 빛무리가 솔솔 흩어져 내렸다.

그 신비로운 광경을 본 아기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쭉쭉 내뻩었다.

"변덕이 하늘을 찌르는군. 내가 그 말을 순순히 믿을 거라고 생각한 거냐?"

작은 빛무리가 아이의 손에 닿지 않도록 하며, 고르돌이 뾰족하게 쏘아붙였다.

"물론 그 정도로 쉽게 믿어달라고는 하지 않아. 그래도 말이야, 그 아이가 진짜 네 딸이라는 걸 확인 했는데도 무작정 죽이려 들 정도는 아니거든?"

"...뭐?"

순간 이해가 가지 않는 말에 고르돌이 반사적으로 물었다.

"무작정 죽이려 들지는 않는다고."

"아니, 그것 말고 더 전에 한 말!"

"...아."

그 아이가, 네 진짜 딸이라는 말?

에밀리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어 상대가 당황한 틈을 타, 우위를 점한다.

눈동자를 잘게 떨고 있는 고르돌을 바라보며, 에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 따위는 당연히 아니야. 그래도 못믿겠다면야 계약을 해도 되는데, 어쩔래?"

"..."

상대의 제안을 들은 고르돌이 제 품에 안긴 아이를 내려다 봤다.

...정말 이 아기가 마키나라면.

다른 아이에게 죽어버린 제 딸일 비춰 보는 것이 아닌, 정말로 죽어버린 제 딸이라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문 고르돌이 고개를 퍼뜩 들어올렸다.

"좋아, 계약하지."

"흐응, 믿지 못한다니 어쩔 수 없네~"

믿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었다.

마왕의 뱃속에서 태어난 아이를 제 딸이라고 믿는 것과, 진짜 제 딸이 마왕을 태반으로 태어난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그래도, 뭐. 그걸로 좋다면 됐어."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기니 푸르스름한 빛줄기가 몇 번이고 점멸해댔다.

마법사와의 계약.

그것은 마법사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동시에, 자신 또한 마법사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어야 한다는 하나의 강제였다.

"내 모든 마나에 걸고, 그리고 내 스승님을 걸고 보증할게. 그 아이는 마왕군에 의해 살해당한 네 딸이 맞아."

"..."

계약이 성사된 이상, 거짓말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과거 한 순간에 겪었던 것과 같은 광경이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딸이 맞다니. 정말로, 이 아이가 마키나였다니.

"딸와 아버지의 상봉이라니, 정말 감동스러운 순간이야..."

그런 모습을 보며, 에밀리가 물기 하나 없는 눈가를 쓸어내렸다.

감동이야, 감동...

결국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고르돌이 제 속에서 벅차오르는 기분을 참아내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무런 울음소리도 없이 눈물만 뚝뚝 쏟아내는 모습이, 마치 우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보여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그러면, 이번에는 내 차례지?"

물론, 에밀리에게 있어서는 해당사항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

"또 여기에 있는 건가?"

"아, 고르돌 씨."

멍하니 정원을 둘러보고 있던 아서가, 제 어깨에 얹어지는 투박한 손에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몰라볼 정도로 커진 아이가 눈에 띄기는 했지만, 지금 가장 놀라운 건 자연스럽게 미소를 띄고 있는 고르돌의 얼굴이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래, 아주 좋은 일이 있었지."

제 질문에 껄껄 웃는 고르돌을 보며, 용사 또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언제나 인상을 쓰고,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분이 이렇게 웃고 있는 걸 보니 무언가 감회가 새로웠다.

"아니, 그런데 설마 술 드셨습니까?"

"그래, 자네도 한 잔 할 텐가?"

지금 보면 얼굴이 벌게진 것 같기도 했다.

딱히 술 냄새가 나지는 않았지만, 또 드워프 특제 술이니 뭐니 하는 것이 분명하다며 대충 흘러넘겼다.

"저는 괜찮ㅡ"

"아, 괜히 빼지 말게. 이런 기분 좋은 날에!"

제 품에 억지로 연기지는 술병에, 용사가 어색히 웃어보였다.

물론 기분이 나쁘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감회가 새로웠을 뿐.

고르돌이 건네준 술의 뚜껑을 열자, 고르돌의 얼굴에 걸린 미소가 진해졌다.

"그러면, 고맙게 마시겠습니다."

그렇게 한 모금.

병 안에 든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아니, 내가 더 고맙지."

등 뒤에서, 에밀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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