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0 - 눈먼 자들.(2)
아리엘을 되살려야 해.
부모님을 되살려야 해.
죽어버린 사람들을, 다시, 일상으로ㅡ
"아서."
"...아리엘?"
하늘이 끝도 없이 높아진 계절, 가을.
제 이름을 불러오는 목소리에 아서가 고개를 돌렸다.
분명 어제도 봤던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지.
"여기에서 혼자 뭐 하고 있어? 혹시 땡땡이?"
빙긋 웃는 미소에는 부드러운 봄이 담겨 있었지만, 그녀의 머리카락은 탐스러운 가을과도 같았다.
손을 뻗어 그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니 꺄르르 웃어보이는게 참, 뭐랄까.
감동스럽다고나 할까.
"아니, 조금 쉬고 있었어."
"치, 그게 땡땡이가 아니고 뭐야."
한 손에 이삭을 든 아리엘이 그 줄기로 아서의 정수리를 툭툭 두들겼다.
제 머리 위에서 흩어지는 낱알들에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가, 별안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 아?! 아서, 갑자기 왜 울어?! 너, 너무 세게 때렸나?"
우는 제 모습을 보며 잔뜩 당황하는 소꿉친구가 귀여웠다.
그리고,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아니, 그냥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낱알들이 들어간 건 아니고?"
빙긋 미소를 짓자 그제서야 베시시 웃어보이는 아리엘에 마음이 푸근해졌다.
제 소꿉친구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두가 웃고 떠들게 되는, 그리고 평화와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가을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아리엘."
"안 돼."
하지만 한 가지 불만 아닌 불만이 있다면 제 고백을 도통 받아주지 않는다는 점일까.
지금만 봐도 그랬다.
어떻게 자신이 할 말을 미리 알고서는 저런 말을 하는지.
"너무 매달리는 남자는 인기 없다구, 알아?"
"알지, 알아. 네가 매일마다 하는 말이니까."
그래도 한가지 위안이 있다면 그녀의 대답이 '싫어'가 아닌 '안 돼'라는 점일까.
어째서 '안 돼'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거절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 '안 돼'를 '돼'로 만들 수만 있다면, 분명 날 듯이 기쁠 텐데.
"아서, 운명을 믿어?"
아리엘이 손을 털자, 줄기의 끄트머리에 붙어있던 낱알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뜬금 없는 말에 당황할 법 한데도, 아서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나 운명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다니던 제 소꿉친구에 의한 자동적인 긍정이었다.
"아직도 그 점쟁이 할머니가 한 말을 믿는 거야?"
"응."
구름 한 점 보이지 않는 하늘에는 어느새인가 하나 둘 별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한때 마을 어귀에 살던 늙은 점쟁이 노파의 얼굴을 떠올린 아서가 표정을 살풋 찡그렸다.
"나보고 대단한 사람이 될거라고 했었지."
"그래. 그러기 위해서는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누구와도 이어지면 안된다고 했잖아."
아리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렸을 적의 이야기였지만 다시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가는 조건이기는 했다.
대단한 사람은 또 뭐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랑 고백도 하지 못한다니.
"그럴거면 차라리 대단한 사람 같은 건 되지 않을래."
"치, 무슨 말이 그래."
줄기만 남은 이삭을 길바닥에 내던진 아리엘이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성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녀일 적의 천진함이 보인다면 거짓말일까.
그저 콩깍지가 씌인 것일지도 몰랐지만, 이 모든 것들이 콩깍지라면 오히려 좋았다.
콩깍지가 씔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런 시골에서는 아무리 크게 되어도 농부가 한계라구, 알아?"
"...알지."
"그리고 나는 농부의 아내보다는 훨씬 더 대단한 사람의 아내가 되고 싶어. 이것도 무슨 뜻인지 알지?"
은근한 눈빛에 입을 꾹 다문다.
제 소꿉친구는 가끔 이렇게 막힘 없이 달려들 때가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제 심장을 치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표정을 짓다니.
뺨을 붉히며 슬쩍 시선을 피하자 쿡쿡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서, 네가 처음 고백했을 때 했던 말 기억해?"
"...너만을 지키는 기사가 되겠다고 했었지."
"그런데, 나는 기사로도 부족할 것 같거든."
나는 욕심이 많은 여자라서 말이야.
슬며시 제 손을 잡아오는 아리엘에 아서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렇다면 얼마나 더 대단한 존재가 되어야 할까.
아니, 애초에 그 점쟁이가 본 점괘가 맞다는 보장도 없잖아.
"그래, 되는 김에 그냥 통 크게 용사가 되는 건 어때?"
"푸핫, 뭐야 그게. 너무 허무맹랑하잖아, 아리엘."
"그치만, 사악한 마왕을 무찌르고 고향에 돌아와 사랑하는 이에게 하는 고백이라니. 너무 로맨틱한걸~"
꺄, 하고 과장된 비명을 내지르며 양 뺨을 꼭 감싸쥐는게 귀여웠다.
용사라.
익숙한 단어에 아서가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멩이를 툭, 걷어찼다.
뒹구르르 굴러가 담벼락에 부딪히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니, 제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자, 일단은 이 목검으로 수련부터 하자!"
"...수련이라니. 아니, 그보다 이거 목검이 아니라 그냥 나뭇가지잖아."
길게 뻗어진 나뭇가지를 들어올린 아서가 제 앞에 선 소꿉친구의 정수리를 툭툭 내리쳤다.
"우왓, 마왕 죽어!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기습이라니, 비겁하다!"
제 머리를 감싸쥐며 외치는 아리엘에 속으로 피식피식 웃는다.
이렇게 귀여운 마왕 따위가 세상에 있을까보냐.
"그보다, 이름을 부르면 기습이 의미가 없잖아..."
"지금 기습이란 걸 인정한 건가? 이 용사도 아닌 놈!"
제게 뻗어져 오는 가느다란 손가락에 아서가 어깨를 으쓱였다.
용사가 아닌 놈이라 아무런 타격도 없는데.
"그나저나, 네가 마왕이면 나랑 어떻게 이어지겠다는 건데."
용사와 마왕이 결혼이라니,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제 소꿉친구는 평범한 타박으로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좋다는 듯이 턱을 치켜든 그녀가 베시시 웃으며 선언했다.
"오히려 그게 더 좋지 않아?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금단의 사랑! 마왕과 용사의 러브러브~"
"러브러브는 무슨 러브러브..."
양손을 맞대고는 뺨을 상기시킨 채로 말하는게, 정말 기대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면 어디까지 가능한데?"
"뭐?"
뜬금 없는 질문에 물음표를 띄운다.
어디까지 가능하냐니,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어느 정도여야 가능하냐구. 마왕이 안 되면, 마왕 딸은 어때?"
아, 그런 뜻이었구나.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아서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마왕 딸이라도 조금..."
"내가 마왕 딸이면?"
"그건 좋지."
"속 엄청 보이는데~"
어깨를 툭툭 두들기는 손길에 하하, 웃음을 터뜨리자 아리엘도 마주 웃었다.
탐스럽게 영근 곡식을 수확하는 계절, 우리는 그런 식으로 잡담을 하며 하루 종일 웃어댔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지 과장되지만, 그 속에는 서로를 향한 마음을 담은 채. 그렇게.
'사실, 다른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어.'
용사나 기사가 되거나, 하물며 농부가 되었어도 상관 없었다.
자신이 바란 건 오직 그녀와 함께하는 일상 뿐이었는데.
매일 매일을 함께 보내는 것.
겨우 그것 뿐이었는데.
"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아리엘?"
어둠이 가득한 세계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언젠가 들었던 말에 정신이 번뜩이는 것 같아 상대의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와 같은 웃음소리가 넓은 공간을 희미하게 채워냈다.
기다린다니, 어디에서? 언제까지? 어떻게?
보이지 않는 모습을 붙잡으려 했지만, 잡히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건 오로지 텅 빈 공허 뿐.
"알고 있잖아, 아서. 네 소중한 소꿉친구를 되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고 있잖아!"
쿵, 하고 울리는 목소리가 용사의 영혼을 거칠게 두들겼다.
에밀리.
제 스승을 살리기 위해서는 본인의 영혼까지 팔아넘길 마법사의 이름이었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별 것 아니야, 네 신체에서 의식을 분리해낸 것 뿐이지"
역시 마법사라는 존재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겨우 이런 이야기나 하자고 고르돌을 꼬드겨서 나를 이런 꼴로 만들다니.
어둠 속에 주저앉은 용사가 한숨을 내뱉었다.
이렇게 된 이상, 부디 자신이 잠들어 있는 동안 이상한 짓을 하지 않길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앉아만 있어도 될지 모르겠네."
"...무슨 소리야, 그게."
어디에서 울리는지 모를 목소리에 용사가 사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보이는 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두운 공간 뿐.
마치 제 고막 바로 옆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네가 마신 약으로 인해 의식이 사라진 몸은 본능에 따라서 움직여."
"...설마."
상대의 말에 무언가를 떠올린 용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본능.
본인의 몸을 가득 채운 뜨거운 성욕을 떠올린 그의 심장 점점 빠르게 맥동하기 시작했다.
"뭐, 나만 보면 재미 없으니까 슬쩍 보여주도록 할까?"
눈 깜짝할 사이에 생겨난 반투명한 화면에 시선을 빼앗긴다.
길게 이어진 복도.
거의 매일마다 보는 마왕의 초상화까지.
그저 그곳에서 멈춰섰으면 좋았겠지만, 제 몸뚱이는 본능에 따라 조금씩 조금씩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멈춰, 멈추라고!'
가까워진다.
언제나 함께 몸을 섞던 존재에게.
가장 증오하면서도, 자신이 가장 은밀한 곳까지 침범했던 존재에게 점점 다가간다.
"왜 멈추려고 하는 거야, 아서? 여기서는 오히려 부추기는게 더 맞지 않나?"
빌어먹을 정도로 역겨운 말에 으드득, 이가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