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1 - 눈먼 자들.(3)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했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으려고 했었는데, 뱃속에 아기가 생기자마자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아기를 두고 죽을 수는 없다, 뭐 그런 건가?
"...차라리 이번에는 나를 닮은 아기가 태어났으면 좋겠는데."
물론 그럴 가능성 따위는 존재하지 않겠지.
이제는 내 딸이 아닌 고르돌이 딸이 되어버린 아기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 보면, 그 드워프에게 아빠라고 불렀었지.
...나한테는 엄마라고 불러준 적도 없었으면서.
"아니, 서운해 할 필요는 없어."
백만 명이나 낳아야 하는데, 그 중에서 제 편 하나 없을까.
가볍게 말하기에는 너무도 까마득한 숫자였지만, 그 정도로 까마득한 숫자였기에 오히려 안심할 수 있었다.
"나를 닮지 않아도 좋으니, 이번에는 천천히 나와주려무나."
지금 생각하자니 나를 닮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었다.
내 뱃속에서 태어난 생명이 마족이라면 다른 녀석들이 분명 아기를 죽이려 들겠지.
저항할 힘조차 없는 나는 그 광경을 눈앞에서 전부 보고 있어야 할 테고.
"그래, 차라리 닮으려면 용사 그 자식을 닮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용사의 것과 똑같은 얼굴을 한 아이가 나에게 엄마라고 부르는 상상을 하자니, 뭔가 조금 우스워졌다.
물론 나를 범하던 용사의 얼굴과 겹쳐져서 몸이 덜덜 떨리기는 했지만, 간만에 유쾌한 기분이 되어서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끼익ㅡ
"성녀?"
한참을 중얼거리는 와중에 열린 문에 조심스럽게 성녀를 부른다.
아무리 거지 같은 말이기는 했어도 내 반응이 조금 심한 것 같기도 했기에, 일단 사과를 할 셈이었다.
"아까는 내가 조금 심했던 것 같ㅡ"
"..."
"..."
하지만, 몸을 돌려 문 앞을 바라본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그곳에 있는 것이 성녀가 아닌 용사라는 건 둘째로 쳐도, 그의 상태가 상당히 이상했다.
"...용사?"
"..."
불러도 대답이 없고, 눈동자는 완전히 풀려서 초첨이 사라진 상태.
두 팔과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는 입을 반쯤 벌리고 있는게, 조금만 더 있다가는 침을 질질 흘릴 것 같은 모양새였다.
"...지금, 장난치는 것이냐?"
아무리 말을 걸어도 멍하니 제자리에 서있는 용사에 소름이 돋아났다.
언제나 불 같이 타오르던 녀석이 갑자기 저런 꼴이라고?
머릿속을 가득 울리는 위기감이 어서 몸을 피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유일한 출구하고 할 수 있는 문은 용사가 꽉 막고 있는 상태였다.
아니, 그 이전에 이런 무거운 몸으로는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무, 무서우니까 그만 두는게 어떤가."
"..."
"교접을 원하는 것이라면, 아기가 태어난 뒤에 해도 늦지 않으니까ㅡ"
눈물을 머금고 내뱉는 말에도, 용사는 미동 하나 없었다.
그저 그 흐리멍텅한 눈동자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뭔가 독한 마약을 잔뜩 퍼마신 중독자 같은 꼬라지였다.
"..."
그렇게 한 걸음, 다가온다.
마구잡이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 속의 공포를 부추겨댔다.
도망쳐, 도망쳐, 당장 도망쳐!
망설이는 순간 다시 한 걸음 내뻗어진다.
"...오, 오지 말거라."
이불이 무슨 보호막이라도 되는 것 마냥 둘둘 둘렀다.
아무 쓸모도, 의미도 없는 저항이었지만 이런 짓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무서워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형편 없이 떨리는 목소리에 비참함이 배가 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큭?! 노, 놓아라!!"
"..."
아무런 반응도 없다.
상대는 그저 자신이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내 손목을 붙잡고는 그대로 찍어누른 용사가 부풀어 오른 바지춤 속에서 제 양물을 꺼내어 들었다.
'씨발 새끼, 이 개새끼야!'
아무리 미친놈이라고 해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누가 봐도 아기를 밴 임산부인데, 그거에 대고 좆을 들이민다고?
"배, 뱃속에 아기가, 아기가 있으니까ㅡ"
푸욱.
"켁, 케흑?!?!!"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지만, 용사의 귓구멍에는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기로 인한 압박감에 더해, 용사의 물건으로 인한 충격에 내장을 거칠게 두들겼다.
미친 놈, 미친 놈, 미친 놈...
"흑, 흐아... 제발, 그만..."
짐승처럼 허리를 흔드는 것에 과연 쾌락이란 것이 존재할 수 있을까.
용사의 거대한 음경이 내 속을 진창으로 만들 때마다, 뱃속의 아기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위액을 꾹꾹 눌러대는 자궁에 자연스럽게 헛구역질이 터져나왔다.
"우, 우엑, 우흐, 우으으으엑......"
"..."
역시나 반응은 없다.
지금의 용사는 나를 그저 하나의 고기주머니로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 욕망을 터뜨리는, 그런.
"차, 차라리 욕을 해다오. 그러니까 그런 식으로ㅡ"
그런 식으로, 물건 다루듯이 하지 마.
머리가 찍어눌러진다.
고갤 가눌 새도 없이 처박힌 뒤통수가 푹신한 침대의 탄성을 느끼며 꾹꾹 내리눌렸다.
'최소한, 인격체로 대해 줘. 이런 식으로 대하지 마, 나는, 사람이라고!'
내 머리를 움켜쥐고 있는 용사의 손을 마구 긁어내렸다.
씨발 놈. 씨발 놈아, 이거 놓으라고!
전신이 거칠게 흔들리는 와중에 머리만 고정되어서 그런지 목덜미가 삐걱거렸다.
"켁, 켁... 이, 이러다가는 아기가 죽어버린다고!!!!!"
비명을 내지르듯 목소리를 내뱉는다.
이 몸뚱아리가 된 뒤 처음으로 튀어나가는 원래의 말투에 기뻐할 틈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퍽퍽, 하고 살벌한 소리를 흘리는 고간이 두려웠다.
퍽, 퍽, 퍽, 퍽, 퍽!!!
"캭! 캬하, 우에 우에겍..."
위액이 쏟아져 나온다.
언젠가 경험했던 경험 그대로, 충격을 버티지 못한 위장이 그 속에 든 것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위 뿐만 아니라 아래도 같이 쏟아내고 있다는 점이랄까.
"아, 아, 아..."
"..."
왈칵, 하고 쏟아져 나오는게 용사의 정액 따위가 아니란 건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마치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콸콸 넘쳐나는 투명한 액체에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이건, 설마. 아니, 설마. 설마."
설마.
아니지?
"아기, 아기가 나오려고 하잖아! 아, 아기가 나온다고! 아기가, 아기가!!!!"
아기가 나와. 아기가 나온다니까? 듣고 있어? 듣고 있으면 당장 멈춰.
아니, 듣고 있지 않아도 눈깔이 달려 있으면 지금 당장 멈추라고, 이 빌어먹을 새끼야!
"억, 하아, 악... 이, 이제 그으만......"
파수가 시작됨과 동시에, 자궁에 있던 아기가 천천히 세상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용사의 흉악한 자지에 가로막혔다.
태어나려는 존재와, 제 욕망에 따라 좆을 박아넣는 자.
어미의 본능으로 인해 필사적으로 배에 힘을 주었지만, 용사의 좆을 뚫고 아기를 낳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아파, 아파, 아파아아아아악!!!!!!!!"
당연히 나와야 할 아기가 나오지 못한다.
길을 잃은 아기가 자궁 안에서 멈춰서자, 아기의 크기를 버티지 못한 뱃속이 마구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싫어, 아파, 이런 고통 따위 느끼고 싶지 않아...'
아기가 태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오고 싶어. 태어나고 싶어. 그러니까 나가게 해줘.
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고통으로 인해 시야가 노랗게 물들고 있는 와중에도, 그것 하나 만큼은 생생했다.
"제, 제발, 멈춰주세요..."
아기의 감각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흐느낌과 동시에 눈물을 쏟아내자, 용사의 좆이 정액을 쏟아냈다.
그만 둬. 내 아기를 죽이지 마. 그 더러운 정액으로, 익사 시키지 마!
'도와주세요, 엄마.'
아기가 나에게 속삭였다.
들리지는 않았지만, 분명 그렇게 말했다.
제 정수리를 짓누르는 용사의 좆을 치워달라고,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허억, 헉, 허억......"
그리고 그 순간,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용사의 눈동자에 한 줄기 생기가 맴돌았다.
거칠게 욕정을 토해내던 목구멍이 이내 숨을 집어삼키고, 떨리는 몸를 움직여 내 안에서 제 물건을 뽑아냈다.
"아, 아악, 흐아......"
경로를 가로막고 있던 이물질이 빠져나가자마, 아기가 몸을 움직였다.
본래라면 한참 전에 나왔을 아기에 반쯤 긴장을 풀고 있던 질내가 예상치 못한 사태를 맞이함과 동시에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토해냈다.
'죽어, 죽어... 버려...'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감각.
누군가가 자궁과 질을 뽑아낸 다음 매듭지어서 그걸로 줄넘기를 하는 것 같은 감각이었다.
정신과 시야가 서로 흰색과 검은색을 오가며, 마구잡이로 뒤바뀌고 있었다
하지만 시야가 깜빡이는 와중에도 아기가 잘 나오고 있나 확인하는 꼴이 영락 없는 어머니 그 자체였다.
"하아, 하아, 흐으..."
반쯤 벌려진 입에서 침이 질질 흘러나왔다.
시야가 뿌옇게 물들고, 전신이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었지만 내 손은 아기를 찾기 위해 착실히 움직이고 있었다.
'아, 아기가... 아기... 아기...'
마침내 손에 닿은 자그마한 온기에, 활짝 웃음을 지으며 품에 안는다.
용사가 싸지른 정액 때문에 끈적끈적한 상태였지만, 그 정도 쯤이야 아무래도 상관 없었다.
...아기만 있으면 상관 없어.
그렇게 거친 숨소리가 뒤섞여 만들어내는 묘한 침묵에 식은땀이 끈적하게 달라붙을 무렵이었다.
"...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품에 안긴 아기를 부른다.
침묵.
그 두 글자가 의미하는게 무엇인지 깨달았을 무렵에는, 심장이 목구멍 너머로 튀어나올 듯이 맹렬히 쿵쾅거렸다.
"아, 아아아아아아아......."
아기가, 울지를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