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2 - 눈먼 자들.(4)
아기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이려면 나를 죽이지, 아기가 무슨 죄가 있다고!
"최악, 최악이야..."
아직 탯줄이 끊어지지 않아, 나와 한 몸으로 이어진 아기를 품에 안고는 멍하니 중얼거린다.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아기가 죽는다니, 그런.
"죽이려면 차라리 나를 죽이지, 왜..."
왜. 어째서, 왜.
"대체 왜 그런 것이냐, 왜......"
창백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무수한 증오를 품어낸다.
전부 참았어.
억지로 범하는 것도, 나에게 욕을 하는 것도, 나를 점점 암컷으로 만드는 것도 전부 다.
그런데, 이건 아니잖아.
이건, 이래서는 안 되잖아.
"나, 나는..."
용사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마치 조금 전까지 꿈 속에 있던 몽롱했던 표정이, 현실과 마주함과 동시에 처참하게 깨져나갔다.
"...꼴도 보기 싫으니, 나가라."
"..."
"나가라고, 말했어!!!"
힘을 주어 소리를 지르니, 다시 한 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용사를 향한 분노보다는 아기를 잃었다는 것에서 나오는 슬픔이 훨씬 컸다.
뭐가 백만 명을 낳으라는 거야.
뭐가 죽인 만큼 낳는다는 거야.
이렇게 죽어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는데?
[앞으로 낳아야 할 아이의 숫자 : 999,999 명]
"...흑, 흐아아아아......"
후드득 떨어진 눈물이 아기의 뺨 위를 수놓았다.
아직 양수가 채 마르지도 않아 축축한 아기의 몸은, 처음에 느꼈던 온기가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거짓말이야.'
하지만 이게 현실이었다.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처참한 현실.
"미안, 미안해... 내가, 미안해..."
아기의 머리에 뺨을 가져다 대고는 사과의 말을 읊조린다.
미안해. 내가 미안해.
자그마한 발에 입술을 맞추고, 그 다음에는 조막만한 손, 그 다음에는 팔, 다리, 배, 얼굴, 정수리.
"..."
세상이 빛을 잃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 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갑자기 목이 가려워서 북북 긁어내리니 얼마 지나지 않아 피부가 벗겨졌다.
붉게 물든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가 손톱으로 꾹 짓누르니 핏방울이 툭툭 떨어졌다.
"...증오한다, 용사."
이 세상 누구보다, 너를 증오해.
공허한 중얼거림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녀석의 소꿉친구도 부활하지 못할 테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내가 용사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도 소중한 소꿉친구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그 모든 것을 빼앗기 위해서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살아있어서는 안됐다.
"죽어야 해."
지금 당장. 확실하게, 죽어야 해.
멍하니 중얼거리니 방 안의 공기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포기한 끝에 죽음을 택한 이와, 복수를 품고 죽음를 택한 이의 의지는 차원이 다른 법이었다.
"죽어야 해, 죽어야..."
저번 같은 사례가 있어서 그런지, 방 안에는 뾰족하거나 날카로운 날붙이들이 전부 사라진 채였다.
하, 용의주도한 자식.
내가 죽는 꼴은 절대 못 보겠다 이건가?
'그런데도 잘도 내 말에 방 밖으로 나갔구나. 머저리 같은 새끼.'
꺽꺽 숨을 토하며 고개를 숙이자, 품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미약하지만 확실한 움직임.
화들짝 놀라서는 몸을 일으키자, 내 품 안의 아기가 눈에 들어왔다.
"흐, 흐으..."
"...아."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상태로 울음을 터뜨리기 위한 작은 소리만을 흘려대는 아기에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살아있잖아.
살아있다고.
"다행, 다행이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흐아아아아앙..."
그제서야 울기 시작하는 아기를 바라보며 작게 흐느꼈다.
처음 태어났던 아기보다 확실히 작은 목소리였지만, 울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콩닥 콩닥, 하고 아기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살아있어.
"다행이야..."
뜨거운 눈물이 이불 위를 적셨다.
지금은, 그냥 울고 싶을 뿐이었다.
***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니, 그건 내 잘못이 아니었어.
그건 전부 에밀리 잘못이었다고.
"내가 한 짓이 아니야..."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창 밖을 바라봤다.
투명한 판 안에 희미하게 보이는 제 얼굴은 빈말로도 멀쩡하다고 볼 수 없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다.
언젠가 보았던 망령들을 떠올린 용사가 제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쥐어 뜯었다.
'죽으면 어때서?'
분명 그런 말을 했더랬지.
죽으면 어떠냐고, 마왕의 아이 따위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내뱉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짜 죽으라는 뜻은 아니었어.
죽일 생각도 없었어.
나는, 그냥.
"...용사님."
"...엘리."
창백한 얼굴을 한 용사의 앞으로, 창백한 얼굴을 한 성녀가 다가섰다.
서로 같은 색의 표정을 한 그들은 묘하게 닮아 보였지만, 동시에 미묘하게 달라보였다.
"또, 마왕에게 가신 건가요?"
"..."
"...설마, 아니죠?"
힘 없는 목소리로 물어오는 엘리에 용사가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상대의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무슨 짓을 하신 건데요. 무슨 짓을 하신 건데 표정이 그러시냐고요!"
바짝 다가선 엘리가 용사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상대의 일갈에도 용사는 답하지 않았다.
아니, 답하지 못했다.
"모르겠어요. 분명 용사님이 안타깝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횡설수설하며 말을 꺼낸 엘리가 별안간 입을 다물었다.
새하얗게 질려있던 얼굴이, 퍼렇게 물들더니 이내 원래의 살구색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용사님이 마왕 같아요."
내뱉어진 한 마디에 용사가 숨을 멈췄다.
"엘리..."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하지만, 저는 제가 느낀 그대로 말씀드린 것 뿐이에요."
초점 잃은 눈동자는 용사가 아닌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은 과연 무엇일까.
멍청히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용사가, 제 옆을 스쳐지나는 엘리의 팔을 붙잡았다.
"변명할, 변명할 기회를 줘. 이번에는 내 잘못이 아니ㅡ"
"이번에는, 이요?"
흑색으로 회오리치는 눈동자가 용사를 향했다.
깊게 물든 그 시선에 말문이 막혔다.
이번에는.
아니, 이번에'는'이 아니잖아.
"이번에'도', 겠죠."
반쯤 뿌리치듯이 용사의 손길을 털어낸 엘리가 그대로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용사가 깊게 숨을 내쉬었다.
마왕을 만나 뒤로부터, 무엇 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 없이 전부 배배 꼬여가는 것만 같았다.
***
'여신이시여, 저는 모르겠습니다.'
둥근 달이 뜬 하늘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한다.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의식을 다잡으려고 노력했지만, 몰려오는 졸음에 정신이 오락가락 했다.
여신님의 힘을 빌리면 빌릴수록, 내 영혼이 점점 희미해진다.
"머리가..."
시야가 깜빡거리다가 이내 검게 물든다.
의식을 잃는게 아니라 의식을 빼앗기는 듯한 감각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처음에는 그저 기분 탓이라고, 그냥 기분 나쁜 악몽일 뿐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날이 가면 갈수록 선명해지는 기억에 제 몸이 누군가에게 빼앗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신님, 혹시 당신이십니까?"
무릎을 꿇는다.
교단의 가장 위에 서계시는 그 분의 형상을 떠올리며 기도를 올린다.
용사의 성검에 마왕이 피가 묻었을 때 강림한, 그 어렴풋이 떠오르는 광경을 머릿속으로 재현한다.
여신이시여, 저를 보고 계시다면 부디 한 가지 청을 들어주소서.
"부디, 그녀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게 해주세요."
부디, 그녀가 행복할 수 있게 해주세요.
겨우 기도 한 줄기.
겨우 혼자서 중얼거리는 한 마디.
위선이라는 것 쯤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빌 수 있는 기도였다.
"성녀, 안에 있는가?"
"...고르돌 씨."
짧은 기도를 마치고, 어떻게 찾아왔는지 모를 손님을 맞이한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품에 안겨다니던 아기가 이제는 아이가 되어 고르돌의 손을 잡고 두 발로 서있었다.
"벌써 이렇게 컸다네."
주어가 없는 말이었지만,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엘리가 천천히 손을 뻗어 아이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반짝이는 눈동자에 자신의 모습이 비치자 조금 정도는 정신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저보다는 마왕 씨에게 가는 편이 더 좋을 텐데요."
"...흠."
아무리 그의 딸과 닮았다고 한들, 아이의 엄마는 다름 아닌 마왕이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이 정도로 성장한 아이를 보여준다면 분명 기뻐하겠지.
가느다란 머리카락의 결을 따라 천천히 쓸어내리니 아이가 꺄르르 웃어보였다.
"그렇게도 좋으냐, 마키나?"
"..."
아이를 따라 싱글벙글 웃어보이는 고르돌에 잠시 손을 멈춘다.
마키나. 아이의 이름일까.
무언가 들어본 것 같은 이름에 잠시 기억을 되짚은 엘리가 마침내 깨달음을 얻고는 짧게 탄식했다.
설마.
"설마, 그 아이에게 딸아이의 이름를 붙여주신거에요?"
"...딸아이의 이름를 붙여준게 아니라, 내 딸일세."
당연하다는 듯 튀어나오는 말에 엘리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여신이시여, 당신은 어째서 이리도 잔혹하십니까.
아기였던 아이를 품에 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던 마왕의 얼굴을 떠올리자, 심장이 쿡쿡 찔려왔다.
"왜, 무언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가?"
고르돌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말을 해도 설득할 수 없겠지.
사랑에 눈이 먼 존재란, 분명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사악일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