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3 - 눈먼 자들.(5)
젖을 빠는 힘이 약하다.
설마 태어날 때 여러모로 고생했던 것 때문에 어디가 불편하기라도 한 걸까.
분명 크기는 드워프 아기가 훨씬 작았는데도 불구하고 힘이 부족했다.
"...너도,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아이겠지."
나도, 용사도, 그렇다고 용사 일행의 그 누구도 닮지 않은 아기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뱉는다.
젖을 문 채로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졸린 모양이었다.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언젠가 들었던 자장가를 천천히 중얼거리며 아기의 등을 토닥인다.
거의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트름을 한 아기가 천천히 눈을 감더니, 이내 새근새근 잠들었다.
"귀여운 아기구나."
"흣?!"
그렇게 곤히 잠에 든 아기를 바라보며 한참.
귓가에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서는 고개를 치켜든다.
"마왕이 아이를 낳는다니, 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녹색 머리카락이 흩날린다.
마치 숲을 형상화 시켜놓은 듯한 기다란 실타래 밑으로 뾰족한 귀가 쫑긋 솟아 있었다.
"..."
엘프 궁수, 레이나.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담긴 눈동자가 껄끄러웠다.
설마 저 녀석도 나를, 아기를 죽이려고 하는 걸까.
몸을 조금 더 움츠리자 상대가 한 걸음 다가왔다.
'...다가오지 마.'
"흑..."
용사도, 성녀도, 드워프도, 마법사도 전부 똑같았다.
내 정신을 깎아내리고, 포기하게 만드는 존재들.
특히 마법사의 경우를 떠올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할까.
그리고, 무슨 짓을 당할까.
"고르돌의 딸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
"그리고 그 아기. 내가 보기에는 너나 용사의 아기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만, 틀린가?"
무덤덤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어깨가 축 늘어졌다.
신경쓰고 있던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찔러대다니, 너무하잖아.
"...나는 어떻게 해도 좋으니, 아기 만큼은 손 대지 말아다오."
한 걸음 더 다가온 상대에게 부탁한다.
아픈 것도 경험이 쌓이면 익숙해진다고, 지금끼지 겪어왔던 것 덕분에 어느 정도는 각오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무슨 짓을 당할까.
뺨을 맞나? 아니면 흠씬 두들겨 맞을까.
어쩌면 목을 조를지도 모르지.
"마왕."
"..."
상대의 부름에 침묵을 유지했다.
무슨 대답을 해도 변하지 않는 운명이라면, 차라리 대답할 힘조차 아끼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상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세계수도 낳을 수 있는가?"
뭐?
***
아름다운 숲의 일족.
그들에게 있어서 세계수란 그들이 돌보고 가꾸는 생명임과 동시에 하나의 신이기도 했다.
인간들이 여신을 믿는 것처럼 엘프들 또한 세계수를 믿는다.
언재나 실체를 드러내고,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믿음은 신앙을 뛰어넘어 하나의 혼으로 거듭날 정도였다.
"깨어났구나, 레이나?"
"그래. 생각보다 오래 잠들어 있던 것 같구나."
끄트머리가 엉킨 녹색의 머리카락을 풀어내린다.
엘프란 종족은 워낙 오래 사는 종족이다보니, 한 번 잠들면 며칠 동안 깨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마왕은 어떻게 되었지?"
마지막의 기억을 되새기다가, 표정을 살풋 찡그린다.
성검이 마왕의 몸을 베어내는 것 까지는 봤지만, 그 뒤의 일이 떠오르지를 않았다.
...흠, 여신이 강림한 것 같기도 한데.
"살아있어."
"살아있다니, 도망친 건가?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을 텐데."
그때의 일을 떠올린다.
달이 뜨지 않은 어두운 밤, 그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세계수의 모습을.
전신이 불타는 기분이었다.
우리들의 신, 우리들의 어버이, 우리들의 전부.
그 유일한 하나가 잿더미가 되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던 그 치욕의 순간.
"그게 녀석의 역할이니까."
"역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는 에밀리에게, 레이나가 물었다.
인간이라는 존재들은, 특히 그중에서도 마법사라는 녀석들은 가끔씩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는 했다.
역할이라니, 영문을 모르겠군.
"얼마 전에, 고르돌의 딸을 낳았어."
"...뭐?"
"혹시 외형만 닮은 건가 싶어서 확인 해봤는데, 영혼까지 완벽한 고르돌의 딸이더라."
그렇게 내뱉는 상대의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본다.
흔들림 하나 없이 둥글게 떠진 눈은 거짓을 말하고 있는 자의 것이 아니었다.
설마하니 마왕이 드워프를 낳게 될 줄이야.
"죽인 만큼 낳는다. 느낌이 오지 않아?"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서는 뒷모습을 응시한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 표정.
집착과 광기로 물든 얼굴은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무슨 선택을 해야 하는가.'
숨을 내쉬자, 주변에 가라앉아 있던 공기가 싱그럽게 물들었다.
숲의 생명체인 엘프들의 호흡은, 주변의 공기를 청결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일단은 만나고 나서 생각해볼까."
생각만 해서는 진전이 없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깨달은 것들 중 하나였다.
"으으으으응..."
쭈욱 기지개를 켜, 찌부둥한 몸을 풀어낸 레이나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생각해보니 마왕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겠군.
주욱 이어진 복도 사이사이마다 박혀있는 문들을 바라보다가, 그 중 하나의 문고리를 돌린다.
"여기는... 아니구나."
텅 반 방 안을 바라보던 레이나가 길다란 귀를 쫑긋거리며 으음, 신음을 내뱉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한참이 지나서야 마왕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럴 때 만큼은 에밀리가 부럽구나.'
마법을 쓸 수 있다면 편리했을지도 몰랐는데.
잔뜩 뻐기는 표정으로 '알려줄까?' 같은 소리만 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은 자신도 마법을 사용할 수있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속으로 투덜거리고는 길게 이어진 복도 사이를 걷는다.
"악취미적인 그림이야. 아니, 이걸 그림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그림이라기 보다는 마치ㅡ"
흠, 하고 뒷말을 끊고는 뒤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시선을 돌린다.
멍한 얼굴에 초점이 희미한 눈동자.
가지고 있던 증오가 반쯤 증발한 듯한 모양새에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용사, 왜 그런 꼴을 하고 있지?"
"...레이나, 씨?"
"내가 레이나가 아니면 누구로 보이는가."
말을 걸자 화들짝 놀라는게 마치 겁을 집어먹은 것처럼 보였다.
마왕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던 역전의 용사가 겨우 내 목소리 따위에 겁을 먹다니.
괜히 그런 용사가 귀여워 보여, 레이나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인간은 재미있어.
"아, 그래. 용사, 혹시 마왕이 어디에 있는지 아나?"
"그건 왜..."
"그녀에게 볼일이 있어서 말이야."
머뭇거리는 용사를 재촉하자,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깊게 숨을 내쉰다.
무언가 숨기는 것이라도 있는 걸까.
시선을 마주치려는 찰나 고개를 돌려버리는 용사에 레이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까지도 인간은 잘 모르겠단 말이지.'
그토록 마족에 대한 증오를 토해내던 녀석이 정작 마왕을 살려두고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괴상한 일이었는데 그녀의 위치까지 머뭇거리며 알려주지를 않는다.
내가 잠들어 있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던 걸까.
"마왕은 모퉁이를 돌아, 가장 안쪽 방에 있습니다."
"음, 알려줘서 고맙네."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돌린다.
뒤에서 용사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지만,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내가 궁금해 하는 건, 마왕을 직접 만난다면 전부 알 수 있겠지.
"자장, 자장, 우리 아가..."
모퉁이를 돌아, 주욱 걷다보니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들어봤던 음성에 레이나의 귀가 쫑긋거렸다.
같은 목소리지만, 분위기가 달라.
작은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방 앞에 선 그녀가 반쯤 열린 문틈 사이에서 보이는 광경을 보며 작게 숨을 삼켰다.
'...정말로, 저게 마왕이라고?'
무릇 마왕이라고 한다면 사악한 마족들의 왕이었지만,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건 그저 한 아이의 어머니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애처로운 표정을 하고, 아기의 등을 토닥이며 자장가를 부른다.
그 광경을 보니 순간적으로 마족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왕녀와 그녀의 아이가 머릿속에서 떠올라, 레이나가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귀여운 아기구나."
말을 붙이는데 재주가 있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상대의 품에 안긴 아기를 주제로 말을 열었다.
자신이 방 안으로 들어왔는지도 몰랐는지 화들짝 놀라는게 조금은 안쓰러워 보였다.
"마왕이 아이를 낳는다니, 처음에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가까이에서 보니 훨씬 더 신기했다.
마왕의 품에 아기가 안겨있다니.
지금까지의 마족들을 떠올린 레이나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눈동자를 덜덜 떠는 마왕의 모습을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역시 다른 녀석들과는 다르군.
그런 감상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도 좋으니, 아기 만큼은 손 대지 말아다오."
그리고 마침내 마왕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왔을 때, 레이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마왕은 지금까지 상대한 마족들과는 성질 자체가 다른 존재라고.
그들과의 전투에서 이기겠다며 제 뱃속에서 태어난 아기조차 씹어삼키던 모습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훤했다.
그럴거면 어째서 아이를 가졌냐는 물음에 미친듯이 웃으며 '심심풀이'라고 말했더랬지.
"마왕."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마왕이 정말로 마왕군의 손에 희생된 이들을 낳는다면.
만에 하나라도, 그녀가 세계수를 낳을 수 있다면.
그렇다면.
"세계수도 낳을 수 있는가?"
생각으로만 있던 말이 세계수의 부활이라는 격정을 이기지 못하고 목구멍을 통해 내뱉어졌다.
'...이런, 잘못 말했군.'
잔뜩 당황한 레이나였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니어도, 그녀는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이었다.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