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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44화 (44/342)

Chapter 44 - 눈먼 자들.(6)

"아니, 그게, 그러니까..."

순간 내가 들었던 말이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망가진 라디오처럼 버벅거린 끝에 입을 꾹 다물자 상대의 시선이 날카로워진 것 같았다.

"...잘, 모르겠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하니 흠, 하는 소리를 흘려댄다.

...또 왜. 왜 그러는데.

모르는 걸 알고 있다고는 말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몸 조리는 잘 하고 있나? 산모에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안정이라는 건 가장 기본적인 상식 중 하나지."

"..."

뭔가 기분이 묘하다.

분명 날카로운 눈매임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와 겹쳐보이는 것 같았다.

예를 들자면 어렸을 적에 친구랑 놀다가 무릎을 다친 나를 보는 할머니 같은 느낌이랄까...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렸지만, 여전히 시선은 나를 향한 채였다.

'...그냥, 아기랑 둘만 있고 싶은데.'

용사를 비롯해, 용사 일행과 같이 있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나는 세상에 둘도 없을 빌어먹을 녀석일게 틀림 없었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때리고, 강간하고, 욕하고, 발정제를 먹이는 녀석들이 뭐가 좋다고 같이 있고 싶어 할까.

...다시 생각해도 거지 같은 놈들이야.

"용사와의 교접은 할만 한가?"

"?! 콜록, 콜록! 가, 갑자기 그런 건 왜..."

예상치 못한 질문에 기침을 토해내자 고개를 갸웃거린다.

...본인의 질문이 잘못된건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잖아, 그거.

"그야, 예전에 혼자 위로하고 있는 용사를 본 적이 있었거든."

"..."

"그 정도 크기는 엘프들 사이에도 좀처럼 없지. 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다리가 세 개인 줄 알았다."

부끄러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물론 이쪽은 이미 끝의 너머꺼지 당해본 입장이라 그저 심각해질 뿐이었다.

...그 새끼 좆 생각만 하면 열불이 치솟아서, 당장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아팠다."

"그리고?"

"...죽을 뻔 했다."

처음 당했을 때의 기억을 되새기며 아랫배를 문지르자, 약간이지만 환상통이 느껴졌다.

내 배를 꿰뚫던 거대한 물건.

거대한 물건.

거대한.

"헉, 흐으, 흐...?!"

"...괜찮나?"

순간적으로 숨이 멈췄다.

용사의 물건과 함께 느껴지는 고통, 그리고 이어지는 쾌락.

정신이 개변되는 듯한 착각과 함께 몰려오는 두려움이 머릿속을 이리저리 뛰놀았다.

하나를 더 낳았어도 겨우 둘.

앞으로 999,999 명.

"천천히 숨을 내쉬고, 천천히 내뱉어라. 최대한 마음을 편안하게 먹고ㅡ 그래, 그렇지."

"하아, 하아, 하..."

등을 토닥이는 손길의 리듬에 맞춰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품 안에 있는 아기에 온 정신을 집중하니 조금은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너는."

"음?"

"너는, 용사 일행인데 어째서..."

왜 나한테 잘해주는 거야.

연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만, 내게 친절한 척 다가와 속인다고 해서 얻는 이득이 없었다.

차라리 때리고, 짓밟는 편이 더 만족할 수 있겠지.

"엘프들에게 있어서 산모란 보호해야할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 질문에 엘프가 반사적으로 답했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산모란 생명을 품고, 생명을 세상에 내놓은 위대한 존재라는 인식이 있다고.

장수종인 그들은 아이를 거의 가지지 않았기에, 임산부를 특히 더 극진히 대했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나에게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 나는, 마왕이니까."

차라리 때리는 편이 나았다.

욕을 하고, 짓밟는게 나았다.

대체 왜 잘해주는 거야.

대체 왜 친절한 거야.

'...이제는, 증오조차 할 수 없게 만드려고?'

누군가가 내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긁어내린 목에 얹인 피딱지에서 격한 가려움이 느껴졌다.

가려워, 숨막혀, 가려워, 숨막혀...

"그만, 목에 상처가 생기지 않나."

"...흑."

손톱 끝이 붉게 물드는 순간, 엘프의 손이 내 손목을 그러쥐었다.

분명 내 행동에 제동을 걸고 있음에도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부드럽게 어르려는 마음이 느껴져, 반사적으로 눈물이 터져나왔다.

"가, 갑자기 울면 당황스러운데요ㅡ 아니, 당황스럽군."

순간적으로 둥그러진 눈매나, 길게 뻗어진 귀를 위 아래로 팔락이는 모습이 꽤나 당황한 듯 싶었다.

하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을 멈추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 세상에 와서 받은 유일한 친절.

무감각하던 표정을 깨뜨리고 허둥거리는 것을 보니 조금은 울적한게 나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마족이지 않은가."

"그래, 그리고 그들의 가장 위에 선 마왕이지."

"그런데, 어째서?"

투명한 눈물 방울이 뺨을 타고 흐른다.

여전히 울음을 그치지 못한 나를 보며, 엘프가 제 귀를 긁적였다.

"엘프들은 수명이 길지."

수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살아오며 엘프들이 마족들에게 당한 건 단 한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그 단 한 순간에 세계수가 불타버린 건 충격적인 일이었지만, 뭐랄까.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서 그런지 아직까지도 얼떨떨할 뿐이랄까.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다면 나 또한 너를 원망하고, 증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도 그렇게 좋은 감정은 들지 않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내가 잃었던 것들을 돌려놓는다면 전부 용서해 줄 수도 있다."

엘프들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넘칠 만큼 존재했다.

정말 마왕이 다른 희생자들을 모두 낳는다면, 그 시간 동안 충분히 기다려 줄 의향이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기억 속에서 마왕군이란 그저 스쳐지나가는 한 여름 밤의 꿈 정도로만 기억될 터였다.

"...그렇구나."

알고 있었다.

눈앞의 엘프가 하는 말이 지독히도 자기 중심적인 말 따위라는 것 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결국은 내가 용사에게 범해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발언 따위가, 진정한 친절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선이라고 할지라도, 받아들이고 싶어.'

위선조차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위선이 곧 최고의 선일 수 밖에 없겠지.

속으로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최대한 노력하겠다는 제스쳐를 하자, 엘프의 얼굴에 둥근 미소가 그려졌다.

"좋아. 마음에 드는군."

싱그러운 녹색의 눈동자에 잠시 그늘이 드리웠지만, 나는 그걸 보고도 못본 척 했다.

그저 품 안의 아기를 꼭 껴안고는 이 평온이 조금이라도 더 길게 이어지길 바랄 뿐이었다.

***

"...이번에는 인간 아이를 낳았다고?"

찍찍거리며 소리를 내는 사역마에 에밀리가 제 앞머리를 쓸어내렸다.

마법사의 자질이 있는 아기들 특유의 마나가 느껴지지 않아서 평범한 아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인간을 낳았을 줄이야.

"머리카락 색은?"

찍찍.

"파랑? 파랑, 파랑이라... 아서의 소꿉친구는 파랑색이 아니었던 것 같았는데."

가장 처음 순간의 일을 떠올린다.

제 소중한 존재를 잃고 멍하니 서있던 아서를 처음 만났던 때.

그의 옆에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던 시체의 색을 천천히 떠올린 에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파란색은 아니었지.

찍찍.

"뭐어, 남자애였다고?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괜히 제 사역마에게 짜증을 내고는 탁자 옆에 놓인 고깔모자를 천천히 쓸어내린다.

이번에는 조금 심했을지도 모르겠네.

솔직히 말하자면 그 년의 일그러진 표정이 보고 싶어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일단 낳기는 했으니까, 한 번 더 임신시켜야 할 텐데."

시간이 아까웠다.

이렇게 있는 동안에도 스승님과 만날 시간이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아아, 스승님. 사랑하는 스승님.

부끄럽다는 듯 제 뺨을 움켜쥔 에밀리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당신을 못 본지 너무 오래됐어요. 보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라고요."

목숨을 구해주고, 거둬주고, 마법을 가르쳐주고, 친절한 미소를 지어보이던 그 모습.

절대로 잊을 수 없고, 잃을 수 없고, 빼앗길 수 없는 그 모습!

"그 빌어먹을 마족 새끼들만 아니었다면..."

까드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책상 위에 앉아있던 사역마가 그 소리를 듣고는 바들바들 떨었지만, 이미 제 세계에 빠진 그녀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까득, 까득, 까득, 까득, 까드득, 까득.

"스승님, 스승님, 스승님, 스승님..."

손톱을 씹는다.

아니, 물어뜯는다.

보기 좋은 살구색으로 물들어 있던 손톱이 끈적한 선혈색으로 물들고, 그 입술을 붉게 칠할 무렵이 되어서야 에밀리가 제 행동을 멈췄다.

'에밀리, 너는 손이 참 곱구나.'

"스승님이 칭찬해준 손이 엉망이 되어버렸잖아..."

엉망이 되어버린 제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아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이런 짓을 했으니 분명 미움 받을 거야.

그런데, 이건 내 탓이 아니잖아.

내 잘못이 아니라, 스승님을 죽인 마족 새끼들 때문이잖아.

"마족, 마족, 마왕..."

노래하듯이 읊조린 에밀리가 옆에 놓여있던 지팡이를 집어듦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그 딱딱한 막대를 움켜쥐었다가, 힘을 풀고는 엄지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다.

박자를 맞추듯 찍어누르는 손가락에 그녀의 지팡이가 붉게 물들었다.

"조금 정도는 괴롭혀 주고 올까나."

검게 죽은 눈이 창문에 비쳤다.

쥐구멍 속으로 사라지는 사역마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지금은 제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잠재우는게 우선이었다.

죽일 수 있은 마족들이 이 세상에서 전부 사라져버린 이상 남은 마족은 마왕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죽이지는 않아. 절대로.

"아아, 스승님..."

당신의 모체가 될 것을 괴롭히려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그렇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

"전부 다 죽여버릴지도 모르니까..."

후후후후후.

음산한 웃음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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