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5 - 눈먼 자들.(7)
...시선이 부담스럽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고, 아기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렇고 전부 다.
아기가 내 젖을 물고 있는게 그정도로 신기한 일이었던 걸까.
슬슬 눈치를 보니 빙긋 웃어보인다.
'뭔데, 진짜...'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나가라고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조용히 있는 편이 좋겠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다.
상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따위는 내 상관이 아니었다.
'차라리 용사 녀석의 소꿉친구를 먼저 낳는다면 편해질 수 있을까.'
지금과 같은 생활 따위는 그저 아이를 낳는 도구에 불과했다.
성욕처리용 고기 인형.
소름 돋을 정도로 저열한 단어들의 나열에 팔뚝이 덜덜 떨려왔다.
"그나저나, 통성명도 하지 않았군. 나는 레이나라고 한다. 언제까지고 마왕이라고만 부를 수는 없으니 네 이름도 알려다오."
"..."
내 이름?
전생에서의 이름을 떠올렸지만, 아무래도 그건 조금 아닌 것 같았다.
그러면 뭐라고 일러주는 편이 좋을까.
이곳에서는 언제나 마왕이라고만 불려서 그런지, 딱히 생각나는게 없었다.
"마왕, 잠시만."
"...왜 그러는ㅡ"
그러다가 문득, 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엘프에 고개를 들어올린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유를 물으려고 했지만, 상대가 나를 품에 안고 몸을 날리는게 더 먼저였다.
콰앙!!!
"히끅..."
굉음이 울린다.
귀가 멀어버릴 듯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딸꾹질이 터져나왔다.
마치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소리였다.
"흐아아아아앙..."
"히끅, 흐끅..."
소리를 듣고 깨어난 아기가 앙앙 울어댔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포심을 억누르기 위해 몸을 둥글게 웅크렸다.
'....싫어. 무서워. 그만, 해.'
아무것도 보기 싫었다.
더 이상 이런 일 따위, 겪기 싫었다.
"왜 스승님이 아닌 거야? 내가 먼저 '부탁' 했잖아. 응?!"
목소리가 들려온다.
히스테릭하게 찢어진 목소리.
속에 감춰진 집착과 증오를 곱게 갈라 공기 중으로 퍼뜨리는 목소리.
고막을 뚫고 들어오는 광기에 전신이 바짝 굳었다.
미친 년.
속으로 중얼거리니 하이톤의 웃음소리가 반쯤 작살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레이나, '그거' 당장 내려놓지 않을래? 내가 지금 기분이 조금 안 좋아서, 그게 필요하거든."
엉망으로 뜯어진 손가락 끝이 나를 가리킨다.
그것이 마치 사신의 손가락질과 같아서, 나는 숨을 집어삼킬 수 밖에 없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건데. 왜, 대체 왜...'
두려움에 덜덜 떨며 고개를 들어올린다.
그 순간 마주친 녹색의 눈동자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팍을 움켜쥔다.
둘의 시선에 당장에라도 심장이 멎어버릴 것만 같았다.
"...도와, 주세요. 제발."
안될 것을 알면서도 매달린다.
저 년한테 나를 넘기지 마. 제발, 도와줘.
옷자락을 움켜쥔 내가 작게 애원하자, 나를 안고 있던 엘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마법사와 엘프의 시선이 마주한다.
그렇게 몇 초, 허공에 마법진이 새겨졌다.
"죽이지는 않아, 죽이지는!!"
"정신 차려라, 에밀리!"
쏘아지는 불꽃과 동시에 엘프가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움직이는 신체에 몸이 삐걱거렸다.
스치듯 지나가는 열기에게서 아기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더더욱 웅크렸다.
"내가, 먼저야. 내가 먼저라고! 누구인지도 모를 애새끼보다, 스승님을 먼저 낳으란 말이야!"
붉게 충혈된 눈과 순간적으로 마주하자,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완전히 미쳐버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
희망을 가지고, 마지막의 순간에 그것을 잃었다가 다시 발견한 자의 눈은 상상 이상으로 미쳐있었다.
"짜증나, 짜증나, 짜증나... 대체 왜 그 년을 감싸는 건데? 응?!"
"아무리 봐도 죽이려는 목적의 화력이잖나. 스승을 부활시키는게 목적 아니었나?"
비명을 지르듯 외치는 마법사에 엘프가 답했다.
확실히, 나를 통해 스승의 부활을 이루려는 것 치고는 마법의 위력이 이상했다.
잿가루만 남기고 사라져버린 가구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어찌나 놀랐는지 조금은 지려버린 것 같기도 했다.
"아아, 생각이 조금 바뀌어서 말이야."
마법사가 양 팔을 쫙 펼쳐냈다.
상기된 양 뺨과 함께 괴상한 동작이 추가되자 한층 더 미친 년 같았다.
"굳이 몸 전체가 있을 필요는 없잖아? 그냥 자궁만 살려서, 고블린의 정액 같은 걸 주입하면 더 빠르게 낳을 수 있을 텐데."
안 그래?
열기를 띈 목소리 속에 잠든 악의에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지금, 뭐?
뇌둥둥이도 아니고 자궁둥둥이를 만들어 아기 낳는 공장으로 쓰겠다는 마법사의 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쳤구나."
"그래, 미쳤지. 미쳤고 말고. 스승님이 돌아가셨던 그 순간부터, 나는 미쳤었다고!"
이번에는 침대가 작살났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마법사의 공격을 피해내고는 있었지만, 아무래도 나를 품에 안은 상태에서 계속 피하는 건 조금 무리인 듯 싶었다.
그렇다고 나를 내려 놓으면, 어떻게 될까.
"활도, 화살도 없는 넌 내 상대가 아니야, 레이나. 그러니까 순순히 내놓는게 어때?"
"큭..."
길게 뻗어져 나온 사슬이 엘프의 다리에 감겼다.
뿌리치려는 듯 몇 번이고 다리를 굴렀지만, 마법으로 만들어진 사슬은 그녀를 더더욱 끌어당길 뿐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의 끈, 그 위에 올라타서는 불규칙적으로 숨을 토해낸다.
"헉, 허억, 흐어, 헉..."
죽기 싫어. 싫어. 죽어도, 그런 꼴로 죽고 싶지 않아. 싫어.
머릿속을 가득 물들인 공포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마법사에게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정신이 점점 박살나기 시작했다.
"그, 만..."
꽉 막힌 듯 아무런 소리도 토해내지 않는 목을 억지로 움직여, 단 두 글자를 내뱉는다.
피를 쏟아내는 심정으로 말을 꺼내자, 마법사의 눈썹이 비죽 솟아올랐다.
"최대한 빨리 낳을 테니까, 제발 그런 꼴로는 만들지 말아다오..."
엘프의 품에서 벗어나, 아기를 안은 채로 그대로 바닥에 엎드렸다.
자존심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죽지 못한다는 공포심에서 나오는 반사적인 굴종이었다.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흐응, 드디어 주제 파악을 좀 하는 것 같잖아?"
구둣발이, 내 정수리를 짓누른다.
기분 나쁠 정도로 절묘하게 조절된 압력에, 내 이마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신음을 흘릴 틈도 없이 잘근잘근 밟아오는 마법사에, 나는 그저 눈물을 뚝뚝 떨굴 뿐이었다.
"그러면 계약하자. 매일마다 아기를 낳기로. 하루도 빠짐없이, 네가 스승님을 낳을 때까지만. 응?"
"..."
"그렇게 한다고 약속하면, 자궁만 살려서 낳게 하지는 않을게."
마치 제가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듯 내뱉어지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더 이상의 선택지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렇게 되었어야 했어.'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눈물을 떨궜다.
원래부터 이런 게임이었잖아.
마왕은 언제나 능욕 당한 끝에 본인이 죽인 만큼 낳는 내용의 그런 스토리였잖아.
그 과정이 바뀌었을 뿐, 결과가 바뀌지는 않겠지.
"알, 겠ㅡ"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마법사의 제안을 승낙하려는 찰나였다.
"꺄악?!?!!"
머리 위에서 비명이 들려옴과 동시에 내 정수리를 짓누르던 무게감이 사라졌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리니, 나와 마법사 사이를 막아서듯이 선 뒷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용사?"
멍하니 상대를 부르니, 내쪽을 흘긋거린 용사가 그대로 자세를 취했다.
내가 아닌 마법사를 겨누는 검에,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위선자.'
구역질이 치밀어 오른다.
쓰레기 같은 새끼.
내가 헛구역질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마법사와 용사의 대치는 이어졌다.
"아서, 아서, 아서!! 대체 무슨 짓이야?! 설마 내가 마법약 좀 먹였다고 그러는 건 아니지?!"
"닥쳐."
저를 향해 쏘아지는 불덩이를 가볍게 잘라낸 용사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는 마법사를 향해 일갈했다.
싸늘하게 물든 목소리는 마치 처음 나를 만났을 때와 같았다.
"아아, 아서. 네가 그렇게 멍청하니까 이런 꼴이 난 거야. 이건 전부 네 잘못이라고!"
마구잡이로 마법을 난사해대던 마법사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제 광기의 이유를 용사에게서도 찾아낸 그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미쳐있었다.
"네가 소원만 제대로 빌었다면 이런 일 따위 벌어지지 않았어! 전부 네 잘못이야! 전부!"
그래놓고서는 마왕을 지켜?
하, 실컷 범할 때는 언제고 갑자기?
쓰레기 같은 새끼야,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네 마음대로 이 사달을 만들어 놨으니 나도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건데, 감히 방해를 해?
"흐앙, 흐아앙..."
아기가 우는 소리와 함께, 마법사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붉은 증오가 섞여 있는 그 한 줄기에 몸을 움츠렸다.
"부탁이야, 아서ㅡ 제발 비켜줘."
"안 돼."
마법사의 애원 섞인 부탁에도 용사는 단호했다.
깔끔할 정도로 잘려진 대답에 마법사의 표정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기습으로 인해 입은 부상 때문에, 더 이상의 싸움은 승산이 없었다.
"...네 마음대로 해."
힘 없이 중얼거린 마법사가 터덜터덜 방 밖으로 나섰다.
순식간에 해소된 긴장감에 숨을 토해내고 있자니, 용사 녀석이 나를 향해 진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그것마저 마음에 들지 않던 와중에, 눈앞의 빌어먹을 새끼를 엿 먹일 방법 하나가 불현듯 떠올랐다.
"엘프. 아니, 레이나. 내 이름이 무어냐고 물었었지?"
"..."
뜬끔없이 튀어나온 말에 둘의 시선이 요상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내 안중에도 없었다.
"아리엘."
용사와 엘프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일그러진 미소가 얼굴에 덧대어졌다.
"그게 바로 내 이름이야."
그래.
이건, 내가 너에게 거는 지독한 저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