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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47화 (47/342)

Chapter 47 - 눈먼 자들.(9)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용사는 부풀어 오른 좆을 감추고는 도망치듯 방 밖으로 떠났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우습던지, 용사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는 실소를 멈추지 못했다.

"콜록, 콜록!! 우웩..."

목구멍 속에 끈적히 달라붙은 정액이 역겨웠다.

마치 백색의 타르 같달까.

몇 번이고 토해냈는데도 불구하고 목구멍을 가득 채운 듯한 감각에 정신이 어지러웠다.

"배고프구나..."

한껏 토해내니 꼬르륵거리며 배가 울렸다.

마지막으로 먹은게 드워프가 만들어 준 스프였으니, 충분히 그럴 법 했다.

"...흐."

이딴 몸뚱아리가 되기 전에는 최소한 굶지는 않았는데.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 깊게 숨을 토해낸다.

...찝찝해.

하반신을 적신 소변과, 상반식을 물들인 정액.

그 최악의 조합에 기분이 나락까지 처박혔다.

"...일단은, 씻는 편이 낫겠지."

생각해 보면, 엄청난 몰골로 그냥 다녔었구나.

킁킁, 하고 냄새를 맡으니 진한 수컷 향기와 함께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우웩, 토할 것 같아...

물론 더 이상 토할 것도 없었지만.

"이 성은 정말이지 쓸데없이 넓구나."

욕실, 하다못해 화장실이라도 찾으면 좋으련만 있는 건 전부 방 뿐이었다.

대체 구조가 어떻게 되길래 죄다 침실 밖에 없는지 모르겠네.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조금씩 비틀거렸지만, 전신을 감싸는 찝찝함을 이겨내겠다며 어떻게든 버텨냈다.

"콜록, 흐, 콜록..."

벽에 몸을 기대며 마른 기침을 토해내자, 손바닥에 붉은 핏자국이 생겨났다.

피가 나올 정도로 격렬하게 박아대다니.

멍하니 그 검붉은 얼룩을 바라보고 있자니, 속이 매스꺼워졌다.

'좆, 씨발 그 좆 같은 좆...'

훌쩍이면 훌쩍일수록 정액 냄새가 진동을 해서, 결국에는 입으로 숨을 쉬기로 했다.

사람의 것이라기 보다는 짐승의 것처럼 진한 수컷 향기를 이 정도나 진하게 남겨두다니.

마치 이 몸뚱아리가 자신의 것이라 말하는 것 같아, 손발이 벌벌 떨렸다.

"여긴, 가..."

커다란 문을 미끄러지듯이 열자 넓은 욕탕이 눈에 들어왔다.

문을 닫을 생각도 하지 못한채 비틀비틀 걸어서는 그 중앙으로 가자, 물 한 방울 없이 텅 빈 욕조가 나를 맞이했다.

...확실히, 물을 채워놓지는 않았겠지.

'이걸 돌리면 물이 나오려나.'

이전 세계의 수도꼭지처럼 생긴 물건을 유심히 바라보며 생각에 빠진다.

괜히 이상한 걸 건드렸다가 험한 꼴을 당하는 것보다는 조심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그렇지만, 너무 찝찝하기도 하고.'

이 꼴을 한 채로 조금이라도 더 있으면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인간의 존엄성마저 사라질 것 같았다.

씻지도 않고, 온몸에 정액을 바른 채로 돌아다니면 그게 짐승이 아니면 대체 무엇일까.

쏴아아아...

"와아..."

수도꼭지를 돌리자마자 쏟아지는 물에 작게 감탄한다.

며칠만에 보는 깨끗한 물이더라.

마왕성 주제에 별게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욕탕의 가장자리에 몸을 기대어 앉는다.

"...후으."

욕탕에 들어오기 전에는 몸을 먼저 씻어야 하는게 예의였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늦어도 한참 늦어버렸다.

움직일 힘이 없다는 건 둘째로 치더라도, 뜨끈뜨끈한 물이 몸을 노곤하게 녹여대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졸리네.'

꾸벅꾸벅 졸다가,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린다.

어느새 주변을 가득 채운 새하얀 수증기가 마치 안개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마치 안개와 하나가 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천천히 눈을 감는다.

차라리 이대로 사라져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그렇게.

***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것 같았다.

요 며칠 동안에는 용사에게 범해지고, 성녀에게 희롱당하고, 마법사에게 두들겨 맞는 꿈만 꿨었기에 차라리 다행이었다.

한참을 탕 속에 담그고 있어서인지 흐물흐물 늘어진 팔을 슬며시 들어올리자, 손가락 끝이 쭈글쭈글해져 있었다.

"...대체 얼마나 여기에 있던 거지."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알고 싶으세요?"

"읏?!?!!"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너무 오래 앉아있어서인지 다리가 저려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까, 깜짝이야...

"팔자 참 좋으시네요. 그렇게 풀어진 얼굴로 헤벌레, 하고 있고."

"헤, 헤벌레라니 누가ㅡ"

시선이 마주한다.

성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안.

그 안쪽에 자리한 건 과연 누구의 정신인가.

"너, 설마..."

"눈치가 빠르시네요. 재미없게시리."

입꼬리가 찡긋 치솟는다.

한 순간에 귀여워진 얼굴이었지만, 그 속에 잠든 가학성은 결코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여신."

"딩. 동. 댕!"

와아, 하면서 박수를 짝짝 치는 것이 여간 과장스러운게 아니었다.

귓가에서 터지는 큰 소리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니,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더 진해졌다.

'반응하지 마. 반응하면 반응할수록, 더 괴롭혀질 뿐이야.'

시선을 피하고, 고개를 숙인다.

이런 부류의 일은 익숙하다면 익숙했기에, 최대한 신경쓰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제발 가. 그냥, 가주세요.

제발.

"온 힘을 다해서 무시하려는게 꽤 귀엽네요."

"..."

"그런데, 이래도 무시할 수 있으려나?"

은근한 목소리로 다가오는 질문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가 한 가지 간과하고 있던게 있다면, 상대는 인간이 아닌 신이라는 것이었다.

무슨 짓을 할지 예측할 수 없는, 그런 존재.

"커, 카, 아아아아아아아?!?!?!?!!!!"

"이크, 너무 심했나?"

날뛴다. 날뛴다. 날뛴다.

내 몸속에 잠들어 있던 여신의 파편이, 성녀가 치료 목적으로 퍼뜨렸던 신성력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세포 하나하나를 짓이겨댔다.

"아학, 하아악?!?!!!"

전기 고문을 당해도 이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겠지.

신성력의 칼날이 전신을 찌르는게 멈췄음에도 불구하고, 내 몸뚱이는 갓 잡은 활어처럼 펄떡이고 있었다.

"자, 이럴 때는 뭐라고 해야 하죠?"

"죄, 죄송합니다. 무시해서 죄송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죄송해요. 죄송ㅡ"

"옳지, 잘 했어요. 우리 귀여운 마왕님."

여신의 손길이 정수리에 닿을 때마다 흠칫 흠칫 놀란다.

그 모습마저 귀엽다는 듯 붉게 물들어가는 뺨에, 나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런데, 한 번 더 하면 어쩌려나 모르겠네?"

"윽..."

가학적으로 일그러지는 얼굴에 몸을 웅크렸다.

그만, 그만 해. 그만 해주세요.

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뭘 잘못 했다고.

네가 하라는대로 착실하게 아기도 낳고 있은데, 대체 왜?

"왁!!!"

"히약?!?!?!!"

갑자기 질러대는 소리에 요상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귀를 막으며 고개를 숙이니 손가락 틈 사이로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정말이지. 놀리는 맛이 있네요."

"히끅."

"오구, 딸꾹질까지 하시다니. 많이 놀라셨어요? 제가 조금 달래드릴까?"

히끅.

히끅.

히끅.

"대답."

"개, 갠차나, 히끅, 요..."

딸꾹질을 하며 대답를 하려니 혀를 깨물었다.

얼얼한 혀에 어버버 거리니 정수리에 다시 한 번 손바닥이 얹어졌다.

이 손, 손 좀 떼... 주시면, 안 될까요.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말이 목구멍 안쪽에서 소용돌이 쳤다.

"아, 그래. 이걸 하려고 빙의한게 아니었는데 말이죠?"

"..."

"그냥, 한 가지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 있어서 말이에요."

알려주고 싶은 사실이라니, 뭘?

또 어떤 거지 같은 이야기를 하려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여신을 바라보자, 제 머리카락을 빙빙 꼬기 시작하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성녀가 제 힘을 빌리면 빌릴수록, 제가 이 신체에 깃들기 쉬워진답니다. 정확히는, 성녀의 혼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제 혼이 채워진달까?"

"그 뜻은..."

"'또 다시' 허튼 짓을 했다가는, 더 험한 꼴을 당하게 된다는 뜻이죠. 우후후후♥"

여신의 말에 몸이 축 늘어졌다.

그것은 하나의 선고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전부 낳을 때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다는 족쇄.

심지어 내가 죽으려고 하면 할수록, 성녀의 신체가 빌어먹을 여신에게 빼앗긴다.

"아, 아으, 으..."

"그렇게 충격이셨어요? 죽지 못한다는게?"

거짓말이야, 거짓말, 거짓말.

내 앞에서 빙글 웃는 얼굴도 전부 환상일게 분명했다.

이건 꿈이야.

그냥, 지독할 정도로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거라고.

"정말 꿈이라고 생각하세요?"

성녀가, 성녀의 몸을 빌린 여신이 천천히 손을 뻗어 내 눈을 가렸다.

순식간에 시꺼멓게 변한 시야에 덜덜 떨고 있으니, 귓가에 상대의 웃음소리가 퍼져나갔다.

"헉, 흑, 하..."

공포심에 정신이 몽롱해진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희미해지고, 욕탕을 가득 채운 수증기의 감촉이 전신의 신경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나는. 나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물에 가쁘게 숨을 토해내는 순간이었다.

"부, 부그르르르륵?!?!! 푸하, 켁, 케헥?!?!!!"

입과 코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물에 퍼뜩 고개를 들어올린다.

잔뜩 풀려있던 몸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비명을 질러댔지만, 익사를 면하기 위한 발버둥이 우선이었다.

"켁, 콜록! 콜록, 콜록!!"

욕탕의 물이 넘쳐 흥건하게 젖은 바닥에 몸을 늘어뜨리고는, 거칠게 숨을 토해낸다.

꿈이었을까.

물방울 맺힌 천장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니, 그것들 중 하나가 내 눈가에 툭 떨어져서는 뺨을 타고 주욱 흘러내렸다.

"꿈이, 아니었어..."

몸 속 깊숙한 곳에 남아있는 신성력의 조각이, 내 하복부를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앞으로도 열심히 힘내서 낳자구요~'

죽지 말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여신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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