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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49화 (49/342)

Chapter 49 - 눈먼 자들.(11)

얼렁뚱땅 넘어가기에는 본 눈이나, 들은 귀가 많았다.

순식간에 몰려버렸지만, 내가 감히 뭐라고 반박할까.

싫다고 외치면 외칠수록 쓰레기가 되는 건 이쪽이었다.

"...마음대로, 해라."

한 마디를 툭, 내뱉고는 입을 꾹 다문다.

언젠가 보았던 설정들 중, 마족의 뿔에 대한 내용을 떠올렸다.

'마족은 뿔이 꺾이면 굉장이 약화되며, 동시에 고통스러워 한다.'

단 한 줄의 서술.

얼마나 약해질지, 그리고 그 고통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별로 유쾌한 기분은 아닐 터였다.

...그 정도나 많은 마족들을 죽여왔으니 분명 저 녀석들은 알고 있겠지.

"그러면, 누가 자르는게 좋을까?"

마법사가 신이 잔뜩 난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품 안에서 작은 줄톱 같은 걸 꺼내드는 꼬라지를 보니 저절로 속이 튀틀렸다.

분명 마법 재료를 얻을 생각 만반이겠지, 빌어먹을 년.

"특별히 직접 고르게 해줄게. 어때?"

"..."

마법사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돌린다.

일단 이 년은 아니야.

드워프라면 손재주가 좋으니 조금 정도는 아프지 않게 자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내 아이를 빼앗아간 놈에게 뿔까지 빼앗기기는 싫었다.

그렇다고 성녀는...

'그 빌어먹을 여신이 또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몸이 부르르 떨렸다.

이 정도면 그냥 자르지 않겠다며 버티고 싶었지만, 그걸 그냥 두고 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나마 성녀가 안절부절 못하고는 있었지만, 전투 능력이 제일 뒤떨어지는 스펙으로 다른 녀석들을 막기란 요원하겠지.

"...레이나."

"칫."

내가 엘프의 이름을 부르니, 마법사가 전부 다 들리도록 혀를 차냈다.

안타깝다는 듯한 얼굴 뒤로, 괴롭히지 못해서 아쉽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빌어먹을 년.

"정말 나에게 맡겨도ㅡ"

"...아기를 부탁한다."

저번과 같은 선택이었다.

애초에 뿔을 자르면서 무슨 고통을 느낄지도 몰랐다.

...그런 추한 꼴을 아기에게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

조금 전과 같은 이유로, 아기를 맡길 수 있는 사람 또한 엘프가 유일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하는지 모르겠네...'

기분이 울적해졌다.

아기를 실험체로 쓸 것 같은 마법사.

내 아기를 두 번 빼앗아가게 놓아둘 수 없는 드워프.

아기를 가지고 협박할 것 같은 여신ㅡ 이 깃들수도 있는 성녀까지.

아주 대단하신 조합이었다.

어찌나 대단한지 입에서 절로 욕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흐으응, 흐으..."

"쉬이, 조금만 있다가 다시 올 테니까 울지 말고 얌전히 있거라."

내 품에서 떨어지자마자 칭얼거리기 시작하는 아기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린다.

절대 그 언니한테 떨어지지 말고, 알겠지?

몇 번이고 되뇌어, 아기가 안정을 되찾을 때 쯤에서야 고개를 돌렸다.

"..."

"..."

내 황금빛의 눈동자와 용사의 녹색의 눈동자가 교차한다.

서로를 담아, 서로를 비추는 시선 속에 담긴 건 과연 무엇일까.

'내가 증오하는 건 이 녀석 하나로도 충분해.'

아프게 된다면, 차라리 용사의 손에 아프는게 나았다.

내 안에 있는 용사를 더더욱 구제불능의 인간 쓰레기로 만들어, 이 증오를 절대로 후회할 수 없게.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큭..."

먼저 시선을 피한 건 다름 아닌 상대였다.

얼마 전까지는 좋다고 강간하던 주제에, 이제는 뭐가 그렇게 꺼려지는지 시선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놈.'

하지만 용사의 고간에 달린 좆.

그 거대한 좆 만큼은 나를 향해 욕정해서는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때가 된다면 분명 짐승처럼 나를 덮쳐오겠지.

어떠한 죄책감도 없이. 그저 단 한 순간의 쾌락과 나의 임신을 위해, 그렇게.

"차라리."

내게서 완전히 몸을 돌린 용사의 입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구보다 힘든 건 나인데, 왜 네가 힘든 척을 하는 거야?

어이가 없음에 속이 타올랐지만, 겉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차라리 내가 아기를 맡을 테니까ㅡ"

"...뭐?"

아니, 내뱉지 않으려고 했다.

내뱉지 않으려고 했는데, 대체 이 씨발 새끼가 뭐라고 하는 거야?

"지금, 뭐라고 했지?"

목소리가 덜덜 떨린다.

분노를 버티다 못해 잘게 경련하는 몸뚱이에 턱이 딱딱 부딪혔다.

지금 뭐라고?

뭐라고 했어?

차라리, 내가, 아기를, 맡겠다고?

"...내가 아기를 맡겠다고 했어."

"하."

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좆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하고 있어.

"네가, 아기를 맡겠다고?"

죽이려는게 아니라?

결국에는 참지 못했다.

나를 모욕하고, 짓밟고, 괴롭히고, 때리고, 강간하는 건 참을 수 있어.

죽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지만, 버틸 수 있다고.

'그렇지만.'

아기는, 아니지.

네가 아기를 맡겠다는 말을 하면 안 되지, 이 양심 없는 새끼야!!!!!

"헉, 흐, 흣......"

분노가 하나로 뭉쳤지만, 너무 거대한 끝에 말이 되지 못하고 그대로 목구멍에 꽉 막혀버린다.

내뱉어. 내뱉어야 해.

저 양심도 없는 쓰레기 새끼한테 외쳐야 한다고.

목덜미가 조여지는 듯한 감각에 순간적으로 숨이 멎었다.

하지만,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따위는 나에게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레이나, 아기를ㅡ"

나의 침묵을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용사가 엘프의 품에 안긴 아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잠시의 순간.

그 순간이 어찌나 길게 느껴지던지,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크게 든 생각은ㅡ 그래.

"손 대지마!!!!!"

아기의 몸에 손이 닿기 직전, 용사의 움직임이 우뚝 멈춰선다.

"내 아기, 내 아기한테 손 대지 말라고!!"

무슨 낯짝으로 그렇게 뻔뻔해?

너 때문에 죽을 뻔한 아기잖아.

그런데 겨우 내 뿔을 자르기 싫다고 그딴 선택을 한다고?

"...마왕."

"흐, 흐아, 흑..."

용사의 팔을 쳐내고는 엘프의 품에 안긴 아기를 되돌려 받는다.

아기가 뱃속에서 나오기 전부터 죽이려 들던 놈이, 이제와서 무슨 바람이 불었다고.

저딴 놈한테 아기를 맡기느니 차라리 아기를 안은 채로 뿔이 잘리는게 나았다.

"네, 네가 자르거라."

"..."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잘라라. 용사."

너도 알고 있잖아, 응?

***

에밀리의 약에 당해, 본능만으로 움직이던 제 몸뚱이에 강간한 마왕과 그 뱃속에 있던 아기.

아무리 마왕이 낳은 아기라고는 해도,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건 마왕의 아기가 아니라 마왕군에 희생된 누군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런 존재를 죽일 뻔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용사인 자신이.

"내 잘못이 아니었어......"

후회라는 감정이, 이토록 끔찍할 수가 있었나?

마치 전신에 구더기가 붙어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심장을 옭죄는 건, 다름 아닌 마왕의 이름이었다.

아리엘.

절대 잊을 수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그 이름.

"이건 전부 나를 혼란스럽게 하려는 마왕의 계략이야..."

반드시 그래야만 해.

하지만, 진짜라면?

아니, 이미 진짜라고 생각하잖아.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은 용사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아서, 왜 나를 죽였어? 싫다고 말했는데, 왜 억지로 범했어?'

그래, 그 말을 들은 이후로부터 고통스럽던 잠자리가 더더욱 고통스러워졌더랬다.

마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원래의 꿈에서는 제 아래에 깔려 비명을 지르는 마왕만이 나왔건만, 지금은 그 이상으로 끔찍해졌다.

'아파, 아파! 아파아파아파아!!!! 살려줘, 아서! 아서! 아서!!!'

이명이 울렸다.

어지럽게 물드는 머리통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다.

내가 그런게 아니야.

그건 마족이 한 짓이라고.

아리엘을 죽인 건, 아리엘을 강제로 범한 건 내가 한 짓이 아니야.

'이제는 용사님이 마왕 같아요.'

엘리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와 동시에, 제 눈앞의 광경이 뒤바뀌었다.

마족에게 강제로 들어올려져, 가랑이 사이에 그 흉악한 좆을 삽입 당하는 소꿉친구의 모습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래.

'왜 그런 거야, 아서?'

소꿉친구를 범하고 있는 마족의 얼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용사 자신의 것이었다는 점일까.

"으, 으으으으으으으......"

괴상망측한 신음 소리가 방 안에 가득 퍼진다.

단탈리온과 자신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떠오르고, 아리엘과 그녀의 이름을 한 마왕의 얼굴이 번갈아가며 점멸한다.

아리엘, 마왕, 아리엘, 마왕, 아리엘, 아리엘...

아리엘.

"내가 한 짓이 아니었어, 내가..."

본인이 미쳐가고 있는 건지, 세상이 미친 건지 구별할 길이 없었다.

이 와중에도 부풀어 오른 좆이 지금 당장 달려가서 마왕을 임신시키라고 외치고 있다는게 우스울 따름이었다.

...차라리 잘라버릴까.

멍하니 떠오른 생각을 억누른다.

마왕을 임신시킬 수 없게 된다면, 아리엘을ㅡ 소꿉친구를 되살릴 수 없게 될 테니까.

'...어쩌면, 그게 마왕이 노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차라리 마왕의 말이 전부 거짓이라고 믿는게 나았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제 역린을 헤집어 놓은 마왕을 향해 분노하는 편이 가장 현명한 선택일 터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

충분이 마왕의 안에 제 물건을 박아 넣을 수 있는 상황에서도, 용사는 아래쪽을 막는 것이 아닌 위쪽을 막는 것을 택했다.

단순한 변덕일지도 몰랐다.

그냥 그때는.

아니, 지금도 마찬가지로 마왕에게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신이 아기를 맡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런데 어째서.

"네가 자르거라."

"..."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잘라라, 용사."

나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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