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0 - 눈먼 자들.(12)
단 둘만 방에 있는 건 이제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꿰뚫고 꿰뚫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르고 잘리기 위해서라는 점이 달랐지만서도.
"무얼 그리 꾸물거리고 있는 것이냐."
"..."
"한심하구나."
짧은 도발을 날렸음에도 불구하고, 용사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억지로 떠밀리듯 들어왔지만 본인이 직접 뿔을 자르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이제와서 착한 척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하지만 녀석이 한 가지 간과하고 있는게 있다면, 이런 모습 따위는 본인을 더욱 더 역겨워 보이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그딴 짓거리들을 잘도 해댔으면서...'
악인이 뉘우치고, 회개하여 선인이 되는 전개 따위보다는 악인은 끝까지 악인인 채로 남는 편이 더 나았다.
용사가 악인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말이었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악마보다도 더 악마 같은 놈이었다.
"자, 빨리 해라. 어서!"
용사의 손을 움켜쥐고는 그대로 내 뿔 위에 얹었다.
...힘 없이 딸려오는 팔에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건 대체 왤까.
그런 상대를 바라보며 표정을 와락 구겨도, 용사는 반응이 없었다.
"나를 벨 때는, 잘도 베지 않았느냐."
용사의 귓가에 속삭인다.
그와 가장 처음 만났던 순간, 여신이 얼마나 쓰레기인지 증명하기 위해 생겨났던 깊은 상처.
아무렇지도 않게 칼날을 휘두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망설인단 말인가.
"자, 어서. 시간이 아깝구나."
뿔을 들이댄다.
멍하니 서 있던 용사가 마치 떠밀리듯이 제 허리춤에 매여져 있던 성검을 뽑아들었다.
그 창백한 칼날 위에 묻은, 아직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에 잠시 소름이 돋아났다.
"...큭."
뿔에 성검이 닿아, 조금 파고든 순간 고통이 몰려왔다.
아파, 아파, 아파...
머리뼈를 부수는 듯한 감각과 함께, 온몸의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이, 이 정도로 아플 줄은, 몰랐는데.'
뇌를, 천천히 깎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마족의 상징. 마족의 혼.
천천히 잘려지는 뿔의 감각을 마음껏 느끼며, 손톱으로 허벅지를 꾹꾹 짓눌렀다.
"흑, 흐극..."
뿔이 내 머리에서 떨어져 나갈 쯤에는 정신이 반쯤 날아갔지만, 어떻게든 버텨낼 수 있었다.
용사 놈이 나를 강제로 범할 때보다는 나았다.
그 어떠한 고통과 괴로움도, 그것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
주륵.
"괜찮ㅡ"
"빨리, 자르기나 해라."
어지럽다 싶었는데, 코에서 핏줄기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괜찮냐고 물어보기에는 이미 늦어도 한참이나 늦었어.
바닥에 떨어진 뿔을 조심스레 집어들고는 용사의 면상을 노려본다.
잘라.
이제 하나 남았잖아?
"아니면, 내 손으로 직접 잘라주기를 원하는 건가?"
용사가 들고 있는 성검을 붙잡아, 나머지 뿔 하나에 가져다 댄다.
고통으로 인해 감각이 곤두서서 그런지, 내 뿔이 어디에 있는지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 떨림은 과연 나의 것일까, 아니면 용사의 것일까.
쓸데없는 생각에 실소가 터져나왔다.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잖아.
"아, 으극... 흑..."
성검의 칼날을 붙잡아 꾹 누르자, 약간의 저항감과 함께 드득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머릿가죽을 벗기고, 뇌를 바늘로 마구 찌른 다음 통째로 익혀서 칼로 난도질 하는 듯한 감각이었다.
"쿠흡, 흑, 흐으..."
구역질이 솟아오른다.
누군가가 내 머리통을 붙잡고 마구 흔든 것처럼 세상이 이리저리 일렁였다.
목구멍까지 솟아오른 덩어리를 억지로 삼켜보려고 했지만, 결국에는 삼켜내지 못했다.
"...마왕!"
"......"
피를 토한다. 토하고, 계속 토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자르지 않겠다며 버틸 걸 그랬나.
바닥에 떨어져 있던 뿔을 집어들어 실실 웃어보이니 용사가 내 어깨를 붙잡아왔다.
우습게도, 그 손길이 별로 아프지 않았다.
"괜찮아?! 피가 계속 나고 있잖아!"
"...흐."
피가 계속 나겠지. 그래, 엄청나게 나겠지.
뿔을 자른 단면에서 흘러내리는 피와, 코와 입에서 쏟아지는 피.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머리통 전체에 피칠갑을 한 미친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 그게 뭐가 어때서?
'내 잘못이 아니잖아.'
그래, 이건 내 탓이 아니야.
이 모든 건, 이 녀석의 탓이라고.
입꼬리를 끌어올린다.
고통을 버티다 못해 비명을 지르며 땅 위를 기어다니고 싶었지만,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인다.
"자, 네가 원하던 것이다."
잘려나간 뿔 두 개를 양손으로 받들어, 용사에게 내밀어 보인다.
핏자국이 덕지덕지 들러붙은 자그마한 파편이 그 녹색의 눈동자에 내리꽂혔다.
"나, 나는... 이러고 싶지 않았어."
변명이야.
"내가 원하던 건 이런게ㅡ"
더러운 변명이라고, 흐.
"용사."
눈동자를 덜덜 떨고 있는 상대의 멱살을 움켜쥔다.
가볍게 털어내면 힘 없이 나가떨어질 정도의 연약함이었지만, 용사는 내 손길을 떨쳐내지 못했다.
오히려 내 손이 그 무엇보다 질기고 단단한 구속이라는 듯 몸을 뻣뻣하게 굳힐 뿐이었다.
"아서."
이름을 부른다.
내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오자마자 고개를 퍼뜩 들어올리는 꼴이 우스워 웃음이 멈추지를 않았다.
"내 뿔을 두 개 가져갔으니, 내가 원하는 것을 두 개 들어다오."
말도 안되는 억지였다.
지금처럼 반쯤 정신이 날아가기 직전이 아니었다면 이쪽에서도 말을 꺼내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만큼은 통한다.
이렇게 망가진 나와 용사라면, 그 어떠한 억지라도 충분히 통할 수 있게 될 터였다.
"자아, 잘 받아야지. 그러다가 떨어뜨리면 애써 자른 보람이 없지 않은가."
용사의 손을 억지로 움켜쥐고는, 그 손아귀에 잘려나간 뿔을 쥐여준다.
이제 네 것이야.
피투성이가 된 뿔이 용사의 손을 붉게 물들였다.
"나를 이름으로 불러줘."
후두둑, 하고 핏방울이 떨어진다.
새하얀 바닥에 꽃 피우는 선혈빛이 눈을 따갑게 찔러왔다.
어서 불러. 어서 부르라고.
내 이름을 알고 있잖아. 설마 이제 와서 모르는 척 할 생각이야?
"아, 큭..."
"부르지 못하겠다면 다시 붙여 놓거라. 다른 녀석에게 잘라달라고 할 테니."
그런게 가능할 리가.
이미 잘려지고, 부러지고, 조각난 것 따위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냥 밀치고 도망치는 것만으로도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텐데, 정말이지 멍청한 녀석이구나.
"아리엘."
마치 목이 졸리고 있는 사람처럼 한 마디를 내뱉은 용사가 입을 꾹 다물었다.
묵언 수행을 하는 사람처럼 굳게 닫힌 입술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화사하게 웃어보였다.
아직 하나 더 남았잖아.
"한 번 더."
"...아리엘."
잘했어.
귓가에 들려온 두 번째 부름에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아.
"너..."
"아, 하하..."
여기까지가 한계였다는 듯, 힘이 쭉 풀렸다.
무릎을 꿇은 상태로 용사의 멱살을 잡고 있으니 마치 매달리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버렸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 뿐이었다.
...이딴 설정 만든 새끼들, 다 뒤져버리라지.
팔과 고개를 동시에 떨구니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핏덩이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마... 괜... 신... 려..."
용사가 무어라 외치며 손을 뻗는 것 같았지만, 내가 바닥에 널브러지는게 더 빨랐다.
'아.'
이번에는, 진짜 죽을지도.
***
"아아, 아쉬워라..."
창 밖을 바라보던 에밀리가 탄식을 내뱉었다.
마족들의 뿔은 마법사들에게 있어서 유용한 소재나 다름 없었다.
심지어 다른 잔챙이 마족들도 아닌 마왕의 뿔이라니.
"진심으로 안 아프게 잘라줄 의향이 있었는데 말이야..."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약물 따위는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약간의 부작용이 있기는 했지만, 맨 정신으로 뿔을 자르는 것보다는 낫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마족들 중, 뿔이 잘리면서 제정신이었던 녀석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
아니, 그마저도 뿔이 잘리고 나서는 미쳐 날뛰었었지.
"그, 그걸 그냥 자르신거에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말리지 않다니.
하, 웃기지도 않아서.
"...엘리, 치료를 부탁해."
"...알겠어요."
아서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은 마왕의 머리 위가 텅 비어있었다.
설마 했는데 마취도 없이 뿔을 잘라낼 줄이야.
뿔을 자르는 녀석이나, 뿔을 잘려지는 녀석이나 하나 같이 정신 나간 년놈들이 틀림 없었다.
"굳이 신성력을 쓸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턱을 괴고 있다가, 신성력을 불어넣으려는 엘리를 말린다.
마침 시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마왕이 마족인 이상에야 신성력에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을 리가 없었다.
"에밀리, 당신 또ㅡ"
"이번에는 그런거 아니니까, 비키지?"
코웃음을 친다.
마족을 신성력으로 치료하는 걸 진심으로 '친절'이라 믿는 걸까?
이 순진하고도, 너무 순진해서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성녀님께서는 아직까지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변덕스러운 내가 해주는 간만의 친절인데, 조용히 받아들이기나 하지?
"자, 정신이 드니? 앞이 보이기는 해?"
마왕의 뺨을 툭툭 치니 주변에서 무어라 무어라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었다.
뿔이 잘린다고 죽지는 않아.
그저, 마족이라는 정체성을 잃음과 동시에 큰 충격을 받는 것 뿐이지.
"...으."
"좋아, 멀쩡하게 살아있네."
죽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됐다.
팔이 하나 없어도, 다리가 하나 없어도 살아갈 수 있는게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었으니까.
하물며 그게 겨우 뿔일지언데, 그렇게나 쉽게 죽을 수 있을 리가.
"자, 마시렴."
그 고통을 끝내줄, 아주 좋은 약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