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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51화 (51/342)

Chapter 51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1)

"...아."

눈을 뜨자마자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 본다.

여기가, 어디지?

아니, 그보다 내가 왜 쓰러져 있었더라.

"윽..."

지끈거리며 닥쳐오는 두통이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뿔을 잘라야 한다고 해서 뿔을 잘랐었지.

원래라면 뿔이 있었을 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깔끔하게 잘린 단면이 느껴졌다.

"...으."

소름이 오소소 돋아나는게, 마치 피부가 벗겨진 곳을 꾹꾹 눌러대는 것만 같았다.

지금도 상태가 정상은 아니었지만, 뿔을 자를 무렵보다는 괜찮아져서 다행이었다.

아프기는 죽을 만큼 아팠지, 그거.

"아기는?! 옆에 있구나..."

내 옆에 누워서는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기의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다른 녀석들이 데려가서 이상한 짓이라도 했으면 어쩌지, 싶었는데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 녀석들이 뭘 했던 아기만 무사하면 됐다.

나는 상관 없으니까, 아기 만큼은...

스스로의 정신 상태가 점점 괴상해지고 있다는게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내가 이렇게 불행하니, 아기 만큼은 행복해도 되겠지."

좋게 생각하자.

마키나 그 아이도 결국 제 아빠의 품에 안겼으니 해피 엔딩이잖아, 응?

아기를 빼앗긴게 아니야. 아기가 원래 있어야 할 곳으로 가게 된 거지.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

"너도 언젠가는 나를 떠나가겠지."

분명 그렇게 되겠지만, 제발 천천히 가다오.

나는, 네가 조금이라도 내 곁에 오래 있어주면 좋겠단다.

"...마왕 씨, 괜찮으세요?"

"성녀."

아기의 뺨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있자니, 옆에서 성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이야.

온 줄도 몰랐는데, 대체 언제 온 거야?

"뿔은 조금 괜찮으세요? 피가 엄청 많이 나셔서 걱정했다구요..."

"덕분에 괜찮다."

분명 또 신성력을 사용해서 나를 치료한거겠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코에서 피를 쏟고, 입에서 피를 토하던 내가 이 정도로 멀쩡해질 수 있게 된 건 분명 성녀 덕분인이 틀림 없었다.

아니, 틀림 없다고 생각했었다.

"사실 그건ㅡ"

"틀렸어."

우물쭈물거리며 입을 여는 성녀의 목소리 뒤로, 날카로운 한 마디가 심장을 파고들었다.

삐걱거리며 고개를 돌리니, 기분 나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마법사의 얼굴이 보였다.

"너를 치료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니라, 바로 나거든."

"..."

"마음껏 감사하다고 말해도 좋아."

당황했음에도 불구하고 입에서는 고맙다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개미가 기어가는 듯한 크기로 말해서 그런지 한쪽 눈썹이 치솟아 있었지만, 딱히 해를 끼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나저나, 다음 아이는 언제 가질 생각이야?"

"...뭐?"

태연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몸이 바짝 굳는다.

아이를 가진다는 건 곧 용사에게 범해져야 한다는 뜻.

생각만 했을 뿐인데 바퀴벌레가 온몸을 돌아다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미친 년.

"아, 아니... 최, 최대한 빨리 하도록 노력 할 테니까..."

순간 벌겋게 물드는 눈동자에 겁을 집어먹었다.

누구 하나 태워 죽일 기세로 나를 바라보던 마법사가 내 대답을 듣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기대하고 있을게."

"..."

저 기대가 무엇을 향한 기대인지 정도는 쉽게 예상이 갔다.

내가 다음에 낳을 아기가 제 스승이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그게 마음대로 됐으면 진즉 했지.'

방을 나서는 마법사의 뒷모습을 마구 노려보다가, 한숨을 푹 내뱉었다.

깨어나자마자 별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들으니 머리통이 징징 울려댔다.

"일단은 왕도로 가기로 했어요."

성녀가 말했다.

마왕군이 전멸했다는, 그리고 마왕이 처단 되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마왕을 데리고 가서는 마왕군과 마왕을 처죽였다는 보고를 올리다니, 하.

악취미도 이런 악취미가 있을 수 없었다.

"고르돌 씨는 고향 마을로 떠난다고는 하셨는데, 길은 같으니 일단은 같이 동행한다고 하셨고요."

혼자만 가는게 아니라 아이를 데리고 가겠지.

내 허락 따위 없이.

그저 마음 가는 대로, 그렇게.

"이제는 전부 끝났으니까, 이게 마지막 여정이에요."

여정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이건 그저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의 에필로그 같은 것이었으니까.

마왕은 쓰러졌고, 모든 이들이 행복하게 살았다는 그런 결말이었다.

아니, 그런 결말이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지.

"마왕 씨는 역시 용사님과 함께 가시겠죠?"

"...아무래도 그렇게 되겠지. 용사가 나를 놓아줄 것 같지도 않으니까 말이다."

함께 간다기보다는 소유물처럼 잡혀간다는게 옳은 말이었다.

내가 그 녀석에게 벗어날 수 있는 건 나머지를 전부 다 낳은 뒤가 되겠지.

아득한 미래를 상상해봐도 떠오르는 건 딱히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계속 되는 것보다는 희망적이었다.

'...돌아가면 다시는 이딴 게임 쳐다보지도 않는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이딴 병신 같은 게임은 삭제 해버리겠다고 마음 먹는다.

이 정도 목표도 가지지 않는다면, 정말 의미 없이 범해지기만 하다가 결국 망가질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망가졌을지도 모르지..."

"네?"

"아무것도 아니다."

망가진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

붉은 선혈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당장에라도 성검을 놓칠 것 같았지만, 몸에 새겨진 버릇이 절대 칼자루를 놓지 못하도록 내 손목을 옭아매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칼날이 마왕의 뿔에 반쯤 파고들었을 때 흘러나오던 핏줄기가 그토록 선명할 수 없었다.

코에서, 입에서, 머리에서, 상반신이 끈적해질 정도로 피를 쏟아내는 마왕을 앞에 두고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자, 네가 원하던 것이다.'

머릿속에 피투성이의 미소가 선명히 새겨졌다.

피로 물든 제 뿔을 받들어, 나를 향해 내미는 그 손길이 지금도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듣고 있었지.

받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 쥐여주던 손길을 떠올리며, 용사가 고개를 숙였다.

'아서.'

'나를 이름으로 불러줘.'

마왕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도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건 저주였다.

심장에 새겨, 천천히 죽여나가는 가장 악질적인 독.

그 어떠한 마법적 처리도 없는, 말로써 이루어지는 가장 치명적인 저주였다.

'아리엘.'

세계가 깨져나간다.

제 품에 안겨 있던, 이미 죽어버린 세계에 길다란 금이 생겨났다.

대체 바라는게 뭐야.

대체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뭐야.

'이제는 용사님이 마왕 같아요.'

고뇌하고 있던 그의 머릿속에, 다시 한 번 엘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죄를 지었기에 받는 업보겠지.

하지만 그 죄악은 제 소꿉친구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절대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여기서 멈추게 된다면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지게 된다.

지금까지 해왔던 모든 죄악들이, 그저 죄악으로 남게된다는 뜻이었다.

"용사님."

"...엘리."

지금까지의 여정이 잘못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소중한 이들을 되살리고, 사악한 마족들을 처단하기 위한 여행길.

엘리를 만나고, 고르돌을 만나고, 레이나를, 에밀리를 만나고...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어."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내심 깔끔하고 행복한 결말을 원하고 있었기에, 마왕을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올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옛날 이야기 속에서, 부모님이 들려주신 전설에서, 그리고 나의 상상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이 이야기의 끝에 찾아오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모르겠다면."

힘 없이 내뱉어진 질문에, 엘리가 운을 띄웠다.

"천천히 되짚어가면서 고쳐나가면 되는거 아닐까요?"

가장 정석적이고, 이상적인 답변이었다.

자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으면 하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이상이란 현실과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이상이었다.

"...나는."

품 안에 넣어두었던 마왕의 뿔이 서로 부딪혀 절거럭거렸다.

그 소리가 마치 비웃음 소리처럼 들려, 용사가 두 눈을 꾹 감았다.

"그렇다고 평생 나쁜 사람으로 있을 수는 없잖아요."

모든 이들에게 용사라고 불렸던 존재가 마왕에게만큼은 나쁜 사람이 된다라.

당연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나는, 모두를 되살리겠다고 맹세했어."

그녀의 임신과 출산만으로만 다른 이들이 돌아온다면, 그는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용사ㅡ 아스테리아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지금까지 만나왔던 모든 이들에게 한 약속이었기에.

"마왕 씨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게 아니에요, 용사님."

"그러면, 내가 어떻게 해야 되는데?"

반사적으로 물음이 튀어나갔다.

엘리의 눈동자에 비친 건, 간절히 매달리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마치 죄인이 여신님의 석상 앞에서 제 죄를 고하듯이, 그렇게.

"엄청나게 간단해요."

엘리의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졌다.

순식간에 다가온 입술이, 용사의 것과 맞닿기 직전 초승달처럼 비죽 솟아올랐다.

제 얼굴을 스치듯 지나가 귓가에서 멈춘 상대의 입술에, 용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왕과 교접할 때, 그녀를 기분 좋게 만들면 되는 거에요."

관능적인 속삭임이, 용사의 귓가를 통해 뇌로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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