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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52화 (52/342)

Chapter 52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2)

나를 방에 혼자 뒀을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는데.

"..."

"..."

아기를 품에 안은 상태로, 상대를 흘긋 바라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유쾌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봐, 지금도 똥 씹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잖아.

"왜, 나를 범하러 온 건가?"

"...!!"

무심하게 튀어나간 한 마디에 용사가 몸을 퍼드득 떨었다.

이제는 입장이 역전되었구나.

발정난 개새끼처럼 달려들던 녀석이, 이제는 머뭇거리며 주변을 맴돈다.

그 꼴이 너무도 꼴 보기 싫어, 차라리 빨리 범하고 꺼져줬으면ㅡ 따위의 생각을 해댔다.

"소꿉친구를 살릴 마음이 없나 보구나."

반쯤 이죽거리며 내뱉었다.

그래, 차라리 그 편이 낫겠지.

누군가가 본다면 나에게 피학 성향이 있는게 아니냐며 물을 것 같았지만, 글쎄.

지금 나에게 있어서는 용사와 같은 장소에 있는 것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차라리 빨리 범해지고 빨리 보내버리는 편이 낫지, 하루 종일 붙어있기에는 내 비위가 상대의 것보다 훨씬 약했다.

"...마왕."

"왜 그러지?"

무슨 일인지 싸구려 도발에 응하지 않은 용사가 나를 불렀다.

미지근한 반응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상대가 천천히 시선을 마주해 왔다.

"너는, 그걸로 괜찮은 거야?"

멍청하긴.

괜찮을 리가 없잖아, 쓰레기 새끼야.

"네가 원하지 않았느냐."

집요하게 노려본다.

용사의 몸 속에서 펄떡펄떡 뛰고 있을 심장 쪽에 계속해서 시선을 던진다.

그 속에 양심이라는 것이 있다면, 뾰족하게 다듬어져 심장을 찌르고 죽어버리라지.

"자, 빨리 하고 끝내자꾸나."

곤히 잠든 아기를 품에 안고는 자리에 누웠다.

너 따위와 더 이상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제스쳐였다.

동시에, 빨리 끝내고 꺼지라는 뜻이기도 했다.

"...큭."

포기를 한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범할 생각인지 용사가 결국 제 좆을 꺼내들었다.

그 거대한 물건을 보기만 해도 몸이 덜덜 떨려오는 것이, 아무래도 겁을 먹어도 단단히 집어먹은 듯 싶었다.

'이, 이딴 꼴이 될거면서 잘도 태연한 척을 했구나.'

그래, 마음가짐 하나 바뀌었다고 두려운 것이 두렵지 않게 되는 건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속이 울렁일 정도로 무섭다.

용사가, 용사의 좆이, 그리고 그 좆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게.

"빠, 빨리 넣거라..."

돌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해.

목표를 떠올린다.

그래, 돌아가서 이 빌어먹을 게임을 바로 삭제해야지.

"흑?!"

전혀 젖지 않은 균열 안으로 용사의 물건이 쑤셔박혔다.

평소와는 다르게 천천히 집어넣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고통에, 반사적으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괜찮ㅡ"

"허리나, 흔들어라."

네가 뭐라고 나를 걱정해.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는 용사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큽, 흡, 흐, 흣......"

비명이 되지 못한 숨소리가 방 안에 내려앉았다.

남녀 간의 관계가 이토록 무정하고, 무거울 수 있다니.

섹스를 단순한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었기에 벌어지는 상황이었다.

뷰르르르릇...

"하아, 흐, 하......"

단 한 방울도 젖지 않은 질내에 용사의 정액이 쏟아졌다.

마치 오물을 집어넣은 듯한 혐오감이 아랫배를 쿡쿡 쑤셔댔지만, 억지로 눈을 감아 어떻게든 참아냈다.

더러워. 그리고 기분 나빠.

돼지의 정액도 용사가 싸지른 것보다는 깨끗할 터였다.

아니,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돼지에게 있어서 실례겠지.

"아직 부족한가?"

"...아니."

용사가 여전히 부풀어 오른 좆을 제 바지춤 속으로 집어넣었다.

가랑의 사이를 물들이는 끈적함도 역겨웠지만, 가장 역겨운 건 바로 용사의 표정이었다.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억지로 한 사람의 얼굴.

'하, 웃기지도 않아서.'

방 밖으로 나가는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가, 침대보를 주욱 잡아당겨 정액 범벅이 된 허벅지를 닦아냈다.

이대로 또 아기를 가지게 되는 걸까.

용사와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고.

섹스를 하고, 임신을 하고, 아기를 낳고.

대체 얼마나 반복해야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번이 세 번째구나."

드디어 세 번째.

뒤집어 말하자면 겨우 세 번째.

아득히도 많이 남은 숫자를 두고, 감히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대로만 하자, 라고.

***

이 정도로 의욕 없는 섹스가 존재할 수 있을까.

호흡도, 시선도 마주하지 않는 이 관계를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하면 좋을까.

그 누구도 답하지 못할 질문에, 용사가 깊은 숨을 토해냈다.

"여기에 있었군, 용사."

"...레이나 씨."

익숙한 말투에 순간 몸을 굳힌 용사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자연의 색과 같은 싱그러운 녹빛 머리카락에 안심한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둘의 말투는 묘하게 비슷한 부분이 있어서, 들을 때마다 흠칫 흠칫 놀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왕과 교접하고 오는 길인가?"

직설적인 물음에 말문이 막혔다.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레이나의 눈이 작게 반짝이고 있었다.

'저한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 겁니까.'

그 기대가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사실을 상대는 알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런 것 따위는 애초부터 중요한게 아닐지도 몰랐다.

언젠가의 한 순간.

그때 나누다가 마무리 짓지 못한 대화를 떠올린 용사가 숨을 고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레이나 씨, 기억하세요?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 말이에요."

"기억하고 말고. 그때의 나는 조금ㅡ 뭐랄까, 공격적이었지."

자신에게 화살을 겨누던 그 모습은 아직까지 잊을 수 없었다.

인간 따위가 감히 신성한 숲에 발을 들이다니, 같은 소리를 했었나?

세계수는 이미 불타 잿가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잿가루조차 지키겠다며 주변에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화살을 쏴댔더랬지.

"그러면, 레이나 씨가 합류 하기 직전에 했던 말도 기억 하시나요?"

"...그래."

세계수의 부활이라면 무슨 짓도 할 수 있다.

당시에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그러니까.

천천히 할 말을 고르던 용사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긴장한 표정으로 레이나에게 물었다.

"만약 왕녀님과 세계수 중 하나만 살릴 수 있다고 하신다면, 무엇을ㅡ 아니, 누구를 살리시겠어요?"

저는 만나보지 못한, 이미 죽어버린 사람을 입에 담는다.

그것이 실례되는 행동이라는 것 쯤은 용사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지만, 확신을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 상대가 '정상'이라는 확신을...

"세계수를 살린다."

그 꽃잎과도 같은 입술에서 튀어나온 답은 바로 세계수를 살리는 것이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뱉어진 대답.

천천히 숨을 고른 용사가 다시 한 번 입을 열었다.

"마을의 사람 하나와 세계수는요?"

"세계수를 살린다."

겨우 사람 하나로는 세계수의 가치를 판단할 수 없는 법이었다.

...그래, 분명 그런거겠지.

"그렇다면, 마을 하나와 세계수는요?"

"그것 또한 마찬가지로, 세계수를 살린다."

역시나, 망설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숨을 쉬듯 흘러나오는 대답에 용사가 상대의 엇나감을 느꼈다.

"...세계 전체와 세계수라면, 그때는 무슨 선택을 하실 겁니까."

"..."

그제서야 입이 다물어졌다.

하지만 그게 고민으로 인한 침묵이 아니라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비슷한 색을 가진 눈동자들이 진득하니 얽힌다.

서로의 안에 담긴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파고들고, 탐색하고, 읽어낸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계속 하는지 모르겠지만ㅡ"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향해 흘러내렸다.

"당연히 세계수다."

그 대답에 용사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제 눈 앞에 있는 존재 또한, 미쳐도 단단히 미쳐있다고.

누구 하나 정상이 존재하지 않는 모임이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자조한다.

"너도 마찬가지이지 않는가."

레이나가 말했다.

그녀의 말대로 자신 또한 정상은 아니었다.

제 소꿉 친구와 마을 사람들을 살려내고 말겠다며 무작정 여정을 시작해, 결국 마왕군을 전멸시키기까지 했더랬다.

그리고 결국에는 마왕을 강간하기까지.

누구 하나 서로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그런 망가진 이들이었다.

"아, 그래. 그러고 보니 그런 말도 했었지."

"...레이나 씨."

"세계수의 부활을 저지하는 자는 그 누구던, 용서하지 못한다고."

그것은 하나의 경고였다.

그의 심장에 남아있는 마지막 양심을 죽여버리라는, 그런 잔인한 선언이었다.

지금의 레이나에게 있어서 세계수의 부활을 저지하는 자라는 것은 다름아닌 '마왕과 교접하지 않는 용사.'였기에,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용사, 부디 더 힘내길 바라지."

내가 남자였다면 직접 마왕을 임신시켰겠지만, 같은 여자인 이상에서야 불가능하니까 말이야.

숲에 드리운 그림자를 마주하며, 용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끝도 없이 드리운 우거진 나무들과, 끝도 없이 펼쳐진 검고 검은 그림자를 마주한 것 같은 감각이었다.

"레이나 씨는,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

제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 떠나가는 손길에 용사가 물었다.

그 질문에 레이나의 뒷모습이 잠시 멈추어 섰지만, 겨우 그런 말 따위가 상대를 동요토록 하지는 않을게 분명했다.

"물론이지."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계수의 부활만이 제 행복의 전부라는 듯한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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