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3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3)
...그대로잖아.
용사에게 덮쳐지는 꿈을 꾸고 일어나 내 배를 봤지만 크기가 그대로였다.
겨우 한 번으로는 택도 없었다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한 번에 임신하는 것조차 되지 않다니... 하."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이를 가지는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남은 건 자궁에 들러붙은 정액 찌꺼기 뿐이라니.
"...대체 왜. 뭐가 문제였지?"
신경질을 부리며 시야를 가린 머리카락을 죽죽 잡아당겼다.
머리에서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지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처음 임신했을 때가ㅡ"
그래, 잠들어 있던 와중 용사에게 범해졌던 순간이었지.
성녀가 내 보지를 만지작거려 예민해진 몸뚱이로, 암캐처럼 헐떡이며 마구 싸질러졌더랬다.
그러면, 그 다음은?
"설마."
속에서 설움이 치솟아 올라, 그대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아닐 거야.
그냥 우연일 뿐이야.
그냥, 지독할 우연일 뿐이라고.
"읍, 우에에엑......"
용사와의 섹스에서는 고통만을 느끼기로 다짐했었다.
그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새끼의 좆에 헐떡이는 일 따위는 없을거라고, 그렇게 마음 먹었더랬다.
그런데, 그런데 대체 왜.
'용사의 좆에 가버렸을 때만, 아기가 생겼다고?'
"큭, 흐, 으흐흐흐흐흐......"
좆 같은 일이었다.
이 정도로 끔찍한 일이 과연 벌어질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그저 나의 과대망상일지도 몰랐다.
불행한 현실에 절망해, 스스로를 더욱 더 불행한 존재로 포장하려는 것일 수도 있었다.
"...확인을, 확인을 해야 해."
목구멍 끝까지 비명이 치솟았지만, 결국 내지르지는 못했다.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유일한 그것을 토해내는 순간, 내가 나로 있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
"용사, 용사, 용사, 큭......"
미친듯이 복도를 거닐다가, 찌르듯 느껴지는 두통에 비틀거리며 몸을 기댔다.
벽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한기가 살을 파고 들었지만, 지금은 이대로 조금만 쉬고 싶었다.
"이 세상은 정말이지....."
좆 같구나.
실실 웃으며 고개를 떨꾸자 머릿속에서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꼭 용사여야먄 할까.
용사가 아닌 다른 남자라면 어떨까.
웃기지도 않은 생각이었다.
"마왕 씨, 괜찮으세요?"
"...성녀."
괜찮냐는 말을 몇 번이나 더 들어야 진짜 괜찮아질 수 있을까.
바닥에 앉아, 힘 없이 고개를 들어올리니 걱정이 가득 담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분명 성녀가 맞는데도, 혹여 그 빌어먹을 여신이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싶어 반사적으로 꺼려졌다.
"몸이 좋지 않으시면 조금 쉬었다 갈까요? 며칠 더 머물다 출발해도 되니까ㅡ"
"괜찮다."
나는 괜찮으니까, 너희들 마음대로 해.
며칠 쉬었다가 출발한다고 해도 무언가가 바뀔 것 같지는 않았다.
"...네, 알겠어요. 그런데,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부탁하마."
몸이 축축 쳐지는게 삶의 의욕을 전부 잃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반쯤 맞는 말이기는 했지만, 이대로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성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저는 마왕 씨를 믿어요."
뜬금 없는 이야기였다.
그게 무슨 뜻이냐는 의미를 담아 눈썹을 비죽 들어올렸지만, 더 이상 그녀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믿는다니, 과연 뭘 믿는다는 뜻일까.
아니, 애초에 성녀가 마왕을 믿는다는 말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
왕도로 향하기 위한 여정에 따로 챙겨갈 만한 건 없었다.
최후의 결전을 위해 마지막 마을에서 최대한 짐을 비운 그들에게 남은 건 오로지 제 몸뚱아리가 전부였다.
"출발하자."
짧은 선언이 끝나고, 이제는 꽤나 익숙해진 방을 나선다.
넓디 넓은 성 안에 남은 것이라고는 이제 아무것도 없겠지.
마족도, 마왕도 존재하는 않는 곳을 대체 무어라 부르면 될까.
"다들 쉽게 당하지는 않겠지만, 마수들을 주의하게."
마왕성을 빠져나가고 잠시 뒤.
울창한 숲의 입구에 선 고르돌이 망치를 꺼내들고는 말했다.
지팡이를 든 마법사, 활을 꺼내든 엘프 궁수, 성검을 뽑아든 용사, 그리고 그냥 성녀.
이렇게 보니 꽤나 용사 파티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사이에 마왕이 끼어있는 건 또 어떨까 싶으면서도.'
하물며 그 마왕이 그 어떠한 전투 능력도 없는 잉여이기까지.
무기 대신 아기와 아이를 맡은게, 마치 마왕이 아니라 보호해야 하는 NPC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뭐, 실제로는 전리품 쪽에 더 가깝겠지만.
"마왕이라면 마수도 다룰 수 있는거 아니야?"
그렇게 숲 속으로 진입하려는 찰나, 마법사가 툭 내뱉었다.
그녀의 말에 다른 이들의 무수한 시선이 쏟아졌기에, 나는 속으로 이를 득득 갈 수 밖에 없었다.
"그,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마족들이 마수들을 부릴 수 있다는 설정은 있었지만, 설정 상의 이야기와 실재의 이야기는 또 다를 수도 있으니까.
"하아, 이런 걸 마왕이라고..."
우물쭈물거리며 고개를 숙이니 마법사가 한숨을 푹 내뱉었다.
쓸모라고는 애 낳는 것 밖에 없네.
숨 쉬듯 내뱉어지는 악의 섞인 말에 눈물이 찔끔 흘러나왔다.
...내가 왜 이딴 곳에서 이딴 취급을 받고 있는 걸까.
"언니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아가."
마키나의 외침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이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마법사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덜컹거렸다.
...저 녀석이라면 아이를 죽이고도 남을 것 같아서 무서운데.
물론 그녀의 뒤에는 두 눈을 시퍼렇게 뜬 드워프가 버티고 있었기에 딱히 손을 쓰지는 못할 터였다.
"아가, 나는 괜찮단다."
"그치만..."
"쉬이, 정말 괜찮아."
울상을 짓는 아이의 정수리를 토닥토닥 두드리니 내 허벅지에 꼭 달라붙는다.
마법사의 시선에 닿지 않도록 슬쩍 가려주니, 이번에는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나한테 뭐라고 해. 애한테 해코지 하지 말고.
"일단 출발이나 해."
순간적으로 상대의 시선에 내 복부쪽으로 향한 걸 느끼고는 마른침을 삼킨다.
어서 임신하지 않으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것 같은 예감에, 소름이 오소소 돋아났다.
'암컷이 되기는 싫은데 임신을 하려면 암캐처럼 앙앙거려야 하고, 그렇다고 안 하면 저 미친 마법사가 나를 자궁 둥둥이로 만든다니...'
이런 개 쓰레기 같은 게임이 다 있나.
속으로 잔뜩 투덜거리며 용사 일행의 뒤에 바짝 붙었다.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아이의 체온이 생각보다 높아서 무언가 안심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숲은 몇 번을 들어와도 기분이 나쁘구나."
분명 낮인데도 불구하고 숲은 어둡게 물들어 있었다.
나무의 그늘 아래에 일렁거리는 흑빛 아지랑이를 본 레이나가 표정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벗어나면 평범한 숲이니까 조금 참아라."
"그걸 몰라서 한 말이 아니지 않나!"
그새를 참지 못하고 드워프와 엘프가 티격태격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은 그 광경이 익숙하다는 듯이 태연하게 주변을 경계할 뿐, 전혀 말리고 있지 않았다.
부스럭.
"...흠."
무언가 온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들려왔던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마수. 마수라.
마수란 건 대체 어떻게 생긴 걸까.
괜히 궁금증이 들었지만, 마수의 외형이 전혀 궁금해지지 않는 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키에에에에에엑!!!!!"
"왔다!"
...저게 뭐야.
개의 몸뚱이에, 토끼의 대가리를 하고 있는데 이빨이 다닥다닥 나서는 서로 딱딱 맞부딪친다.
심지어 몸 주변에 난 촉수들은ㅡ
아니, 저거 누가 봐도 그거잖아.
끄트머리에서 끈적한 액체를 질질 흘려대는 꼬라지를 보자니 절로 속이 느글거렸다.
"자, 착한 아이는 보면 안되는 거란다."
제 옆에 있는 아이가 볼세라 슬쩍 눈을 가려준다.
마수가 내지르는 괴상한 포효에도 울지 않은 건 다행이었지만, 그렇다고 굳이 저 괴상망측한 꼴을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
"바람이여, 내 명에 따라라."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기대가 되지는 않았다.
아무리 높게 쳐줘도 겨우 야겜에서 등장하는 용사 파티.
심지어 마수라는 것의 모습도 저토록ㅡ 그, 뭐야.
아무튼, 상대가 상대인 만큼 전투 따위도 별 볼일 없을 줄 알았다.
'...뭐야, 대체 왜 잘 싸우는 건데.'
거대한 머리통이 물어뜯으려고 하면 드워프가 망치로 찍어누른다.
쏘아져 오는 촉수들은 용사가 전부 쳐내고,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한 것들은 레이나가 격추해냈다.
그렇게 잠시 버티다 보니 마법사의 영창이 끝나고, 마수의 머리통 위로 마법이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그걸 두세 번 반복하면 끝.
"으음, 이제 마기가 느껴지지는 않는데..."
셋 정도의 마수를 뚫어내니, 숲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조금 전의 어두컴컴한 느낌이 아니라, 평화롭고 평범한 느낌이 든다고나 할까.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이의 눈을 가리고, 마수의 소리에 놀라 앙앙 우는 아기를 달랜 것 밖에 없었다.
"흠, 간만에 힘을 쓰니 배가 고프군."
드워프가 마수의 체액이 잔뜩 묻은 망치를 닦아내며 말했다.
확실히, 배가 고프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괜히 이쪽도 배가 고파지는 것만 같았다.
'아니, 난 애초에 배가 고파야 하는게 맞잖아.'
최근에 먹은 거라고는 용사의 정액이 전부였는데, 그것마저 전부 토해냈으니 지금은 배가 텅 빈 상태였다.
"그러면 식사라도 하고 가지."
동의 한다는 듯, 레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배에서 울리는지 모를 꼬르륵 소리가 숲의 한 켠을 물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