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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55화 (55/342)

Chapter 55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5)

마왕이 다른 누군가와 식사를 같이 하는 건 쉽게 상상이 가질 않았다.

원탁에 빙 둘러 앉아서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는 마족들이라니.

감히 떠올릴 수 없는 풍경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마왕에게 음식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건 조금 이상했다.

"역시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엘프, 레이나가 중얼거렸다.

아무리 불구대천의 적이라고 하더라도 이상한 점 정도는 쉽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애초부터 다른 종들에 비해 오래 살아왔고, 오래 살아가는 존재라서 그런지 눈치 하나 만큼은 빨랐다.

"마왕, 정말로 이 모든 일들을 자네가 벌인게 맞나?"

"..."

레이나의 질문에, 마왕은 그저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노골적으로 기피하는 듯한 기색에 수려하게 펼쳐진 얼굴이 살풋 찡그려졌다.

역시 이상해.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지금 와서, 그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탄하듯 내뱉어진 자그마한 중얼거림.

이 자리에 있는 존재 중 그 작은 목소리를 들은 건 오로지 레이나 자신 뿐일 터였다.

"자, 너도 먹으렴. 마키나."

"와아, 감사합니다!"

방금 전까지의 우울했던 표정이 거짓말이라는 듯, 마왕이 부드러운 미소를 얼굴에 걸고는 마키나의 그릇에 스프를 담아주었다.

표현을 하자면 봄날의 세계수를 보는 것 같달까.

완전히 어머니의 표정이 되어버린 마왕을 바라보며, 레이나가 제 귓가를 긁적였다.

'...마왕이라는 존재가 저렇게 무해해 보일 수 있다니.'

옆에서 고르돌이 무어라 무어라 제 딸을 타박했지만, 마키나는 마왕이 덜어준 스프를 한 숫가락 크게 뜨더니 그대로 제 입안에 집어넣었다.

"마키나!"

"우음, 맛있는데에..."

고르돌이 기겁했지만, 빙긋 미소를 지어보이는 제 딸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성녀가 있으니 괜찮겠지.

체념과 믿음이 혼재되어 있는 눈빛으로 그릇을 내민 고르돌이 언짢은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마왕에 헛기침을 해댔다.

"딸보다 믿음이 부족하구나."

"큼, 크흠, 큼."

"...확실히, 뱃속의 아기가 마족이면 죽여버리겠다고 소리친 것도 너였지."

엘프의 반사 신경이 순식간에 아이의 귀를 막았다.

영문도 모른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는 제 품에 들린 스프를 냠냠 먹을 뿐이었다.

"그거야, 다른 사람들은 전부 주면서 너 혼자 먹지 않고 있잖나."

"용사에게는 안 주고 있다만."

그건 그렇지.

민망한 듯 수염을 쓸어내린 고르돌이 제 그릇에 스프가 담기는 것을 보고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저기, 한 그릇 더 받을 수 있나?"

"그래."

딱딱한 말투와 딱딱한 말투가 얽힌다.

그럼에도 둘은 그게 편하다는 듯이 은근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마왕이 아니었더라면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왜 먹질 않지? 네가 만든 음식이니 네가 가장 많이 먹어야 하지 않겠나."

거기에 산모이기도 하고.

앞으로 아이를 잘 낳으려면 잘 먹는 것 정도는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자신의 말에 주변의 다른 동료들의 시선이 뾰족해지기는 했지만, 마왕은 그다지 신경 쓰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그냥, 갑자기 입맛이 없어졌을 뿐이다."

힘 없이 내뱉어지는 말에 레이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 며칠간 음식을 먹는 걸 본 적이 없는데, 배가 고프지 않다니?

"정말 괜찮은 것 맞나?"

"...그래."

눈을 가늘게 뜬다.

전신을 덮은 옷들, 그 사이에서 흘긋흘긋 보이는 팔다리에 시선을 준다.

'...역시 말랐어.'

비쩍 마른 팔다리가 애처롭게 떨리고 있었다.

배가 고플 것이 분명한데도, 배가 고프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분명 어딘가가 아픈 것이 분명했다.

"성녀, 혹시 마왕의 상태를 확인해 줄 수 있나?"

"물론이죠."

딱히 의학적 지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대충 신성력으로 훑어보면 대강 상태가 어떤지 알 수 있겠지.

빙긋 웃으며 답하는 성녀에 마왕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무래도 마족이다 보니 신성력이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나, 나는 괜찮으니까. 신성력은 자제해다오."

"...지금은 괜찮아요."

"앞으로가 괜찮지 않으니 문제다."

제게 손을 뻗어오는 성녀를 막아선다.

거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게, 조금은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다.

"...먹을 테니까, 그건 그만 둬다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네."

마왕이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릇을 들어올리니 성녀가 그 안에 스프를 둠뿍 담아주었다.

정말 싫다는 듯한 표정으로 내용물을 바라본 마왕이 이내 숟가락을 들어올렸다.

"...읍."

숟가락으로 퍼올리고, 입에 넣는다.

음식을 삼키자마자 표정이 새하얗게 변하는 것이 상태가 많이 안 좋아보였다.

"괜찮으세요?"

"괜찮, 괜찮다."

그렇게 말하는 것 치고는 잔뜩 훌쩍이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눈동자에 눈물이 잔뜩 맺힌 것이, 조금이라도 자극을 준다면 펑펑 울어버릴 것만 같았다.

"속이 안 좋으신 건가요?"

"..."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게 안쓰럽다.

여전히 제 품 안에 안겨 앙앙 울고 있는 아기를 슬쩍 들어올리자, 마왕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자, 그러면 아기라도 안고 있어라. 아기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법이지."

물론 나는 아니었지만.

엘프의 예민한 청각에 인간 아기의 울음소리란 쥐약이나 다름 없었다.

...원래는 아기들에게 인기가 많은 몸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어버렸는지.

"흐응, 흐으..."

"착하다, 착해..."

마왕의 품에 안기자마자 울음을 그치는 아기의 모습에, 다른 이들의 시선이 요상하게 변했다.

마족의, 그것도 마왕의 품에 안겨야 울음을 그치는 인간 아기라니.

그 모순적인 광경에 입맛이 떨어졌는지, 고르돌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잠시 산책이나 가자꾸나, 마키나."

"응!"

제 아비의 손을 잡고 떠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바라보는 시선.

집착보다는 훨씬 더 애뜻한 감정에 누구 할 것 없이 눈을 돌렸다.

이 이상 알았다가는 동정해버리고 만다.

상대가 마왕인데도 불구하고, 안쓰럽다고 생각해버리게 된다.

"용사."

"...네, 레이나 씨."

"표정이 안 좋아 보이는군."

그 광경을 보며, 용사는 마치 목에 가시가 걸린 듯 계속해서 마른 기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가 지금까지 마왕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용사의 반응을 보자니 별로 상냥하지는 않았겠지.

"...저는 괜찮습니다."

용사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그 눈동자는 현재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

"우읍, 윽, 우에에에에에엑......"

식사가 끝나고, 숲 깊숙한 곳으로 몰래 움직이는 마왕의 뒤를 밟은 용사가 근처의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거친 구역질 소리와 함께, 방금 전에 먹었던 것을 쏟아내는 걸 보니 상태가 별로 좋지 않은 듯 싶었다.

'아무래도, 몸이 별로 안 좋으신 것 같아요.'

엘리의 말을 떠올린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마왕의 상태는 평범함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그렇지 않아도 잔뜩 말라있던 몸의 건강이, 뿔을 자른 것을 기점으로 완전히 망가진 듯 싶었다.

'그러려고 그랬던게 아니야.'

품 안에서 절그럭거리는 두 개의 뿔을 꺼내들었다.

짙은 보라색으로 물든 뿔은, 뿔보다는 자수정에 가까운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흑, 흐, 흐흐아......"

우는 건지 웃는 건지 모를 음성이 숲 너머로 퍼져나간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숨을 몰아쉬는 마왕의 모습이 어째서 저토록 안타깝게 보인단 말인가.

소꿉친구와 이름이 같아서?

아니면, 내가 마왕을 아리엘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아리엘, 지켜보고 있다면 나에게 답을 줘.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돌아가고 싶어..."

마왕의 중얼거림에 눈을 질끈 감는다.

돌아가고 싶다.

그건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마왕을 쓰러뜨리기 전, 용사가 되기 전, 마왕군이 마을을 습격하기 전.

바로 그 순간으로.

"마왕."

"...용사."

연신 기침을 토해내는 마왕 앞에 서자, 상대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텅 비어있는 눈동자 속에서 흘러나오는 눈물이, 순간 붉은 선혈색으로 물들어 섬뜩함을 주었다.

"네가 말했었지. 너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그래."

"그러면, 진실을 말해줘."

나지막하게 내뱉어진 말에 황금색 눈동자의 초점이 흐릿하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보며 용사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이미 늦었다.

한참 전에 했어야 하는 말을 지금에서야 한다고 바뀌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오히려, 더 심해질 뿐이라고.

"진실? 진실, 그래 진실......"

그의 말에 마왕이 미친듯이 중얼거렸다.

진실, 진실, 진실...

무슨 진실?

제 머리카락을 부여잡고는 마구 헝크리니, 잘려진 뿔의 단면이 슬쩍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진실을 말해달라고? 그래, 말해줘야지."

한참을 중얼거리던 마왕이 한숨을 내뱉듯이 입을 열었다.

그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인 용사에게 한 줄기의 악의가 흘러들어갔다.

"너를 증오해, 아서 "

그 한 마디를 끝으로 제 몸을 스치듯 지나가는 마왕을, 그는 붙잡지 못했다.

그 증오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해버렸기 때문에, 감히 붙잡을 수가 없었다.

"...아리엘."

용사의 시선이 어둡게 물든 숲 속으로 향했다.

제 속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은 풍경에 용사가 힘 없이 고개를 떨궜다.

싸늘한 바닥 아래로 추락하는 세 글자는, 과연 누구를 부르는 것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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