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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56화 (56/342)

Chapter 56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6)

"뭔가 오랜만에 오는 것 같네요."

울창한 숲 속. 그 중앙에 숨겨져 있는 마을의 입구를 바라본 엘리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찝찝한 점심 식사 뒤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마을.

그들의 속도가 빠른 것이 아닌, 인간들의 마을이 마왕성에서 지나치게 가까웠기 때문에 가능한 속도였다.

"...아서?"

"라스 씨."

수풀을 부스럭거리며 나타난 남자의 모습에 용사가 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마왕성으로 향하기 전 들른 최후의 마을의 생존자.

그들과 술을 마시며 반드시 마족의 씨를 말리고야 말겠다고 약속했더랬다.

"설마, 마왕을 쓰러뜨린 거야? 정말로?"

"...그렇습니다."

"허, 흐, 하하하하하하하!!!!!!"

아서의 말에 라스라고 불린 사내가 우렁찬 웃음을 터뜨렸다.

숨겨진 마을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듯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드디어, 드디어 해냈구나. 너라면 해낼 줄 알았다고!"

우락부락한 팔뚝이 용사의 어깨를 퍽퍽 내려친다.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서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쩐지 근처를 배회하던 마족 녀석들이 갑자기 사라졌더라니, 그런 거였군."

라스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 특유의 상쾌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덧대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잘 지내고 있습니까?"

"잘 지내고 있지. 이게 전부 너희들 덕분이야."

아슬아슬하게 생계를 이어나가던 그들에게 있어서, 용사 일행의 방문은 행운과도 같았다.

만약 그들이 마을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더라면, 혹여 물과 식량을 넉넉하게 챙겨오지 않았더라면 분명 치료받지 못하고 죽거나 굶어죽는 이들이 몇몇 나왔을 터였다.

그런데 하물며 그 빌어먹을 마왕군을 싸그리 쓸어버리고 돌아올 줄이야!

"자, 이쪽으로 와. 요전번에 했던 약속을 지킬 때가 된 것 같네."

원래라면 축제를 벌일 시기였기에, 마왕을 토벌한다면 그 기념으로 작은 축제를 열기로 했었더랬다.

마을 한가운데에 커다란 불꽃을 피워올리고, 각자의 소원을 적은 종이를 그 불꽃에 태워 올리는 그런 축제.

제 어깨에 팔을 두르는 라스에 용사가 피식 웃어보였다.

며칠간 고뇌에 빠진 남자 치고는 꽤나 시원스러운 웃음이었다.

"자, 가자고, 가! 이런 좋은 날에 꾸물거릴 수는 없지!"

마을로 들어서며 라스가 소리를 지르니, 사람들이 얼굴을 들이밀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용사 일행을 보며 함박 웃음을 지어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이 돌아왔다는 건, 마왕성의 마족들을 뚫고 마왕을 쓰러뜨리는데 성공했다는 뜻이니까.

"마왕이, 죽었다!!!!!!!!!"

물론 죽지는 않고 그들 옆에 멀쩡히 살아있었지만, 어떻게 보자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 환호와 기쁨이 섞인 광경 속에서, 마왕이 고개를 떨구었다.

사람, 인간들이 너무 많아.

"언니, 갠차나?"

언젠가 들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었다.

내 옷자락을 죽죽 잡아당기며 묻는 마키나에 정수리를 톡톡 두드리며 괜찮다고 답한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지.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당연히 괜찮아야지.

"어서오게, 아서. 그리고 다른 일행 분들도."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껄껄 웃으며 다가왔다.

그의 양 옆에는 두 남녀가 서있었는데, 아무래도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인 듯 싶었다.

"정말 이런 날이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건만......"

눈물 젖은 목소리로 눈가를 꾹꾹 찍어누르는게 꽤나 감동에 젖은 모양이었다.

그건 노인의 옆에 서 있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는지, 태연한 표정을 한 것 치고는 눈시울이 붉었다.

하지만 여자 쪽.

빌어먹을 정도로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는, 그들을 따라 감상에 젖기보다는 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흐앙, 흐앙, 흐아아아앙..."

"...쉬이, 울지 마려무나."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닌 내 품에 안긴 아기를 바라보고 있다는게 맞겠지.

주변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는지 아기가 앙앙 울기 시작했다.

아기가 울기 시작하자마자 눈빛이 바뀌는 것이 마치 그립고도 그리운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귀여운 아기네요."

"...그렇, 지."

싱긋 웃으며 말을 붙여오는 여인에 떨떠름하게 답한다.

신경이 곤두서고, 심장이 철렁이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몸뚱이는 반사적으로 깨달아버리고 만 것 같았다.

'이 여자의 아이야.'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깨어난 모성애가 상대를 향해 강한 적대감을 내비치고 있었다.

'무시해. 그냥 무시해. 모르는 사람이잖아.'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에는 색이 너무나도 비슷했다.

심지어 아기와 나는 하나도 닮지 않았기에, 누가 본다면 잠시 아기를 맡은 사람처럼 보일게 뻔했다.

'싫어. 내가,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아기란 말이야...'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이 자리에 있는게, 그리고 눈앞의 여인과 마주하고 있는 시간 자체가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저리 가. 내 아기한테서 눈 돌려. 꺼져버려.

이 아기는, 내가 낳은 내 아기라고!

"마왕 씨, 괜찮으세요?"

"..."

창백해진 내 표정을 보고는 성녀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아니, 전혀.

입 안에서 맴도는 부정을 꾹 삼키고는 품에 안긴 아기를 어르고 달랬다.

"흐응, 흐으으......"

"아가, 착하지. 응?"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원래라면 충분히 울음을 그쳤을 아기가, 여전히 울고 있었다.

왜 그러는 거야. 대체, 왜.

"잠시, 아기를 안아봐도 될까요?"

"...그래."

싫다.

그 짧은 부정의 말을 내뱉지 못한 이유가 뭘까.

떨리는 손으로 품 안의 아기를 건네자, 여인이 익숙한 손길로 아기를 받아들었다.

부드러운 손길로 등을 토닥이고, 작은 목소리로 속살거리며 천천히 달랜다.

그 이상적인 광경을, 나는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아기를."

돌려줘. 내 아기를 돌려줘.

내가, 내가 낳은 아기란 말이야.

무언가에 꽉 막힌 듯한 목에 연신 침을 삼켜도, 목소리가 나오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네가 졌어.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던 절망이 내 정수리를 집요하게 두들겨댔다.

"아기를, 잘 부탁한다."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이곳의 지리 따위 잘 알지도 못했지만, 저 자리에 계속 있었다가는 추한 꼴을 보일 것만 같았다.

어째서, 왜.

왜 내가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거야.

"하아, 하아..."

마을의 후미진 곳에 멈춰서서는 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고른다.

진정하려고 해도,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용사 일행 중 그 누구도 닮지 않아서 안심하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조금 더 오래 있을 줄 알았는데.

"와하하! 이쪽이야, 이쪽!!"

"..."

맑은 웃음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마을의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놀고 있었다.

술래잡기라도 하는 모양이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자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도 추해.

'애들한테 어른 우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잖아, 응?'

벗어나야만 했다.

"아얏..."

하지만 세상도 참 무심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뛰어놀던 아이 중 하나가 내 몸에 부딪혔다.

몸뚱이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덩치 차이가 있어서인지 밀려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넘어진 건 아이 쪽이었지만.

"저, 그으..."

"..."

아이가 나를 보며 말을 더듬었다.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는 모습에 흐릿하게 미소지었다.

"...조심해야지, 아가."

툭, 하고 가볍게 닿은 정수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무어라 소리칠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아, 그... 죄송합니다아..."

"그래."

아이의 사과를 받는 것 쯤이야.

여전히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도 하지 않는 아이를 일으켜, 몸에 묻은 흙은 툭툭 털어주었다.

딱히 상처가 생긴 곳은 없구나.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정수리를 툭툭 두드리니 고개를 꾸벅 숙이며 제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마왕."

"......용사."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설마 도망치려는 줄 알고 따라온 걸까.

도망친 건 맞았지만, 네가 생각하는 이유로 도망친 건 아니었는데.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니니, 안심해라."

이제는 도망칠 힘도 없으니까.

스스로의 처지를 비웃으며 용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자, 가야지. 다른 녀석들이 있는 곳으로.

"마왕, 저번의 일은ㅡ"

"용사."

머뭇거리며 튀어나오는 말을 툭, 끊어낸다.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으니 말하지 마.

나에게 미안해 하지 마. 사죄하지 마.

그 알량한 양심을 챙기자고 모든 것들을 없던 일로 만드려 하지 말란 말이야!

"너와 나의 관계는, 가장 처음의 것으로 충분해."

가장 처음의 것.

용사의 원수인 마왕.

그리고 제 분에 못 이겨 마왕을 강제로 범한 용사.

피와 비명, 그리고 고통에 찬 신음까지.

잘도 해왔으면서, 잘도 방관 했으면서, 잘도 믿지 않았으면서.

"앞으로 낳아야 할 아이는, 한참이나 남았으니까."

네가 네 소꿉친구의 이름을 가진 나를 범하며 상처 입는다면, 기꺼이 몸을 맡기겠다.

그것이 비록 나 자신 또한 상처 입히는 일이 될지라도, 나 자신을 잃게 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용사를,

아서를,

너를ㅡ

ㅡ사랑(증오)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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