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9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9)
"...아기를 그렇게 선물 주듯 줘버리다니."
멍하니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마왕의 등 뒤로, 용사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제 배 아파 낳은 아기를 건네주고 도망치던 그 뒷모습을 떠올리며, 용사가 술내음이 잔뜩 담긴 숨결을 내뱉었다.
자신의 목소리에도 반응 하나 없는 모습에 어깨라도 붙잡을까 싶었지만, 희미하게 들려오는 대답에 이내 뻗어내던 손을 멈췄다.
"그렇지만, 그녀가 바란 일이다."
"제이나가 원했다고 해도, 그 아기는 네 뱃속에서 나온ㅡ"
"..."
"..."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뒷모습을 헤집어 넣는 순간, 촉촉하게 물든 황금색이 달빛을 반사해 처연하게 빛났다.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덜덜 경련하고 있는 손이 결코 추위 때문에 떠는게 아니라는 것 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래, 당연하게도.
...마왕은, 그녀는 지금 슬퍼하고 있었다.
"느낌이 묘하다."
멍한 목소리 허공에 흩날린다.
겨우 한 줄기의 바람에도 묻힐 법한 목소리였지만, 용사의 귓가에는 똑똑히 들려왔다.
분명 태연한 목소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마왕이 울고 있다고 생각해버렸다.
언제나 느끼는 사실이지만, 정말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을 죽인 피도 눈물도 없는 존재가, 겨우 자신의 아기 하나에 이토록 슬퍼할 수 있는가?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예뻐한다고 자신의 혈육만큼에게는 상냥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녀가 낳은 아기는 전부 다 끔찍하리만큼 본인을 닮지 않았다.
"어치피 너를 닮지도 않았잖아."
"맞다.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누구도 내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지."
그것이 마왕에게 내려진 하나의 저주였다.
자신을 죽이기 위한 대적자에게 범해져, 아기를 낳게 되지만 자기 자신과는 절대 닮지 않는 아기를 낳게 되는 그런 저주.
언제나 의심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분명 내 뱃속에서 태어난 아기인데, 정말 내 아기가 맞는 것인가?
탯줄이 연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어낼 수 없는 의심은 언제나 그녀의 몸 속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을 터였다.
"첫번째 아기는 고르돌의 딸을 닮았고, 두번째 아기는 제이나 그녀를 닮았지.
...내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하늘에는 무수히 많은 별이 떠있었지만, 그 어디에도 그녀를 위한 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본인이 배 아파 낳은 자식마저도, 그녀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용사, 이건 절대 다른 뜻이 있어서 하는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
먹먹해진 심장이 제멋대로 울음 섞인 목소리를 토해냈다.
춤을 추고, 노래하고, 떠들며 왁자지껄한 언덕 아래로 짙은 부러움 한 조각이 떨어져 내렸다.
"여전히 네가 싫고, 혐오스러워 미칠 지경인데도 오늘만큼은 아무래도 상관 없다는 듯한 기분이야."
용사가 싫다.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 싫다.
본인을 억지로 범하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 자체가 싫다.
존재 자체가, 혐오스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혼자 있기가 싫구나."
마왕이 내뱉은 한 마디에 용사가 잠시 숨을 죽였다.
스스로가 상대에게 무슨 짓을 해왔는지 정도는 깨닫고 있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은 건 그녀가 자신을 혐오하고,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너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토록 거칠게 범하고 있으니, 너 또한 나를 격렬하게 증오해라.
서로를 상처 입히기 위한 하나의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망할 년."
잠시의 침묵 끝에 용사가 욕짓거리를 내뱉었다.
상대의 말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술이 잔뜩 들어가서 그런지 물 먹은 스펀지처럼 묵직해진 머릿속이 축축 늘어졌다.
온 세상이 술에 취해 일그러진 와중에도, 마왕의 모습 만큼은 선명하게 보인다는 사실이 아이러니 했다.
"...빌어먹을 자식."
그런 용사의 욕설에, 마왕 또한 투덜거리는 듯한 말투로 내뱉었다.
제 딴에는 뾰족하게 내뱉은 듯 했지만, 속으로 몇 번이고 망설인 끝에 내뱉어진 것처럼 자신 없는 목소리였다.
"꼭 그렇게까지 욕을 했어야 한 건가? 최근 들어 하는 생각이지만, 평생 들어먹을 욕을 너한테 다 들어먹는 것 같구나."
덧붙여 말한 마왕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추위 때문인지, 혹은 취기 때문인지 붉게 물든 얼굴이 더더욱 붉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 뿐만이 아니고, 이 세상 사람들 전부 너를 욕하던데."
"...꼭 그렇게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된다."
마을에서 스치듯 들었던 이야기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죽어 마땅한 존재.
쓰레기.
악마.
그 외 입에 담기도 무서울 정도로 짙은 경멸과 분노를 품은 여러 단어들까지.
"그나저나,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신 거지? 술 냄새가 여기까지 난다만."
"너도 마찬가지야."
코를 움켜쥐며 말해오는 마왕에 용사가 낄낄거리며 답했다.
코끝을 찌르는 술내음이 기분 나쁘다기 보다는 오히려 동질감이 느껴져 안심된다면 거짓말일까.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술 같은 건 마시지 않겠다고 그렇게나 사양했는데..."
양 뺨을 붉게 물들인 마왕이 손부채질을 하며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촉촉하게 젖은 황금색의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한층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천천히 언덕 위를 내려오는 상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용사가, 얼마 걷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마왕을 향해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윽?!"
곧바로 바닥에 머리를 처박을 줄 알고 눈을 꼭 감았던 마왕이 슬며시 눈을 떴다.
이슬처럼 맺혀 있던 눈물이, 그녀가 눈을 뜸과 동시에 뺨을 타고 또르르 흘러내렸다.
"..."
"..."
달빛은 남자를 미치게 만들고, 여자를 더 아름답게 만든다고 했던가.
전신을 가득 채운 알코올과 더불어, 하늘에서 내리쬐는 달의 마력이 용사의 눈을 잔뜩 유린했다.
"오늘은 기분이 울적하니, 부드럽게 해다오."
가느다란 목덜미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리고 전신을 덮는 복장으로도 전부 가려지지 않은 육감적인 몸매까지도.
꿀꺽, 하고 용사가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그 모든 것들이, 마왕의 애원 섞인 목소리에 불현듯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래."
긍정이, 바람 불듯 스쳐 지나간다.
"그래, 그거면 됐다."
그런 그의 대답에 마왕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휘어졌다.
분명 희미한 미소였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기쁨에, 용사가 숨을 삼켰다.
'미친 건가.'
속으로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어도, 취기가 오른 몸은 생각과는 다르게 제멋대로 움직여댔다.
천천히 손을 뻗어낸 용사가, 붉게 달아오른 마왕의 뺨을 엄지 손가락으로 꾹 찍어냈다.
창백한 피부에 온기가 깃들자, 순간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인간처럼.
"...뭐 하는 게냐. 간지러우니까 그만 하거라."
"마왕."
그런 그의 손길에 고개를 돌린 마왕의 입술 위로 투박한 손길이 내려앉았다.
묘한 열기가 담긴 그 자그마한 행동에, 그리고 저를 부르는 단 두 글자에 마왕이 우뚝 멈춰섰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렇게 물으려는 찰나였다.
"...!!"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다.
원래의 형태가 뭉개질 정도로 꾹 눌러진 입술에, 마왕이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미친, 미친 놈. 이 미친 새끼!
태어나서 하는 첫 키스의 상대가 남자라니.
심지어 이 빌어먹을 용사 자식이라니!
"흐, 혀는 안 된다! 이, 끄레기 자식타!"
꾹 닫힌 입술 틈을 비집고 들어오려는 뜨거운 살덩이에,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린다.
제 가장 안쪽을 휘젓는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제 입 안까지 유린하려 하다니, 악질도 이런 악질이 있을 수 없었다.
"왜, 이미 애까지 낳은 사이인데."
"...미친 놈."
생각을 거치지 않고 튀어나온 말에, 마왕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지금까지 욕 한 마디 하지 않았던 그녀가 직접적으로 욕을 내뱉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부드럽게 해달라는 건, 그런 뜻이 아니었으니 착각하지 마라."
나를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마.
왜, 연인처럼 사랑을 속삭이는 섹스를 하고 싶었던 거야?
지랄하지 마.
네가, 감히, 나랑?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바람이 차게 식어갔다.
차라리 언제나와 같이 증오를 내뱉는다면 차라리 나았다.
술 기운이 돌아도 한결 같았다면 오히려 더 안심하고 상대를 증오할 수 있을 터였다.
"왜, 내가 불쌍해 보이기라도 하더냐? 안쓰러워서, 달래주고 싶기라도 한 건가?"
하.
짧은 비웃음이 용사의 귓가를 타고 흘러가, 그의 고막을 뾰족하게 찔러냈다.
"나는ㅡ"
"그만, 그만 말하거라! 네 녀석이 하는 말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아!!"
역겨워, 역겨워, 역겨워!
저 쓰레기 같은 새끼도, 순간 이 녀석에게 몸을 맡기려고 한 자기 자심도 역겨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소리를 내지른 마왕이 그대로 저 아래로 이어진 비탈길을 쏜살 같이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입술에 들러붙는 미약한 온기가 혐오스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하아, 하, 하아..."
용사, 용사, 그 빌어먹을 새끼.
바닥에 주저 앉아서는 신경질적으로 옆에 자라난 풀더미를 두들긴다.
술이 들어갔다고 너무 미쳤었나, 아니면 하늘의 달이 너무 밝아서?
그것도 아니라면, 설마.
"우에에에엑......"
겨우 채워졌던 위장이 제 안에 담긴 것들을 전부 쏟아냈다.
몸 안에 담긴 희미한 온기와, 포기와 동시에 만족하려는 본능을 전부 토해낸다.
하지만 그 눈. 내게 보내던 뜨거운 열기가 담긴 시선.
나는 과연 그것을 못본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알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차라리 기억을 잃어버리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