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0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10)
분명 얼마 오지 않은 것 같았는데, 마치 깊은 미궁에 빠져버린 것만 같았다.
한참을 울다가 걷고, 다시 울다가 걷는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간다는 느낌으로 계속해서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마을의 불빛이 보이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지..."
하늘에 달이 떠있음에도 불구하고 검게 물든 숲 속을 응시한다.
무언가 튀어나올 것처럼 음산하게 물든 어둠이, 그 안에 악의를 담고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계속 걸으면 뭐가 나올까.'
차라리 다시 마왕성으로 돌아간다면 좋을 텐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발을 뻗는 순간,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윽?!"
반사적으로 자리에 주저앉자, 발바닥에서 끈적한 액체가 줄줄 흘러내렸다.
그렇지 않아도 엉망진창이 되었던 피부가 뾰족한 돌멩이를 짓밟고는 길게 찢어져 있었다.
...아프네.
"정말이지, 흐..."
웃음이 나왔다.
동시에, 눈물이 흘러나왔다.
손바닥을 붉게 물들인 핏자국을 내려다 보며, 한참을 울고 웃었다.
술기운 때문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어쩌면, 이대로 잠들어 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크르르르르르..."
"...아."
악의가 나타난다.
검고, 칙칙한 무언가가 형상을 이뤄 내 앞에 다가선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그것은 토끼의 머리에 개의 몸뚱이를 하고 있었다.
"아, 으, 으..."
낮에 보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끔찍한 모습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분명 그 녀석들이 상대할 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도망치려고 해도, 몸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술기운과 더불어 쉬지 않고 걸어온 몸뚱이는 이제 손가락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한계가 온 듯 싶었다.
"흑, 잠, 깐?!"
마수의 등 뒤에 달려있던 촉수들이 내 허벅지를 감쌌다.
그 끝에서 흘러나오는 희어멀건 액체에, 표정이 희게 질렸다.
싫어.
그만, 둬.
"윽, 아아아아아아아악?!?!!!"
하지만 녀석이 내뿜어내는 액체는 내 예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분명 발정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 액체는, 쾌락은 커녕 나에게 고통만을 안겨주었다.
마치 불 위에 고기를 굽는 것처럼 지글지글 익어가는 몸뚱이에 반사적으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아파, 살려줘. 몸이, 불타고 있어...'
"아극, 악, 으......"
팔다리를 움직이려고 해도 마수의 촉수에 붙잡힌 이상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몸이 천천히 녹아내리는 것을 느끼며, 하늘의 달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허망하기 짝이 없는 최후로구나.
"엄마..."
극한의 고통을 넘어서, 마침내 어떠한 고통도 느끼지 않게 될 무렵에는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면 덜 무서울 텐데.
괴상한 모습으로 이빨을 들이대는 마수의 주둥이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흑, 핥지, 마라... 윽, 차라리 바로 죽여, 큭..."
마수의 혓바닥이 내 뺨을 훑어내릴 때마다 얼굴의 살갗이 찢겨나갔다.
마치 강판으로 얼굴을 문지르는 듯한 감각에도, 나는 그저 몸을 덜덜 떠는 것 밖에 하지 못했다.
"윽, 흐아아아아악?!?!!!!"
그렇게 잠시.
녀석의 촉수에서 뿜어져 나오던 액체가 녹아내린 팔을 넘어 뼈에 닿았을 때, 나는 다시 한 번 비명을 지를 수 밖에 없었다.
'엄마, 엄마, 엄마, 나 너무 아파... 제발 살려줘. 제발...'
살이 녹아 없어지고, 뼈가 부식되고, 신경이 끊어진다.
마치 먹잇감을 가지고 노는 듯한 행동에 비참함이 배가 되었다.
...차라리 용사 새끼한테 죽는 편이 덜 아프지 않았을까.
"으흐, 흐, 하......"
몸이 한쪽으로 쏠린다 싶었는데, 팔 한쪽이 떨어져 나가서 그런 것 같았다.
반쯤 녹아내린 팔을 붙잡고 있던 촉수가 유연한 움직임으로 허공을 거닐더니, 이내 제 아가리 안으로 내 팔을 던져넣었다.
으드득, 으득, 으드드득.
"헉, 허억, 흐윽."
살점을 씹어삼키고, 뼈를 짓이기는 살벌한 음성이 검게 물든 숲 너머로 퍼져나갔다.
잘려나간 부위에서 쏟아져 나오는 대량의 피에 정신이 깜빡깜빡 점멸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린다면, 더 이상 아프지 않아도 되는게 아닐까.'
그 누구도 없는 처절한 죽음.
분명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흔적 없이 사라질 터였다.
성녀조차 없으니 되살아나기도 불가능하겠지.
어쩌면, 이것만이 내가 최후를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흐."
두근 두근, 하고 느리게 뛰는 심장 박동 소리를 느낀다.
삶을 포기한 순간부터 느리게 뛰는 심장은, 마치 수고했다는 듯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어.
그러니까 이제 쉬어도 돼.
"흐으, 흐.. 하."
시야 한쪽이 완전히 붉어졌을 무렵에는 드디어 눈이 녹아내렸구나, 같은 태평한 생각을 해댔다.
고통 이외에 그 어떠한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몸뚱이 따위를 과연 내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군침을 흘리며 내 왼팔을 바라보는 마수에 고개를 푹 떨궜다.
'...이걸로 마지막이야.'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주둥이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게 된다면 그곳은 분명 저승이겠지.
***
어둠을 뚫고 달려나가는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순간적으로 맞닿았던 입술의 감촉을 떠올린 용사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무슨 생각으로 마왕에게, 큭..."
취기가 확 달아나는 듯한 느낌이었다.
방금 전까지는 몽롱하게 물들었던 정신이, 마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자마자 깨끗하게 표백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용사는 마왕의 뒤를 쫒지 않았다.
"차라리 이대로 도망치게 내버려 둔다면."
그게 더 낫지 않을까.
희미한 중얼거림이 어둡게 물든 숲속을 거닐었다.
마왕이 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멀리 도망친다면, 그리고는 절대 찾을 수 없게 꽁꽁 숨어버린다면.
그렇게 된다면, 그녀를 범하지 않아도 될 터였다.
"멍청한 새끼, 멍청한 새끼야..."
하지만 포기를 생각하는 순간 떠오르는 제 소꿉친구의 얼굴에, 이내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옆의 나무에 제 머리통을 박아대던 용사가, 깊은 한숨과 함께 저 너머의 풍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혐오로 가득찼던 얼굴이 아직까지 눈앞에 아른거렸다.
"일단은, 찾으러 가야겠지."
혹여나 마왕을 놓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다.
세계수에 미친 엘프와 제 스승에 미친 마법사의 조합이란,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올가미와 같았으니까.
그러니 찾으려면 자신이 찾는 편이 훨씬 나았다.
...비록 그것이 그녀에게 있어서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것 뿐이라도, 차라리 그게 더 나았다.
"마왕, 어디 있어?!"
물론 그녀가 도망쳤다는 생각 따위는 들지 않았다.
이유는 딱히 없었지만, 그냥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마왕을 믿는다니, 제정신이 아니구나.'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마왕을 부르는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어디에 있어.
어디로 간거야.
설마, 정말로 도망친 건가?
"설마."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이 상황을 위한 연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마왕과 마족을 향한 그의 고정관념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었기에, 그녀라면 충분히 그 정도 수준의 연기를 펼칠 수 있다고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마수?"
저 멀리에서 보이는 붉은색 눈동자에 허리춤에 매달린 성검을 뽑아든다.
술이 들어간 상태로 정처 없이 걷다보니 아무래도 마수들의 영역까지 들어온 것 같았다.
어쩌면, 마왕도...
"마왕!!"
저를 보며 울부짖는 마수의 촉수들을 그대로 베어낸다.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그 주둥이를 갈라내고, 머리통을 반쪽으로 잘라낼 즈음에는 이미 움직임을 멈춘 채였다.
'마왕이라면 마수도 다룰 수 있는거 아니야?'
에밀리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기는 했지만, 베어낸 마수가 무언가에 조종당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살아있는 생명체라면 무조건 공격하고 보는 마수의 특성상, 마왕 또한 공격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왕!!!!"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여 마왕을 부른다.
제 목소리를 듣고 득달 같이 달려드는 마수들을 베어넘기며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이럴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붙잡는 편이 나았을지도 몰랐다.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절대 그냥 보내지 않았을 텐데.
"...아."
시야가 점멸한다.
마수의 촉수에 매달려 힘 없이 늘어져 있는 마왕이, 누군가의 최후와 겹쳐 보인다.
공허한 눈동자와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검붉은 액체.
그 광경을 보며 이를 악문 용사가 순식간에 검을 휘둘러 마수의 촉수들을 잘러냈다.
"크아아아아아!!!!"
"..."
제 먹잇감을 빼앗겼다는데에 나오는 분노인지 마수가 거칠게 울부짖었지만, 용사의 시선은 오로지 바닥에 널브러진 마왕에게 향해 있었다.
잘려나가 텅 비어버린 팔과, 반대로 꺾여 뼈가 보이는 다리.
그리고 사라져버린 눈동자 하나.
"...시끄러우니까, 닥쳐."
마수의 머리통이 그대로 비산한다.
잘려진 단면에서 핏줄기가 터져나왔지만 용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마왕의 모습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마왕."
"..."
"마왕."
한걸음 다가간다.
이것이 연기 따위가 아니라는 것 쯤은 손쉽게 알 수 있었다.
마족이 마수를 부리는 건 맞았지만, 마왕이 마수를 부린다는 건 틀렸다.
어쩌면 마족의 상징인 뿔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일지도 몰랐지만, 그 뿔을 자른 건 다름 아닌 용사 자신이었다.
아니, 그냥 그때 그 뒷모습을 붙잡기만 했었더라도.
"...정신 차려."
짙은 죄악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