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1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11)
품 안에 안긴 생명의 무게가 이토록 가볍게 느껴졌던 때가 있던가.
원수를 품에 안고 표정을 일그러뜨리고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마왕이 죽으면 아리엘을 되살릴 수 없어.'
그 이유 때문이었다.
아리엘을 되살릴 수 없다는 간절함이, 슬픔이 되어 튀어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왕의 몸 속에서 흘러나온 피는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지 오래였다.
희미하게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아니었다면, 분명 죽었다고 생각될 정도의 치명상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방법이....."
겨우 지혈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문제였다.
그렇다고 마을로 향하기에는 그 거리가 너무도 멀었다.
이동하다가 결국 죽어버리고 말거야.
하지만, 그거 말고 대른 방법이 있어?
스스로에게 반문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대로 죽으면 안 돼..."
왜?
아리엘을 살려야 하니까.
...하지만 그 이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다면, 그래.
마왕이라는 존재의 최후를 이렇게 허무히 장식할 수 없었으니까.
단지 그 이유 뿐.
"...용, 사."
"! 정신이 들어?!"
그리고 그 순간, 희미한 목소리가 용사의 귓가에 스며들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동시에 자신의 삶을 불태워 말하는 듯한 음성에 그가 마왕을 향해 바짝 다가섰다.
무언가 방법이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나에게 말을ㅡ
"...죽여, 다오."
너무, 너무, 아파서, 이제 그만 편해지고 싶어.
그런 의미를 담은 말 한 마디에, 용사가 주먹을 그러쥐었다.
어째서 그런 눈을 하는 거야.
아픈게 싫다며, 죽는게 싫다며.
그런데 왜, 왜 그렇게 전부 다 포기했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거냐고.
"그러니까 왜 멋대로 뛰쳐나가서는, 왜, 왜..."
"...흐."
엉뚱한 곳으로 쏟아지는 분노에, 마왕이 조소했다.
피에 물든 그 미소는 달에 젖어 마치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알고 있어.
이 모든 것이 내 잘못이란 것 쯤은, 전부 알고 있다고.
그런데도 인정할 수 없는 건.
그건, 그냥...
"왜, 내가 쫒아갈 수도 없게 만들어서......"
죄악.
죄책.
미안함.
사과.
연민.
동정.
가여움.
감정이 쏟아져 내린다.
한 여름에 몰려오는 장마와 같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내린다.
본인이 저지른 죄에 의해 망가진 마왕.
그걸 보면서 그런 감정을 느낀다고?
위선이야.
전부 다, 쓰레기 같은 짓이라고.
'그래서, 그래서 애써 무시했는데.'
차라리 그런 감정을 느끼지 않은 셈 치면 이런 괴상한 관계라도 쭉 이어질 줄 알았다.
범하고, 아이를 낳고, 서로 증오하면서도 떨어질 수 없는 그런 기괴한 관계가.
하지만 아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증오와 분노에 비해, 상대가 품은 악의가 너무도 희미했다.
자그마한 악의가 더욱 더 커다란 악의에 휘말려 순식간에 가라앉는다.
그 숨 막히는 암흑 속에서 얼마나 절망하고, 질식했을까.
"아서."
귓가에 목소리가 울린다.
제 소꿉친구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이가, 친근하게 제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귀를 틀어막으려 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는 건 왜일까.
"제발."
그리고 마침내 한 마디.
그 마지막 한 줄기의 목소리에, 용사는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더 이상 그녀를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그녀를 영원히 떠나보내게 될 것이라고.
"아리, 엘..."
제 소꿉친구의 이름을 부른다.
동시에, 눈앞에서 죽어가는 마왕의 이름을 부른다.
피에 젖은 마왕의 얼굴에 소꿉친구의 얼굴이 겹치고, 동시에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그 한 방울의 눈물에 용사는, 아서는 성검을 들어올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보내줄 때가 됐어.'
마왕도, 소꿉친구도, 아리엘이라는 이름에 남겨진 미련조차도.
만족한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그린 마왕의 심장을 향해, 성검이 곤두박질쳤다.
그렇게 날카로운 끄트머리가 마왕의 심장을 찌르기 직전, 머릿속에서 떠오른 한 줄기의 생각에 극적으로 움직임을 멈춘다.
'성검에 마왕의 피를 묻히면...'
그러면, 여신이 강림한다.
엘리가 지닌 신성력의 근원이자, 하나의 초월적인 힘.
그것이라면 마왕을 되살리고도 남을 것이 분명했다.
"살릴 수 있어. 살려낼 수 있어..."
조심스러운 손길로 마왕의 뺨을 훑어내리자, 용사의 손가락에 검붉은 색의 혈액이 잔뜩 묻어났다.
그에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킨다.
마왕을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앞에 두고 용사는 망설이지 않았다.
"제발, 제발..."
성검의 칼날에 용사의 손바닥이 닿는 순간 작은 불빛이 일었다.
처음에는 한 방울.
그 다음에는 성검의 칼날을 잔뜩 물들인 신성력이 어둡게 내려앉은 숲속을 가득 매웠다.
"용사님, 설마 마왕을 또 쓰러뜨리신 건 아닐 테고... 아무튼,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그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지만, 분명 같은 목소리였다.
여신의 자애로운 음성에 용사가 반사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아니, 무릎을 꿇는 걸로 모자라서 제 머리통을 바닥에 꾹 처박았다.
"마왕을, 살려주세요. 부탁드립니다."
"마왕을요?"
여신의 목소리에 의문이 감돌았다.
상대가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마왕이 있는 곳을 바라본 것 같았다.
"용사님께서 마왕을 살려달라고 말씀하시다니, 이건 또 의외네요."
"...설마, 살릴 수 없는 겁니까?"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린 용사의 시야에, 푸스스 웃고 있는 여신의 얼굴이 들어왔다.
부드러운 미소에 숨겨져 있는 묘한 꺼림칙함에 반사적으로 팔이 덜덜 떨려왔지만, 기분 탓이라고 치부하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여댔다.
"그렇게까지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된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건 불가능하지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멀쩡하게 만드는 것 정도는 가능하니까요."
"정말, 정말입니까?"
저런 꼴이 되어서도 살아있다니.
저런 꼴이 되어서도 살아있을 수 있다니.
'죽고 싶지 않아.'
마왕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던 미련이 떠올라, 입술을 짓이겼다.
입 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에 검게 질척거리는 죄악감이 흘러넘칠듯 범람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희망과 안도에, 용사가 가쁘게 숨을 토해냈다.
"그런데, 정말 모르겠네요. 그렇게나 마왕을 증오하던 용사님이 어째서 마왕을 살리려고 하시는지."
"그건,"
말문이 막혔다.
내가 마왕을 살려내려고 하는 이유는, 내 소꿉친구인 아리엘을 다시 되살리려면 그녀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야.
'하지만 방금 전까지는 다른 이유 때문에 절박했었잖아.'
그에 마음속의 목소리가 반박했다.
연민과 동정, 그리고 그보다 깊은 무언가에 의해서 살리려고 한 주제 거짓말이나 한다며 용사를 타박해댔다.
그래, 어쩌면 그게 맞을지도 모르지.
그럼에도 용사는 그것에 대한 답을 떠올리지 못했다.
아니, 감히 입에 담지 못했다.
"뭐, 좋아요. 시간도 없으니 대답은 다음에 듣는걸로 해도 되겠죠."
여신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기에, 용사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렇다면ㅡ"
"대신."
여신이 미소지었다.
턱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두드리며 서두를 던진다.
그 태연한 모습에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용사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오히려, 아무런 대가가 없으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으니까.
"치유가 아니라 다른 수단으로 그녀를 살릴거에요."
"...네?"
용사의 물음에 여신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짙어졌다.
제 가슴께를 훑고 지나가는 시선에 순간적으로 움찔하자 여신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마치 재미있다는 듯, 혹은 재미있는 장난감을 보고 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용사의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 해소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를 붙잡을 수 있기를 바랄게요, 용사님."
밝은 빛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그의 의식이 순식간에 백색으로 물들었다.
***
"나는ㅡ"
"그만, 그만 말하거라! 네 녀석이 하는 말 따위는 더 이상 듣고 싶지도 않아!!"
거친 외침 끝에 뛰어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용사가 제 품 안의 뿔을 어루만졌다.
이대로 멀어지게 된다면 붙잡을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따라간다면 충분히 붙잡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럼에도 그가 쫒아가지 않는 건ㅡ
"큭, 마왕!!!"
ㅡ아니, 쫒아가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
어느새 작게 보이는 마왕을 향해 뜀박질을 시작한 용사가 빠른 속도로 그 뒷모습을 따라잡았다.
술기운이 전신을 물들였음에도, 그의 발걸음은 흔들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붙잡아야 해. 붙잡아서 마왕에게ㅡ'
마왕에게, 뭐?
"왜, 내가 도망이라도 치는 것 같아서 쫒아온 건가?"
"..."
체념이 얼굴을 덧칠한다.
고개를 숙여 상대의 발을 바라보니, 신발이 벗겨진 상태로 달려서 그런지 크고 작은 상처들로 인해 아주 엉망이 되어 있었다.
"도망 따위는 절대 치지 않을 테니 빨리 이 손이나 놓ㅡ 꺄읏?!"
허벅지와 등줄기를 팔로 받쳐, 그대로 들어올린다.
허공에 붕 뜬 상처투성이의 창백한 발이, 흙먼지와 함께 핏방울을 뚝뚝 흘려내고 있었다.
이런 꼴이 되었으면서도 잘만 뛰어다녔구나.
제 품 안에 안겨 바르작거리는 마왕을 바라본 용사가 느리게 숨을 토해냈다.
"...뭐하는 짓이냐. 당장 내려놓거라."
물론 좋은 반응이 돌아올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하지 않았다.
짙은 혐오와 증오.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분노.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뒤섞인 듯한 감정에 술기운이 달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발이 그 꼴인데, 그대로 걷겠다고?"
마왕과의 관계는 그게 옳았다.
증오하고, 증오 당하는 그런 간단한 관계.
마왕과 용사란 건 결국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한 건 무엇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