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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62화 (62/342)

Chapter 62 - 스스로를 속이는 방법.(12)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전부 잊거라."

용사의 품에 안겨서, 그런 이야기를 내뱉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힘들다보니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가버렸던게 분명했다.

망가진 몸과 피폐해진 정신.

빼앗긴 아기와, 아기를 가지기 위해서는 쾌락을 느껴야 한다는 조건까지.

그저 극한의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 멍청한 생각을 했던 것 뿐이었다.

"마왕."

"왜 그러지?"

나지막이 날 불러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치켜들었다.

어둡게 내려앉은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지만, 그게 나를 괴롭게 하기 위함이 아니란 걸 깨닫고는 안심했다.

...겨우 이딴 거에 놀라고 안심하다니.

"아기에 대한 건ㅡ"

"...그만."

"..."

거기까지만 이야기 해.

더 이상, 말하지 마.

상대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읊조리자, 용사가 입을 다물었다.

'내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그딴식으로 지껄이지 마.'

텅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해 필요한 건 또 다른 온기일 터였다.

그 온기를 위해 용사 녀석에게 순순히 몸을 맡기려 했던 사실은, 앞으로의 나에게 있어서 치명적으로 작용할 터였다.

한 번 했던 생각을 두 번 하지 않을 리가 없지.

아무리 술이 들어간 채였다고는 해도, 변명할 여지 따위는 없을 터였다.

"그리고, 술이 들어간 상태이니 말하는건데 더 이상 나에게 친절하게 굴지 마라."

어쩌면 용사 또한 술이 진창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이따위 행동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반쯤 무의식적으로 제 소꿉친구와 나를 겹쳐 보는 것일지도 모르지.

물론 그것이 내가 노리고 있던 바라고는 해도, 막상 그런 취급을 당하면 기분이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겨우 이름이 같다는 것만으로도 취급이 달라진다고?'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차리리 하는 행동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혐오감을 느낄 이유도 없었을 터였다.

증오와 분노만으로도 지칠 노릇이었는데, 거기에 이런 혐오감까지 느끼라니.

"처음 만났던 순간 그대로, 쭉."

그렇게 이어지면 되는 거야.

"..."

용사는 대답이 없었다.

내 머리통에 달린 뿔을 자른 뒤로부터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역겨울 위선으로 비춰질 뿐이었다.

설마 뿔이 없으니 내가 인간으로 보이기라도 한 걸까.

일리있는 생각이었다.

별로 기분 좋은 생각은 아니었지만.

"...발은, 치료하도록 해."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쓰지 마라."

그 어떠한 것도 용사 녀석에게만큼은 간섭 받고 싶지 않았다.

내 몸도, 마음도, 증오와 분노, 하다못해 이 몸뚱이에 새겨진 상처 하나까지 전부.

전부 다 내 것이니, 빼앗으려 하지마.

너에게 주는 건 몸 뿐이니까 감히 다른 것을 손 댈 생각 따위는 하지 말라고.

"욱, 윽......"

그렇게 용사의 품에 안겨 마을로 향하기를 잠시.

저 멀리에서 보이는 불빛을 마주하니 시야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몸 상태가 극에 극까지 나빠진 건지, 아니면 술이 들어간 상태로 뛰어다녀서 그런 건지 속이 상당히 매스꺼웠다.

아마 거울을 본다면 얼굴이 창백해져 있지 않을까.

"...잠시만, 잠시만 내려다오."

작은 흔들림에도 내 몸뚱이가 비명을 질러댔다.

품에서 나를 내려놓은 용사를 바라볼 새도 없이, 두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이, 아파.

"헉, 흐, 허억......"

가슴께를 움켜쥐고는 숨을 몰아쉬자, 옆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차라리 저 멀리 사라져줬으면 좋겠는데.

검게 물든 땅바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저 멀리에서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노래 한 곡 뽑아보겠습니다!"

"어이, 노래도 못 부르는 놈이 무슨!"

"와하하하하하!!!!"

고개를 들어올려, 활활 타오르는 불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쪽은 이렇게나 어두운데, 저쪽은 저렇게나 밝구나.

희미하게 보이는 그림자 사이로 푸른색 머리카락이 스쳐지나갔다.

저 멀리 있음에도 선명하게 틀어박히는 그 푸른빛에, 나는 숨을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용사."

그에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마을에 가까워질수록 몸이 안좋아지는 이유를.

그리고 속이 매스꺼워지는 이유를.

'아기를 빼앗아간 녀석들에게, 가까워지고 싶지 않아.'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마음에 난 구멍이, 그 커다란 공허감이 선명하게 느껴지니까.

그러니까.

"자, 네가 잘 하는 것이 있지 않느냐."

차라리 나를 범해.

나를 범해서, 임신시켜서, 아기를 낳게 해.

온기를 잃은 자의 공허감은 또 다른 온기로 채우는 수 밖에 없겠지.

그 온기가 후에 더 큰 공허를 불러온다고 하더라도, 분명 이런 방식으로만 극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까, 용사."

"..."

"나를 임신시켜다오."

처량한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함에 파묻혀졌다.

그럼에도 이 짙은 슬픔이 사라지지 않는 건, 내가 그 정도로 몰려 있다는 뜻이겠지.

...죽고 싶을 정도로.

***

땅바닥에 주저앉은 마왕을 바라보며, 용사가 눈을 내리깔았다.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공허한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마치 텅 빈 인형과도 같은 모습.

창백한 피부와 더불어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니,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자, 어서."

옷자락을 쓸어내린다.

전신을 가려놓은 옷가지가 반쯤 벗겨져,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젖가슴이 툭 튀어나왔다.

아기를 잃었다는 슬픔이 그정도로 커다랬던 걸까.

이내 옷을 완전히 벗어내고는 나신이 되어버린 마왕의 모습에 용사가 깊은 숨을 토해냈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잖아. 마침 상대도 원하고 있을 때가 기회 아니야?'

마음속의 목소리가 속삭인다.

언젠가부터 들리지 않던 음성이, 다시 한 번 제 머릿속에서 달콤한 유혹을 속삭이고 있었다.

해야만 하는 섹스라면, 차라리 마왕이 원할 때 하는 편이 낫다.

그런 식으로 설득해오는 목소리에 용사의 좆에 혈기가 돌기 시작했다.

"어차피 너 또한 나를 범해야 하는 상황이지 않느냐. 그러니까 빨리 범해라, 어서."

체념 섞인 목소리가 그를 재촉했다.

이런 꼴로는 만족하지 못했냐는 듯한 경멸 섞인 눈빛에, 용사는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게 아니야.'

부정의 말을 내뱉어야만 했다.

아니, 내뱉으려고 했다.

목구멍을 넘어 튀어나가려고 하는 순간 느껴지는 답답함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녀에게 말했을 터였다.

절대, 그런게 아니라고.

"이번에는 네가 만족할 때까지 해도 되니까..."

"...마왕."

"제발, 나를 임신시켜다오."

가느다란 손가락이 굳게 닫힌 꽃봉오리를 열어젖히자, 처음과 같은 모습 그대로의 붉은 꽃잎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서 넣어.

넣고, 허리를 흔들어, 정액을 싸지르라고.

그렇게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지만, 팔다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왜, 갑자기 마음이 변하기라도 했나?"

"..."

갑자기, 라.

갑자기라고 표현하기에는 애매했다.

그저 어느 한 순간부터 이렇게 되어버렸으니까.

'오히려 갑자기 마음이 변해버린 건ㅡ'

마왕을 처음 만난 순간, 곧바로 그녀를 죽이지 않고 성검에 피를 묻혔던 그때일 터였다.

모든 것을 잃은 자들이 여정 끝에 맞이한 희망.

하지만 그렇게 도착한 희망조차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깨달았을 때의 깊은 절망과 분노.

지금의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져 만들어진 존재나 마찬가지였다.

"아니면, 네 소중한 사람을 되살려내기 싫어진 건가?"

툭 내뱉어진 조소가 그대로 용사의 심장을 꿰뚫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웃기지 않는 소리 하지 말라고.

내가 너를 범하지 않는 건 그녀를 되살리기 싫어서 그런게 아니야.

그냥, 그냥ㅡ

"같잖은 위선 떨지 말고, 하던 대로 하거라."

역겨우니까.

그 말과 동시에, 마왕이 차가운 바닥 위로 몸을 눕혔다.

흙먼지가 묻어 새하얀 피부가 더럽혀졌음에도, 마왕은 별로 신경쓰는 모양새가 아니었다.

마치 남성의 성기를 원하는 창녀처럼, 그저 제 보지를 벌리고 가만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닥쳐, 이 창녀야.'

그래, 분명 그런 말을 했었더랬지.

창녀라고. 그딴 음탕한 몸뚱이로 나를 유혹하는 것이냐고, 그렇게 말했었지.

제 품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용사가 길다란 한숨을 쏟아냈다.

마음속에 남겨진 망설임을 지우려는 것처럼 길쭉하게 이어진 숨결이 그의 좆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절그럭거리는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리엘을 되살려 낼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분명 상대에게 하는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스스로를 타박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천천히 몸을 낮춘 용사가 제 바지춤에 숨겨져 있던 양물을 꺼내보였다.

변함 없는 크기와, 변함 없는 모양.

마왕의 안쪽에 몇 번이고 들락거렸던 자지가 굳게 닫힌 균열을 꾹, 찍어눌렀다.

"...읏."

이대로 조금만 더 힘을 주면 들어가겠지.

들이미는 모양 그대로 눌리는 살덩이에 용사가 숨을 들이마셨다.

분명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분노와 본능에 맞긴 채로 행하던 섹스였는데 왜 이렇게 망설이는지.

"흐, 흐읏, 흡..."

허리를 조금 앞으로 하자 저항감과 함께 귀두 부분이 마왕의 보지 안으로 박혀들어갔다.

고통을 참는 듯한 신음 소리에 순간적으로 움직임이 멈추었지만, 어떻게든 가장 깊숙한 곳까지 제 좆을 집어넣 수 있었다.

"큭..."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질의 수축감에 쾌락을 느끼는 제 몸뚱이가 야속하기만 했다.

정말이지, 웃기지도 않는구나.

하고, 용사가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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