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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66화 (66/342)

Chapter 66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1)

내가 한 가지 잘못 생각했던게 있다면, 지금 상황에서 가장 정신 나간 녀석은 용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간과하고 있었다.

용사 녀석이 가장 쓰레기라도는 해도 가장 정신이 나간 건 아니었는데.

"왜 아직까지 아기를 가지지 않은 건데?!"

"진정, 진정해!"

"어떻게 진정해! 어떻게 진정하냐고!"

마을을 나서자마자 발작하기 시작하는 마법사에 몸을 웅크렸다.

뺨을 얻어맞은 직후 내질러진 주먹이 명치를 가격했을 때는 정말이지 죽는 줄 알았다.

...마법사 주제에 주먹만 매워가지고는.

"저 년이 스승님을 낳을 때까지는, 절대 진정 못 해!"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이 내 몸을 잔뜩 지져댔다.

그 화염과도 같은 시선을 버티다 못해 다리를 움직여 뒤로 물러나니 엉덩이에 흙먼지가 잔뜩 묻어났다

"정신 차려, 아서. 어서 빨리 저 년을 임신시켜야 내 스승님이든, 네 소꿉친구든 다시 살려낼거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그녀의 비명과도 같은 외침에는 오로지 진실만이 담겨있었다.

마법사의 스승을 낳고, 용사의 소꿉친구를 낳고, 마침내 100만 명을 모두 낳아야 나 또한 원래의 세계로 돌아간다.

이럴 시간에도 섹스를 해서, 아기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됐다.

"에밀리, 알겠으니까. 알겠으니까, 다음 마을에 도착할 때까지만 참아!"

"...한 번 만이야."

시간을 벌어줘서 고맙다고 말해줘야 하나?

마법사를 달래는 용사의 모습에 진한 비웃음이 치솟아 올랐다.

봐, 이래서 네가 역겹다고 하는 거야.

내 의사 따위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선택을 해놓고, 그걸 배려로 포장하는 듯한 꼴이라니.

"...마왕 씨, 싫으시면 말씀하세요. 제가 전력을 다해서 막아드릴 테니까."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내 편은 있었다.

조금 의아하기는 했지만, 여태까지 방관만 하던 성녀가 내 손을 꼭 붙잡고는 결연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뭘까 대체.

어제 그렇게나 술을 마시더니 머리가 이상해지기라도 한 걸까.

"말이라도 고맙구나."

그래도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비록 말 뿐이라고 하더라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보다는 괜찮았다.

차라리 기대를 했다가 배신당하는 편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것보다는 나을 터였다.

"자, 일어나세요."

"...그래."

잘게 떨리는 손이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분명 고통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인 모양이었다.

아직도 갈 길이 멀구나.

응, 아직 한참이나 멀었지.

"자, 여기 연고라도 바르세요."

마왕군이 전멸하면서 쓸모가 줄어든 의약품들을 마을사람들이 나누어주었단다.

작은 병을 꺼내드는 성녀의 모습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신성력만 아니라면 상관 없어.

무언의 긍정에 상대가 빙긋 웃어보였다.

"읏..."

"아프셔도 조금만 참아주세요."

액체보다는 고체에 가까운 걸쭉한 무언가를 주욱 짜서는 내 얼굴에 치덕치덕 발라준다.

피부에 닿을 때마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따끔거렸지만, 어떻게든 우는 것 만큼은 참아낼 수 있었다.

겨우 이런 걸로 울면 체면이 말이 아니니까 말이지.

...응.

"앞으로는 마왕 씨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겠어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이제는 아주 내 호위를 자처해서는 꼭 달라붙는다.

성녀의 커다란 흉부가 내 팔뚝을 집어삼킬 기세로 꾹꾹 다가왔지만, 그 부드러움을 느낄 여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냥 다른 녀석들의 시선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힘이 부쳤으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성녀가 옆에 있는게 별로 좋은 것도 아닌데.'

그 빌어먹을 여신을 떠올리기만 해도 치가 떨렸다.

어쩌면 성녀가 내 옆에 찰싹 붙어있는 것도 전부 여신의 계략이 아닐까.

언제나 내 옆에 붙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괴롭히려고.

'.....설마,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겠지.'

가능성 있는 상상에 몸이 덜덜 떨려왔다.

성녀는 이런 나를 보며 연신 괜찮냐고 물어왔지만, 그 얼굴에 대고 차마 괜찮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괜찮지 않은데 어떻게 괜찮다고 해.

"그, 그래도 이렇게까지 붙어있을 필요는ㅡ"

"부탁드려요."

올려다본다.

잔뜩 올려다본다.

성녀의 푸른색 눈동자가 작은 반짝거림을 담고서는 내 안면을 툭툭 건드려댔다.

왜 이렇게 간절한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니 어찌나 기뻐하던지.

마치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방긋 웃어보이는게, 타박하고 싶어도 타박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변태만 아니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가장 큰 문제는 저 몸에 여신이 깃든다는 점이지만.

***

마왕 씨가 용사님의 품에 안겨서 마을에 돌아왔을 때는 조금 놀랐다.

분명 서로를 싫어하다 못해 증오하는 사이였는데, 그 밤 사이에 조금은 가까워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달까.

물론 술로 인한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르지.

지금도 서로 본체만체 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는 편이 더 좋겠죠."

좋으나 싫으나 서로 관계를 맺고, 아기를 낳아야 하는 사이가 되었으니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긍정적인 감정으로 임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물론 그 생각 한 켠에는 마왕 씨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지만서도.

"...그 녀석과 가까워지는 일 따위, 나는 못 한다."

아니, 안 한다.

옆에서 들려오는 단호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표정으로 쭈그려 앉은 마왕 씨가 제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작게 신음하고 계셨다.

"괜찮으세요?!"

"그냥, 머리가 조금 아파서 그렇다만..."

뿔이 잘린 뒤로 마왕 씨는 종종 두통을 호소하셨다.

그녀의 상태가 정확히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초췌해지고, 창백해진다.

먹는 양이 줄어드는 건 예사고, 먹는 걸 토해내기까지 하는 지경이었다.

"차라리 신성력으로 뿔을 재생시키면ㅡ"

"아니."

제 말을 자르며 튀어나오는 한 마디에 입술을 꾹 깨문다.

언제나 이런 반응이었다.

본인이 아파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는 것처럼 굴고, 절대로 치료를 거부한다.

물론 신성력이 꺼려진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마왕의 행동은 그녀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뿐이었다

'...제가 안 아프게 만들어 드릴 수 있는데.'

적을 베어낼 수 있는 힘도, 상대를 농락할 수 있는 지혜도 존재하지 않는 자신에게 있는거라고는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 뿐이었다.

치료를 거부하는 건 곧 자신을 거부한 것.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텅 빈 사람이 내세울 수 있는 건 운 좋게 얻은 것 정도가 전부였으니, 이런 반응을 보여도 어쩔 수 없는 법이었다.

"...괜한 말씀 드려서 죄송해요."

그럼에도 상대에게 사과를 하는 건, 스스로의 상태가 어떤지 직접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신성력을 사용하면 할수록 영혼이 깎여나간다.

그리고 그 깎여나간 자리에 또 다른 영혼이 차오른다.

그것이 여신님이라는 사실은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성녀는 아직 제 영혼의 소멸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은 마왕 씨와 더 같이 있고 싶어요.'

마음속에서 행해지는 수줍은 고백이었다.

비록 여러 착오가 있었다고는 해도, 그녀가 마왕을 향해 품은 감정은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

집착이라고 하기는 부드럽고, 단순한 관심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더 깊은 무언가.

그 감정에 대한 답을 얻기 전까지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마왕 씨, 하나 질문이 있어요."

"...말해보거라."

"만약, 제가 신성력을 쓰지 않게 될 수 있다면 마왕 씨와 더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을까요?"

간단한 질문이었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의 전부를 버리더라도 당신과 더욱 가까워지고 싶다는 뜻이 담긴 말.

엘리는 제 존재 의미인 성녀라는 자리를 포기해서라도 마왕과 함께 하고 싶었다.

".....그래."

망설임 끝에 내려진 긍정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라면 시간이 해결해줄 수 있을 테니까.

성녀가 아니게 된 자신이 과연 어떤 모습일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부디 긍정적인 방향이길 바라며 속으로 기도를 올렸다.

'여신님, 제가 성녀의 자리에서 내려온다고 해도 부디 노여워하시지 마시옵소서.'

당장의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마음 먹은 순간 기도를 올리는 편이 좋을 터였다.

이건 여신님을 증인으로 세운 일종의 맹세나 다름 없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마왕의 곁에 있겠다는, 스스로와 하는 약속이었다.

"저, 마왕 씨의 곁에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그런 자신의 말에 상대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물들었지만, 그럼에도 행복했다.

매일을 떠밀리듯이, 혹은 다른 이의 말을 따르듯이 살아온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자신만의 선택.

예쁜데 귀엽고, 가슴이 크고, 아이의 어머니인데 가끔씩 보여주는 아이 같은 모습에 더불어 보호욕구를 자극하는 가녀린 신체까지.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미쳤다고 할지도 몰랐지만, 상대를 바라볼 적에는 그런 이야기를 들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해버리는 것이었다.

"죽을 만큼 힘 낼테니, 꼭 지켜봐 주세요!"

먼 훗날을 상상하며 주먹을 꼭 쥔다.

부디 그때가 온다면 나도, 그녀도 행복할 수 있기를.

자그마한 중얼거림과 함께, 소망 한 조각이 하늘을 향해 살랑살랑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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