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7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2)
다음 마을까지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고, 동시에 험난했다.
애초에 처음 들렀던 마을이 마왕군에게 들키지 않았던 것이 신의 기적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니, 다음 마을까지 가는데에는 시간이 꽤 걸릴 터였다.
"마왕 씨, 업어드릴까요?"
"...체력도 좋구나."
한참을 걸었는데도 불구하고 쌩쌩한 모습의 성녀에 작게 감탄한다.
역시 용사 파티는 용사 파티라는 걸까.
이쪽은 죽을 맛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저 녀석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걷고, 또 걸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도 없는 놈들.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을 억지로 움직이며 한숨을 내뱉었다.
'쉬고 싶어.'
물론 녀석들이 걸음을 서두르는 이유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밤이 될 때마다 마수들이 들끓으니, 최대한 빨리 숲을 통과하려는 생각이겠지.
나 또한 그 기괴하게 생긴 녀석들을 더 보는 건 사양이었기에 어떻게든 쫒아가기 위해 열심히 발을 놀렸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보통 사람이라면 며칠이 걸릴 거리를 하루만에 이동한다.
지친 기색도 없이 계속해서 걷다가, 내쪽이 한계에 다다른거 같을 때만 잠시 휴식.
잠조차 제대로 자지 않고 이어지는 강행군에 피폐해지는 건 오로지 나 하나 뿐이었다.
"윽..."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건 둘째로 쳐도, 발의 상태가 심각했다.
먼젓번에 난 상처에 더불어, 쉬지 않고 걸으니 물집이 잡히고, 찢어지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
...이제 더 이상은 못 걸어.
투정을 부리듯 자리에 주저앉으니 다른 이들의 시선이 몽땅 이쪽으로 쏘아져왔다.
'.....지들은 안 지쳤다 이거잖아, 쓰레기 새끼들.'
퉁퉁 부어오른 종아리를 꾹 짓누르니, 다리가 덜덜 떨릴 정도의 통증이 척추를 타고 흘렀다.
행군을 했을 때도 이런 느낌이 아니었는데.
지끈거리는 머리통을 붙잡고 숨을 내뱉으니 순간적으로 시야가 빙글 돌았다.
"마왕 씨!"
"으? 어라..."
왜 하늘이 보이지.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을 멍청히 바라보고 있자니, 시야 가장자리에서 성녀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쓰러졌구나.
힘 없이 늘어져서는 가쁘게 숨을 내쉰다.
...이제는 진짜 무리야.
"조금만 쉬었다가 가자."
용사의 말에 다른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 녀석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지 나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지만, 지금은 몸을 더 쉬는 것이 우선이었다.
"끄응, 차."
"...그 정도로 무겁지는 않지 않느냐."
"헤헤."
내 머리를 스윽 들어올린 성녀가 제 허벅지 위에 내 머리를 살포시 올려두었다.
푹신푹신하고, 따뜻하다.
다른 녀석들에 비해 체온이 낮다보니, 성녀의 체온이 훨씬 더 따뜻하게만 느껴졌다.
"이번 기회에 잠이라도 더 주무세요."
"...그건."
"제대로 못 주무신거 알고 있으니까, 네?"
친절함이 가득 담긴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성녀의 말대로, 최근 제대로 잠에 들었던 적이 없었다.
매일마다 찾아오는 악몽은 조금의 안식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이 나를 괴롭혀댔다.
'...어제는 내가 낳은 아기가 내 목을 조르는 꿈을 꿨지.'
아직까지도 그 감촉이 생생했다.
분명 목이 졸리고,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는데 이상하리만큼 정신을 잃지 않았더랬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 잠에서 깬 뒤로부터 잠에 들지를 못했다.
...또 그런 꿈을 꿔버린다면, 다시는 아기를 낳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괜찮다."
사실 괜찮지 않았지만, 이런 말이라도 내뱉으니 조금 정도는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혹사 당했던 몸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 때문일지도 몰랐다.
무엇 때문이던 상관 없기는 했지만서도.
"제가 지켜드릴테니까, 조금이라도 눈 붙이세요."
지켜주다니. 누구에게서 누구를?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눈을 부릅 떴지만, 지치고 피곤한 몸뚱이가 이제 그만 수면을 취하라며 재촉해왔다.
잠들기 싫은데.
...차라리 꿈조차 꾸지 못할 정도로 깊게 잠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으."
이번에는 부디 그러기를 바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물론, 이 선택을 후회하게 될 때 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지만.
***
"너를 증오해."
내가 언제나 용사에게 했던 말이었다.
멍하니 고개를 들어올리니 얼굴이 검게 칠해져, 표정 하나 보이지 않는 사람 하나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눈앞의 사람은 눈이 없어서 노려보고 있다ㅡ 같은 표현른 잘못됐을 수도 있었지만, 대충 그런 느낌이었다.
"...결국에는 이런 꿈을 꾸는구나."
허탈하게 중얼거린다.
이번의 사람은 손에 기다란 창을 들고 있었다.
쥐고 있는 모양이 허술한게, 아무래도 이제 막 군인이 된 사람인 것 같았다.
"네가 죽인 거야."
뾰족한 창날이 내 몸을 꿰뚫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아픈 건 상대가 나에게 던지는 한 마디였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왜 내가 죽였다고 하는 거야.
나는 안 죽였어.
내가 안 죽였다고.
한 번, 두 번, 세 번.
창에 찔릴 때마다 피가 튀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뱃가죽이 완전히 들리는 걸로 모자라, 안의 살덩어리들이 완전 엉망으로 짓이겨졌다.
"너 때문이야.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으면, 너만 아니었으면ㅡ"
"...내가 죽인게, 아니야."
상대의 말에 반박하는 순간, 목소리가 멈췄다.
창을 내 명치에 꽂아넣은 채로 고개를 기울이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기괴하던지 반사적으로 눈을 꾹 감았다.
...이건 그냥 꿈이야.
깨어나면 돼.
꿈인걸 알고 있으니까 그냥 깨어나면 된다고.
"정말, 네가 죽인게 아닌 것 같아?"
질문과 함께, 상대의 머리 위에 숫자가 하나 새겨졌다
72.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남자의 등 뒤에서 또 다른 사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겨우 이번 한 번 가지고."
14.
"위선 떨지마."
109.
"용사를 욕할 자격도 없는 년."
8.
"죽어버려."
191.
"그만, 그만, 그만!!!!!"
사방을 가득 채우는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왜, 대체 왜, 왜!!
귀를 막아도 들려오는 목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내 몸을 찌르던 창날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내가 받는 고통은 배가 되었다.
"그만, 제발 그만....."
이제 꿈에서 깨고 싶어.
지옥 속에서 빠져나가고 싶어.
제발 누가 나 좀 깨워줘.
'누구라도 좋으니까, 제발...'
빌고 또 빌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나기는 커녕 사람들의 숫자만 점점 더 늘어날 뿐이었다.
팔이 검게 물들고, 하반신이 검게 물들고, 칼을 들고, 활을 들고, 뾰족한 송곳을 들고ㅡ
"마왕 씨."
그러다가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목소리는 이미 사방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이번 건 다른 것들과는 달랐다.
성녀.
그 목소리가 이토록 반갑게 들릴 줄이야.
"성녀, 거기에 있나? 거기에 있다면 제발 나를 깨워ㅡ"
"마왕 씨."
"...아."
사람들을 헤치고 다가온 성녀가 나를 향해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떨리는 시선이 성녀의 옆을 향했다.
더러운 웃음을 짓고 있는 고블린의 좆이, 새하얀 정액을 뚝뚝 흘려내고 있었다.
"......설마."
고개를 들어올린다.
성녀의 머리 위에는 1이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분명, 내가 처음 본 엔딩에서 성녀가 고블린들에게 윤간 당하던 스크립트가 있었더랬다.
"이미 충분히 살인자시면서, 왜 그렇게 억울한 척하시는 건데요?"
성녀의 눈꼬리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평범한 투명색의 눈물이 아닌 시뻘겋게 물든 선혈색 눈물에, 반쯤 기어가다싶이 뒤로 물러섰다.
아니,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 그건 그냥 게임이었어. 그냥 게임이었다고!"
지독할 정도로 이어지는 침묵에, 발작적으로 외쳤다.
온갖 저주의 말을 쏟아내던 이들이, 검게 칠해진 얼굴을 직각으로 기울이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수한 시선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이미 나가버렸을지도 모르고.
"겨우 게임?"
"겨우 게임?"
"겨우, 게임?"
손가락질한다.
그 무수한 이들의 오른손이 나를 향해 뻗어져, 전부 내 잘못이라는 것처럼 손가락질한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저들의 머리 위에 적혀있는 숫자는, 내가 플레이한 각기 다른 회차를 뜻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들은, 그 각기 다른 회차의 마왕ㅡ 나에게 살해당한 이들이라고.
"아, 아아, 아아아아아......"
무너져 내린다.
지금까지 내가 당해온 것들에 대한 증오가, 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산산조각 났다.
아니야, 그냥 게임이었어.
내가 그런 짓을 당하는 건 절대 게임 따위로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냥 게임이 아니었잖아.'
몸뚱이가 이렇게 되었다고 한들, 나는 여기에 존재했다.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임신하고, 아기를 낳고, 젖을 물린다.
그 중에서 무엇 하나 진짜가 아니었던 것이 있던가?
전혀.
"이곳이 겨우 게임 따위가 아니라 진짜 세계인 건, 전부터 인지하고 계셨잖아요."
성녀가, 1회차의 성녀가 나에게 쏘아붙였다.
내 목을 당장에라도 꺾어버리고 싶다는 듯한 눈빛에, 분명 숨을 쉬고 있음에도 숨구멍이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옥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속으로 중얼거리자 안면부가 검게 칠해진 사람들이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마아아아앗!!!!!?"
물론, 저항 따위는 헛수고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