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2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7)
머리가 어지럽다.
분명 할리벨의 체액으로 인한 발정 효과가 사라졌는데도 정신이 멍했다.
'...부디 행복해지세요, 마왕님.'
그 한 마디를 끝으로 내 등을 떠미는 그 얼굴을 떠올린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왕님께 드리는 선물이라며 건네준 작은 약병이 내 손에 꼭 쥐여져 있었다.
'용사가 너무 괴롭힌다 싶으면 사용하세요. 하루 동안은 꼼짝도 못하고 잠만 잘 테니까.'
마신 상대를 하루 종일 재울 수 있는 수면제.
본인 또한 너무 힘든 날에 조금씩 사용한다며 웃어 보이는 모습이, 어쩐지 아련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 이제 너는 어떻게 할 건데.
이런 걸 줘버리면 네가 힘들 때는 어떻게 할 생각인데?
그런 내 질문에, 그녀는 그저 웃는 얼굴로 답할 뿐이었다.
"...쓸데없는 물건을."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누구보다 짙은 동질감을 느껴버렸다.
그러니까 버리지 못한거겠지.
마치 죽은 사람의 유품을 간직하듯, 할리벨이 건네준 약병을 품 안에 꽁꽁 감추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어디로 가야 성녀를 만날 수 있을까."
꽤나 멀리까지 떠밀려 온 것 같아서, 과연 성녀를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길을 찾는 건 쥐약인데.
멍하니 골목 끝자락에 멈춰서 있다가, 이대로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열심히 발을 놀렸다.
'어서 빨리 성녀를 찾지 않는다면, 다른 녀석들이 내가 도망쳤다고 오해할 수도 있어.'
그렇게 되면 대참사나 마찬가지였다.
제멋대로 배신감을 느낀 용사가 처음과 같은 순간처럼 거칠게 강간을 할지도 모르지.
그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되새기자, 몸이 절로 떨려왔다.
"저기 저 여자ㅡ"
"한 번ㅡ"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사람들의 소음 사이로 목소리 두 개가 내 귓가에 스며들었다.
분명 웅성거리는 소리에 묻혀 사라질 법한 대화였지만, 어째서인지 그것만큼은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 녀석들, 아까 봤던 그 양아치들이잖아.'
머릿속의 위기감이 경종을 울렸다.
도망쳐.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험한 꼴을 보게 될 거야.
이렇게나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오히려 이상한 짓을 당하기 더 쉬울 터였다.
상하좌우 이리저리 움직이는 사람들의 틈을 뚫고 움직여, 어떻게든 걸음을 옮겼다.
"대체, 대체 어디까지 간 게냐."
아니, 정확히는 내가 너무 멀리 온게 맞겠지만.
그러다가 문득,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분명 주변이 사람들로 꽉꽉 들어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감만큼은 선명하게 느껴졌다.
"히긋, 누, 누구ㅡ"
"아리엘 씨!"
다행히도, 아까 그 두 양아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 팔을 꼭 껴안는 성녀의 모습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튀어나왔다.
"대체 어디에 다녀오셨던 거에요, 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 계세요?!"
"..그, 미안하구나."
진심으로 걱정했는지 그 얼굴이 희게 질려있었다.
어째서 이정도까지 놀라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걱정 받고 있다는 그 느낌이 별로 나쁘지는 않았다.
"자, 일단은 돌아가죠.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요!"
"그, 그래..."
내 팔을 잡아 끄는 성녀의 손길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길이 뭔가 다급해 보이는 건, 절대 거짓말이 아니겠지.
이유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
지금은 그저, 성녀의 걸음에 맞춰 열심히 걸을 뿐이었다.
***
"혹시 물 한 잔만 받을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며 동전 한 닢을 건네자,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남자의 표정이 부드럽게 펼쳐졌다.
돈이라는 건 역시 대단하네요.
이렇게 무서운 인상의 사람도 순하게 만들 수 있다니, 어쩌면 교단의 기도보다 더 효과가 좋을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으, 러니까..."
손 끝이 시릴 정도로 차가운 물병을 손에 꼭 쥐고는 열심히 다리를 움직인다.
지금까지의 여정 탓에 조금 쑤셔오기는 했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끄응, 차. 자, 잠시만요!"
사람들을 헤치고, 마왕 씨가 있을 과일가게 앞으로 향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틈을 빠져나오는 건 매우 고된 일이었지만 어떻게든 해내고야 말았다.
"......어라."
그러다가 문득, 눈에 띄는 새하얀 색의 복장에 시선을 빼앗긴다.
본인이 입은 옷과 같은 색, 같은 재질로 이루어진 옷.
저런 양식으로 제작된 옷을 입을 수 있는 건, 성녀 자신을 제외한다면 딱 힌 부류 밖에 없었다.
교단의 신관들.
'교단의 자매님이 왜 이런 곳에까지...'
"저, 저기요!"
그 뒷모습을 부른 건 반쯤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었다.
어쩌면 오랜만에 만나는 교단의 사람이 반가워서 반사적으로 불렀을지도 몰랐다.
주변의 소음들에 묻혀 제 목소리를 듣지 못할 법도 했지만, 상대는 용케도 성녀의 목소리를 듣고는 몸을 돌렸다.
"어머, 설마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붉은 기가 맴도는 금발과 푸른색 눈동자를 가진, 교단의 신관.
본인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그런 외형을 가진 사람은 단 하나 밖에 없었다.
"...배고니아 신관님?"
이름을 부른다.
제 이름을 듣자마자 진해지는 미소에, 성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원래라면 왕성에 계실 분인데, 어째서 여기까지 오신 걸까.
'설마 마왕 씨 때문에...'
아니 그럴 리는 없었다.
만약 마왕 씨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면, 이단심문관들과 함께 다니고 있을 테니까.
"꽤 놀란 표정이시네요, 성녀님."
"네, 조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상대에 귀를 기울인다.
베고니아 신관님의 대답 여하에 따라, 결단을 내리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얼마 전에 이곳에 있는 교단 분교에 대신관의 직책으로 파견되었답니다."
"아, 축하드려요!"
"저야말로 축하드려야죠."
성녀님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건, 마왕을 쓰러뜨렸다는 뜻이시잖아요?
태연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삐끗할 뻔한 표정을 순식간에 갈무리한 성녀가 베고니아 신관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드디어 교단으로 돌아오시는 거네요. 다른 신도들도 성녀님이 돌아오시기를 어찌나 기다리고 있던지..."
"이, 일단은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손에 쥐어진 물병을 꽉 움켜쥐고는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한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베고니아 신관님은 정말 좋은 사람이었지만, 마족에게 있어서는 한 없이 잔혹했으니까.
'만에 하나라도 마왕 씨를 만났다가는ㅡ'
꿀꺽, 하고 마른침을 삼킨다.
아무리 뿔을 잘라서 그 정체를 숨겼다고 하더라도, 순식간에 알아볼게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분명 마왕 씨를 죽이겠다며 곧바로 단검을 뽑아들겠지.
"그나저나, 성녀님."
"네, 넷?!"
"신성수는, 꼬박꼬박 잘 마시고 계시죠?"
그 질문에 말문이 막혀버린다.
얼마 전부터 마시지 않고 있다고는 했지만, 일단 마시지 않고 있는 건 마시지 않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거짓말에는 재능이 없어서 그런지, 대답을 생각하다가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안 드시고 계시는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그, 그러니까!"
"혹시 신성수가 전부 떨어졌거나, 제조하는 법을 까먹으셨다면 교단으로 오세요."
성녀님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테니까.
그 말을 끝으로, 베고니아 신관이 인파 사이로 사라졌다.
마치 신기루와도 같은 모습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기도 잠시, 이내 정신을 차린 엘리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불안하기는 하지만, 일단 지금은 마왕 씨를 찾는게 우선이에요.'
하지만 도착한 곳에는 마왕 씨가 없었다.
가게 주인에게 물어봐도 모른다는 답변 뿐, 어디로 사라졌는지 전혀 예측할 수가 없었다.
길을 잃었나?
아니면 설마 몹쓸 사람들에게 납치라도 당하신 건 아니시겠지?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ㅡ
'저희들을 피해, 도망치셨다거나.'
그런 생각을 하자니 심장이 욱신거렸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그녀에게 있어서 더 좋겠지만, 어째서 이렇게나 마음이 아플까.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마왕 씨를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다리를 움직인다.
'대체, 대체 어디로 가신건가요...'
마을의 중앙부터 끝자락까지.
발길이 닿는대로 움직였지만, 그녀가 가진 흑색 머리카락의 끝자락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쉬지 않고 뛰어나닌 덕에 숨이 가빠져 왔지만, 성녀의 머릿속은 온통 마왕에 대한 생각만으로 가득 차있었다.
"...아."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멈춰선 순간 익숙한 흑색이 시야 끝자락에 걸쳐졌다.
어서 상대를 불러보려 했지만, 숨이 차서 그런지 목소리가 나오지를 않았다.
이대로라면 마왕 씨가 멀어져.
벌써 저녁 시간이었기에, 지금 놓치게 된다면 영영 찾지 못하게 될지도 몰랐다.
"아리엘 씨!"
한계를 뛰어넘는다.
뜀박질을 할 때마다 폐가 잔뜩 쪼그라드는 것만 같았지만, 어떻게든 그 뒷모습을 붙잡아낼 수 있었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상대의 팔을 꼭 부여잡고는 몸을 밀착했다.
"대체 어디에 다녀오셨던 거에요, 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고 계세요?!"
"..그, 미안하구나."
잠시 숨을 고르고 외치자, 작은 사과의 말이 돌아왔다.
...화를 내려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살짝 처진 눈썹이 마왕의 얼굴을 안쓰럽게 그려냈다.
그래, 찾았으면 된 거지.
안도의 한숨을 토해낸 엘리가, 제 품에 안긴 마왕의 팔을 슬쩍 끌어당겼다.
"자, 일단은 돌아가죠. 벌써 저녁 먹을 시간이니까요!"
"그, 그래..."
일단은, 여관으로 돌아가는게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