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6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11)
"뭐, 그러면 불쌍하기도 하니까ㅡ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릴까요?"
"...뭐?"
여신이 빙긋 웃으며 내 뺨을 쓰다듬었다.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이 그 부드러운 손길에 순식간에 닦여 나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축축하게 물들었다.
"그러니까, 응, 그래요. 마지막 선택지를 다시 준다고 하면 어떨까요?"
당신 혼자만 생생하게 엔딩을 보시겠어요? 아니면, 다른 분들과 같이 보시겠어요?
킥킥 웃으며 말하는 여신에 입술을 짓이겼다.
...누구 놀리는 것도 아니고, 큭.
'만약 다 같이 본다고 정정하면, 내가 낳아야 할 아기의 숫자가 줄어들기도 하는 걸까.'
그렇게 된다면 용사와 해야 할 섹스의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게 되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이 전부가 그저 여신이 꾸며낸 농간에 불과하다면?
'만약 이 제안이 진짜라고 하더라도.....'
나라는 인간은 이렇게나 미련해서, 다른 사람들이 이딴 꼴을 겪는 걸 두고 볼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나 혼자 보겠다는 선택지를 고른게 최선이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안도감이 들었다.
그것이 정신 승리에 가까운, 추하디 추한 자기만족이라도 하더라도.
"나 혼자..."
"...어라."
"나 혼자만으로, 충분해."
여신은 꽤나 놀란 표정이었다.
마치 '내가 알고 있던 인간이랑 다른 것 같은데.' 같은 얼굴이었다.
이 빌어먹을 게임의 해피엔딩을 혼자 보겠다고 한 인간이, 다른 이들을 끌어들이지 않고 혼자 희생하는 선택지를 골랐다고?
하, 웃기지도 않아서.
...그런 느낌으로.
"멍청하시네요."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데 멍청하다는 말을 못 들을 건 또 뭘까.
재미없다는 듯한 얼굴의 여신에 가슴이 울렁거렸다.
한 존재의 불행을 겨우 재미의 유무로만 따지는 비인간.
마음 같아서는 뺨이라도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아아, 그러면 그렇게 멍청한 당신을 위해 좋은 소식 하나를 알려드릴게요!"
팔을 쭈욱 펼쳐낸 여신이 허공에 대고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광인의 그것과도 같이 몸서리를 치니, 동그랗게 떠진 눈동자가 달빛을 받아 형형하게 빛났다.
"최근에 한 신도가 마을 골목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들었지 뭐에요?"
...그래서,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저딴 말 따위는 들어도 아무런 이득이 없겠지.
이럴 때는 그냥 귀를 막은 다음 잠자코 있는게ㅡ
"골목의 사창가에, 마족이 있다고 말이에요."
"...!!"
그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어올리자, 시리도록 빛나는 푸른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고.
"여신의 뜻을 받들어 모시는 신도는 그 소문의 진상을 파악하기로 했고, 마침내 그 소문이 진짜라는 것을 알게되었죠."
"그만..."
"그렇다면 여기서 깜짝 퀴즈랍니다~♪"
교단에게 덜미를 잡힌 서큐버스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그만 두라고, 이 씨발 년아!!!!!"
"꺄악♥"
어, 어떻게 그래.
그녀가 얼마나 불행한지 알고 있을거면서, 어떻게 그러냐고!
나 하나로 충분한거 아니었어?
왜 그러는 건데 대체.
대체 얼마나 더 괴롭힐 생각인 건데?!
"흣, 귀염둥이 마왕에게 깔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네요."
어라,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마치 저를 때릴 것처럼 노려보시고.
퍽!!!!
"프, 프하하하... 이 사람, 진짜 때렸어. 여신을 때리다니, 신성모독이라구요?"
"닥쳐..."
닥치란 말이야.
제발 닥쳐.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마.
내 정신을 무너뜨리려고 하지마.
지금도 충분히 미칠 것 같으니까, 이 이상으로 나를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내가, 내가 대체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냥 꺼져버리란 말이야! 왜, 대체, 왜..."
주먹을 휘두르고, 휘두르고, 또 휘두른다.
온 힘을 다해서 뭉쳐진 울분이 여신의 얼굴에 부딪힐 때마다, 상대의 목이 이리저리 꺾여졌다.
...왜, 아프기라도 해?
이딴 쓰레기 같은 몸뚱이한테 맞아도, 아프긴 한가봐?
"그런데, 알고 그러시는 거죠?"
"...무슨 소리를ㅡ "
"이 몸이, 성녀의 몸이라는 걸 알고 그러시는 거냐고요."
눈꼬리가 휘어지다 못해, 샐쭉 찢어졌다.
시선은 내쪽이 아니라 그 한참 옆을 향하고 있었는데, 그 시건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면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있었다.
"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
대답은 하지 않았다.
변명 또한, 하지 않았다.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말하지 않았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용사의 모습에, 여신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애초부터 무리하고 있었으니까, 이 꼴이 나지.'
분명 때린 건 나였는데, 내 손등이 전부 까져서는 피를 질질 흘려대고 있었다.
뭐, 이제는 손등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피를 흘릴지 흘리지 않을지를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지.
"뭐하고 있냐고, 물었잖아."
"그냥 때려라."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저 눈.
그리고 분노를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까지.
이미 꼭지가 돌아버려서, 답을 정해놓은 채로 행해지는 말의 폭력이었다.
왜, 네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면 거짓말을 했다면서 그 폭력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려고?
지랄하지마.
"나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질문하지마! 그냥, 그냥 네 마음 가는대로 하면 되잖아..."
우리는 이미 첫 단추부터 잘못 꿰어진 거야.
설령 내가 기억을 잃어서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고 해도, 우리는 절대로 이 이상 친밀한 관계가 될 수 없겠지.
용사의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차라리 맞아 죽는 편이 제일 행복한 결말일지도 몰라.
...물론 저 미친 여신이 가만 두지 않겠지만.
"잠, 깐... 만요."
".....엘리?"
"저는, 괜찮으니까. 마왕 씨한테, 뭐라고 하지 말아주세요."
비틀거리며 일어난 여신ㅡ 아니, 성녀가 용사와 내 사이를 가로막았다.
뒷모습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덜덜 떨리는 몸 때문에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 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또, 속았어.'
그 빌어먹을 여신한테 또 당해버렸다.
대체 왜 이딴 일을 벌이는지, 그 머리통을 갈라서 확인해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엘리ㅡ"
"용사님!!!!"
용사가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하자, 성녀가 소리쳤다.
커다란 외침에 입을 다물은 용사의 옆으로, 거친 숨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리하고 있잖아.
그냥 비켜.
나 하나만 맞으면 되는 일인데, 왜 그렇게 미련할 정도로 버티고 서있는 건데?
"마왕 씨."
"..."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성녀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짐과 동시에, 그 끝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그 광경에, 나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절대로 붙어 있어서는 안되는 존재들이다.
서로이게 상처를 줄 수 밖에 없게 설계되어 있는 자동 인형 같은 삶.
...먼저 끊어내는 건, 더 나쁜 쪽이 하는 편이 좋겠지.
"꺼져라. 네 도움 따위 필요 없으니까."
"..."
"성녀가 마왕의 옆에 있다니, 정신이 있기는 한 건가? 지금까지 그 구역질 나는 신성력 때문에 미쳐버릴 뻔 했단 말이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성녀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그녀를 떨어뜨려 놓을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래. 이게 너한테도, 그리고 나한테도 좋은 일이야.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성녀의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졌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네가 내 눈앞에서 사라져 줬으면 좋겠다."
그 말을 할 적에는 목이 먹먹해져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성녀는 잘도 들은 모양이었다.
봐, 저 충격 받은 듯한 얼굴을.
속으로 마른 웃음을 내뱉으며 용사를 바라보았다.
당장에라도 나에게 달려들 듯한 모양새였지만, 제 앞을 막아서고 있는 성녀 때문에 참고 있는 듯 싶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건가요?"
성녀가 물었다.
물기에 젖은 것 치고는 꽤나 선명한 목소리였다.
"그래."
사실은 그렇지 않아.
입술을 짓이기며, 억지로 얼굴을 구겼다.
네가 정말 싫다는 양, 혐오스러워 미치겠다는 양 표정을 찡그렸다.
"......그렇군요."
느리게 눈을 깜빡인 성녀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제 앞으로 그녀와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는 날 따위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지.
그래도, 이 정도면 해피 엔딩 아닐까.
허구언날 능욕 당하던 여러 갈래의 엔딩 중에서 성녀가 멀쩡히 살아있는 엔딩이라니.
흐, 정말 감동적이잖아, 응?
"용사님, 저랑 약속 하나만 해요."
"...무슨 약속?"
하지만, 성녀는 곧바로 떠나지 않았다.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는 그대로 용사의 팔을 붙잡아 또박또박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와 약속을 하라고.
"제가 없어도, 마왕 씨에게 손 대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
"어서요."
그렇게 서로의 시선이 맞닿기를 몇 초,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용사를 보며 성녀가 빙긋 웃어보였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목구멍 근처에서 맴돌던 말이, 결국 나오지 못하고 저 아래로 곤두박칠 쳤다.
"그러면, 안녕히."
떠나가는 뒷모습을 붙잡지 못한 건 대체 무엇 때문일까.
미안함 때문에? 그것도 아니라면 두려움 때문에?
만약 두려움이 정답이라면, 대체 무엇을 향한 두려움이 그녀를 멈춰세우지 못하게 했는가.
"......아."
마지막까지 이어진 친절.
그리고, 그 친절에 대해 보답하지 못할 바에는 이렇게 보내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에서 나오는 두려움.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