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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77화 (77/342)

Chapter 77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12)

몇 번이고 토하고, 며칠이고 울었다.

결국 내가 마음을 조금이라도 준 것들은 전부 떠나가는구나.

미친듯이 웃기도 하고, 숨 쉬는 것을 잊은 사람처럼 가만히 누워있기도 했더랬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그래, 가만히 있는데 뭐가 어떻게 더 변하겠어.

"금방 돌아올 테니 안심해라."

레이나가 말했다.

...금방 돌아올 거라고?

그럴 리가 없잖아.

성녀를 두들겼던 손을 멍하니 내려다 보다가, 주먹을 꾹 쥐었다.

'이 손으로 때렸어.'

그 얼굴을, 쉬지 않고 때려댔다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이 여신이라는 것 쯤은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 순간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 결국 달려들었더랬지.

...알고 있잖아.

나도 용사와 똑같은 녀석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한참은 더 질질 짜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네?"

"..."

떨어질대로 떨어지니, 오히려 괜찮아졌다.

지금까지 내가 당해오던 것들에 정당성을 부여하니,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 내가 나쁜 거였어.

내가 나쁜 년이니까 이런 짓을 당하는 거였어.

지금까지 왜 그렇게 억울해 했을까.

전부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제, 너를 지켜줄 사람도 없구나."

마법사의 이죽거림에 느린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지켜주었던 유일한 사람이 떠났으니, 이제는 무슨 짓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왜, 고문이라도 하게?

아니면 저번처럼 단탈리온의 체액을 먹이나?

"눈빛이 상당히 건방져졌네. 마음에 들어."

"...이제 네 마음대로 하거라."

툭, 하고 내뱉었다.

사실상의 포기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지쳤어.

마음 고생하는 것도, 신체의 고통에 발악하는 것도, 언젠가 암컷으로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 치는 것도.

전부 다, 지쳤어.

"뭐, 좋아."

마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잔잔하게 타오르는 눈빛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불안감도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에게 두려움 따위가 존재할 리 없었으니까.

***

엘리가 떠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마음을 전부 추슬렀을 무렵이었다.

마왕을 향한 분노를 내리누르고, 참아내고, 삼켜낸다.

만약 그녀가 울고 있지 않았더라면 엘리가 제 앞을 가로막고 있었더라도 절대 참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엘리가 괜히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어.'

마왕의 탓이 아니라고 했었지.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떻게 그게 녀석의 잘못이 아닐 수 있는데?

상처 받은 듯 촉촉하게 물들었던 눈빛이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그러게, 믿을 녀석을 믿었어야지."

"...에밀리."

"어때, 이제야 정신이 들어?"

주욱 뻗어진 손가락이 용사의 미간을 쿡쿡 쑤셔댔다.

마치 놀리는 듯한 모양새에 기분이 나빠질 법도 했지만, 한두 번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간단하게 무시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유를 찾는게 우선이었으니까.

"엘리가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지 않아?"

에밀리의 고약한 버릇이었다.

일행 하나하나에게 사역마를 붙여, 위치와 행동을 파악한다.

전장에 있었다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상황을 알 수 있었기에 별 말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되어서야 지독할 정도의 미행이나 마찬가지였다.

"교단으로 돌아갔어. 어쩌면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에밀리가 손을 뻗으니 그 팔을 타고 작은 쥐 하나가 쪼르르 달려올라왔다.

찍찍거리며 우는 것이, 마치 말을 거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뭐? 이단 심문관들에게 들켜서 도망쳐 왔다고? 안으로는 들어가지 못했고? 정말이지 쓸모가 없네, 쓸모가 없어."

혀를 쯧쯧 차며 팔을 휘적이니 그녀의 팔에 붙어있던 사역마가 애처로운 소리를 흘리며 저 멀리 날아갔다.

...이단 심문관들이라.

마족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모습 자체를 보이지 않는 자들이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다고?

"......성녀가 교단으로 돌아갔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을 찰나.

비쩍 마른 목소리가 둘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왔다.

낮게 가라앉은 음성은 듣기만 해도 우울해질 정도였지만, 그 안에 날카로움을 품고 있었다.

"무슨 소리냐고 묻고 있잖아!!"

특유의 말투조차 집어치운 마왕이, 그대로 에밀리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는 듯 분노하고, 소리치고, 절망한다.

어째서 막지 못한 거야.

어째서 막지 않은 거야.

작은 탄식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

"어서 오세요, 성녀님. 마음은 정하신 건가요?"

"...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다.

단지 계기가 없어서 미뤄두고 있었을 뿐.

성녀의 직책에서 내려옴과 동시에 신성력을 잃게 된다면, 여신께서도 이 육신에 깃들지 않으시겠지.

"자, 일단은 치료부터 하도록 해요."

베고니아 신관의 손길이 엘리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아프네요.

필사적으로 제 얼굴을 두들기던 주먹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켰다.

...사실, 알고 있었다.

'어렴풋하게 떠오를 뿐이지만...'

여신님이 하신 말씀. 그것의 의미를 되새긴다.

분명 마을의 사창가에 마족이 있다고 하셨지.

그 마족에 대한 소문을 교단의 사람들이 들었다고도 하셨고.

...마왕 씨는, 그 마족이 해를 입을까봐 분노하신 걸까.

"이렇게 돌아오시니 기쁘네요, 성녀님."

"...엘리라고 불러주세요, 베고니아 신관님."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이었다.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옛날부터 자신을 돌봐주던 사람에게 떠받들어지다니.

그것만큼 어색한 경우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이제는 성녀가 아니게 될 테니까요."

"그렇군요."

태연하게 내뱉어진 한 마디였다.

베고니아 신관님은, 제가 성녀의 자리에서 내려와도 아무렇지 않으신 건가요?

성녀가 아닌 저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데.

"저는, 오히려 당신이 성녀가 아니었으면 좋겠답니다."

저와 같은 신관으로써 있어주셨으면 좋겠다고, 예전부터 생각해 왔어요.

그런 베고니아 신관의 말에 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성녀라는 자리는 자신과 맞지 않았던 것일지도 몰랐다.

"자, 그러면 가도록 하죠."

"저, 그런데 베고니아 신관님. 하나 물어볼게 있어요."

문득 떠오른 사실에, 엘리가 상대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 다급한 움직임에 걸음을 멈춘 베고니아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며칠 전에 골목길에서ㅡ"

"쉬이..."

가느다란 손가락이 입술을 꾹 짓누른다.

둥글게 휘어진 눈동자 안에 서늘한 한기가 잔뜩 서려있었다.

그 차가움에, 엘리가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알려고 하지마.

못 본 걸로 해.

...그래, 그러면 돼.

"누구였을까요, 그건?"

짧은 질문과 함께 빙긋 웃어보인 베고니아가, 느린 움직임으로 제 배를 쓸어내렸다.

그 행동이 마치 임산부가 제 뱃속의 아기를 느끼려는 듯한 행동 같아 보였다면 그저 기분 탓일까.

"들어오세요, 오랜만에 함께 기도를 드리도록 하죠. 겸사겸사, 그때 하지 못한 일도 하고 말이에요."

뒤를 따라 기도실 안으로 들어서자, 언젠가 맡았던 그리운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신성수의 냄새.

멍하니 주변을 둘러본 엘리가, 여신상의 앞에 놓여져 있는 작은 병 하나를 천천히 집어들었다.

"오랜만에 보시죠?"

"...그렇네요."

어렸을 때부터 마시던 것.

어쩌면 물보다 더 많이 마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처음 마셨을 때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도 까먹어버렸다.

...애초에 몰랐을지도 모르겠지만.

"자, 드세요. 드시고, 성혈식을 시작하도록 하죠."

"......네."

성혈식.

오랜만에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분명 성녀가 되기 전에는 기대하던 일이었는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나 불안한지.

'...이걸로 성녀가 아니게 된다면.'

당신의 옆에 설 수 있을까요.

병 안에 담긴 액체 위로, 자신의 얼굴이 비쳐보였다.

근심과 걱정이 가득한 그 표정을 반쯤 노려보듯 바라보다가, 이내 그 내용물을 집어삼켰다.

"흑, 으윽..."

마시는 동시에, 목이 타올랐다.

"그러게, 매일마다 꼬박꼬박 마시라고 말씀 드렸잖아요."

여신님의 축복을 거부한 자가, 다시 그 축복을 받아들이려고 한다면 당연히 괴롭지 않겠어요?

베고니아가 말했다.

그것은 마치 여신의 사도라기보다는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아, 엘리는 몸을 덜덜 떨 수 밖에 없었다.

'아파, 괴로워, 계속 마실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켁켁거리며 마른 기침을 토해내고는 제 목을 붙잡았다.

여신이시여, 제발 이 어린 양을 용서해주소서.

제발 이제 저를 놓아주시옵소서.

제발, 제발, 제발...

"당신도 곧 있으면 어엿한 교단의 신관이 되는 거랍니다."

몸을 채우는 뜨거움이 점점 몸 전체로 퍼져나갔다.

아파, 아파, 아파...

'...아니, 이건 아픈게 아니라ㅡ'

가슴팍을 그러쥐니, 짜릿한 전류가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제서야 제 몸뚱이가 느끼는 감각이 고통이 아닌 쾌락이란 걸 깨달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버린 상태였다.

"이게, 대체..."

너무 기분 좋아서, 오히려 아파.

숨을 들이쉴 때마다, 신성수가 지나간 목구멍의 세포 하나하나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이게 정말 신성수가 맞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라던지.

"의심하지 마세요. 그건 당신이 마시던 신성수가 맞답니다."

베고니아 신관이 짝짝 박수를 치니, 기도실의 문을 열고 커다란 남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고개를 올려다 봐도 모자랄 정도로 거대한 그 남자는 날 것 그대로인 상태에서, 얇은 천 하나로 하반신만을 아슬아슬하게 가리고 있었다.

"성녀는 언제나 깨끗한 몸ㅡ 처녀여야만 한다."

그 말은 즉슨, 성녀가 아니게 되려면 처녀를 포기하면 된다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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