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8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13)
"구히러, 가야 해. 구하러 가야 된다고!"
"...뭐라는 거야, 이거 안 놔?"
에밀리가 팔을 뿌리치자, 마왕이 힘 없이 주저앉았다.
구하러 가다니, 누구를?
머릿속에 드는 의문 끝에 떠오르는 얼굴은, 단 하나 뿐이었다.
"...용사, 제발. 제발, 내 말 좀 들어다오."
큼직힌 눈물이 맺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제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마왕이 애처롭게 부탁하는 모습에 머릿속이 어지럽게 물들었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설명부터 해."
원래라면 무시했을 법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감이, 혹은 지금까지 쌓여왔던 죄책감과 비슷한 무언가가 그녀의 말에 귀 기울기게 했다.
말해 줘.
지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해 줘.
"...여신이, 성녀의 몸에 깃드는데. 그러니까, 그, 윽."
횡설수설하며 이야기를 시작하다가도, 몸을 덜덜 떨어댄다.
신성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엘리의 몸에 여신이 깃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순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부 그 여신이 꾸민 일이야.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때부터."
정말 기억나지 않는 게냐?
내가 성검에 베였을 때, 그리고 그 뒤에 여신이 나타났을 때 그녀가 뭐라고 말했는지를.
'마왕은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하고 했었지 않느냐.
설마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건 아니겠지?
"...윽."
머리가 지끈거렸다.
분명 여신이 지상에 강림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당시의 기억이 흐릿했다.
그런 기억을, 절대 쉽게 잊을 수는 없을 텐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니, 뿌옇게 물들었던 머리 한 켠이 점점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저주에라도 걸렸던거 아니야?"
에밀리가 말했다.
저주.
그가 저주에 걸렸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말해왔다.
"신이 걸어둔 저주인만큼 알아차리기도 힘들었겠지. 뭐, 표정을 보니까 그때 일이 기억나기는 하나 봐?"
분명 처음에는 기억하고 있었다.
마왕이 아무도 죽이지 않았노라고.
그리고 그것을 여신이 말해준 것까지.
'언제부터였지?'
소중한 이들을 되살릴 수 없다는 이야기와 함께 덮쳐진 절망.
절망에서 피어오른 증오와 분노까지.
그 증오와 분노에 휩싸여 마왕을 강제로 범하고, 범하고, 또 범했더랬다.
그의 마음속에 오로지 증오만이 남을 때까지.
"마족의 뿔에는, 저주막이의 효과가 있거든."
설마 신이 건 저주까지 막아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멍하니 품 안의 뿔을 만지작거리니, 특유의 감촉이 용사의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확실히 그때부터였다.
'마왕에 대한 증오가 확연하게 줄어든게...'
그녀의 뿔을 자르고, 그 뿔을 건네받았을 때부터.
설마 마왕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제 뿔을 건네준 걸까.
'어쩌면, 우리 모두 속았을지도 몰라.'
하늘에 계신 그 위대한 존재에게 농락 당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째서 여신을 불러내는 방법이 성검에 마왕의 피를 묻혀야 하는 것일까.
왜, 그녀의 피가 매개체가 되어야 하는 거지?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건 일단 나중에 이야기 하고, 지금은 성녀를 구하는게 우, 우선이다..."
제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감각에, 용사가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래, 일단은 그게 먼저겠지.
믿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녀를 매정하게 내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용사는 마왕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였기에.
"정말 엘리가 위험한지는 모르겠지만ㅡ"
그런 말을 하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린다.
처음 여정을 떠날 때, 제 꿈 속에서 여신이 무엇이라고 말했었지.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전쟁으로 죽은 사람들을 모두 살려주겠다.' 라는 말을 했었지.
"ㅡ여신은 이미, 믿음을 잃었어."
그런데 정작 마주한 건 소원 하나.
그 뒤에 이어진 말실수와 모든 것을 망쳤다는 죄책감과 마왕에 대한 증오까지.
하나 같이 엉망으로 연결되어진 바보 같은 이야기였다.
만약 당시의 기억조차 지워진 것이라면?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가자, 엘리를 구하러."
***
성혈식을 거행한다. 성혈식을 거행한다. 성혈식을 거행한다!
주변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신성수가 주는 발정 효과와 함께 찾아오는 몽롱함이, 엘리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손을 움직여.
어떻게 하면 기분 좋아질 수 있는지 알고 있잖아.
안 그래?
응?
"아아, 엘리. 저는 당신이 훌륭한 신관이 될 수 있을거라고 믿고 있답니다."
그리고, 결국 성녀의 자격을 내려놓을 것 까지도 말이죠!
베고니아가 미친 듯이 외쳤다.
신성수가 가득 채워진 그릇을 두 손으로 떠받든 그녀는, 엘리의 주변을 빙빙 돌며 깔깔 웃고 있었다.
"성녀가 무엇이라고. 용사가 무엇이라고. 마왕이 무엇이라고!!"
"...그만, 둬주세요."
"전 당신만 있으면 됐는데. 당신이 제 옆에만 있었으면 됐다고요, 네?"
그릇이 기울어지고, 그 안의 내용물이 엘리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머리카락을 티고 흐른 신성수가 피부에 닿으니 마치 불에 데인 것처럼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뜨거, 워...'
허벅지를 마구 꼬집는다.
마시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신체 전체를 신성수 범벅으로 만드려는 행동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성혈식을 함으로써, 당신도 어엿한 신관이 되는거에요. 아이를 가지고, 아이를 낳는, 그런!"
베고니아의 외침에, 엘리는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성혈식의 의미와, 지금까지 교단에서 가르쳐 온 것들에 대한 것까지.
"...당신들은, 미쳤어요."
"아?"
"관계를 가지는 건, 사랑이 있어야만 한다구요!"
성혈식이라는 명목으로 아기를 가지게 한다고?
그리고 그것으로 신관이 되고?
짐승조차 하지 않을 정도의 정신나간 짓이었다.
'심지어 이상한 걸 먹이기까지 하고...'
이미 엘리의 머릿속에서 신성수란 먹어서는 안 될 것 그 밑까지 격하된 상태였다.
몸을 강제로 흥분하게 만드는 물건을 어렸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마시게 하다니.
"사랑이라면, 여신님의 사랑이 있잖아요?"
"..."
"여신님이 계시고, 여신님의 사랑이 있으니 괜찮아요! 아아, 여신님! 당신의 성녀가 드디어 위대한 어머니가 되려 합니다!"
그릇을 내려둔 베고니아가 하늘을 향해 양 팔을 쭉 뻗어내며 미친 듯이 외쳤다.
그와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구의 남자에, 엘리의 몸이 움찔거리기 시작했다.
'모, 몸이 강제로...'
신성수의 탓인지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고간에게서 시선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달려들지 않은 건, 상대에게 마음이 없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 이런 건 마음이 중요한 법이라구요.
"이런 건, 사랑이 아니에요."
가쁘게 숨을 내뱉는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마왕의 얼굴에, 엘리의 입꼬리가 빙긋 솟아올랐다.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심장이 뛰고, 떠올리는 것을 멈추고 싶지 않은 사람.
지금 느껴지는 이 감정을 과연 무어라 설명하면 좋을까.
"당신이 사랑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러시는 건가요?! 아아, 역시 그때 성혈식을 했어야만 했어! 세상을 돌아다니며 이런 이단자가 되었을 줄은!"
확실히, 사랑에 대해서 아는 것 따위는 없었다.
피와 슬픔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단언할 수 있었다.
제 심장을 간지럽히는 이 자그마한 감각.
이따금 커지고, 불처럼 타오르는 이 감정이 바로 사랑이라고.
"이단이라면, 파문되는 건가요?"
"...네?"
"파문 시켜주신다면, 기꺼이 받아들일게요."
돌려 말하는 것 따위, 배운 기억은 없었다.
이단이라는 말에 눈을 깜빡인 엘리가 그대로 파문을 입에 담았다.
제 인생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교단이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모든 것을 내버려도 될 것만 같았다.
'전부 잃었다면, 처음부터 다시 만들면 되는거니까요.'
앞으로는 교단의 성녀가 아닌, 그냥 엘리로 살아가겠다.
오직 그 생각 뿐이었다.
"아니요. 제가 용납 못해요."
...상대의 생각은 다른 것 같았지만.
"시작하죠. 성녀가 더 이상 이상한 생각을 하기 전에, 사랑의 노예로 만들어야만 해요!"
베고니아의 외침에 그녀의 옆에 서있던 남자가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엘리의 허리춤을 움켜쥐자, 엘리가 고통과 쾌락이 섞인 신음을 토해냈다.
...싫어.
"그만, 둬주세요. 제발..."
마침내 그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고, 남자의 좆이 제 하복부에 맞닿았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거칠게 맥동하는 거대한 음경에, 엘리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마음속에 드는 건 오로지 공포 뿐.
약물로 절여져, 억지로 그 쾌락에 떨어질거라는 상상을 하니 심장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마왕 씨, 당신이 이런 기분이셨군요.'
억지로 맺어지는 관계 따위, 기분 좋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 관계에서 억지로 쾌락을 느끼게 된다면 더더욱.
그 사실을 이제서야 깨닫다니, 정말 바보가 따로 없었다.
"저도, 이제 당신과 똑같아지는 걸까요..."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희미한 중얼거림이 기도실 안에 스며들었다.
두 손을 꼭 붙잡고, 눈을 감고는 뒤이어 이어질 고통과 쾌락을 기다린다.
결국에는 제가 저지른 죄를 이렇게 돌려받게 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순간,
"엘리!!!"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