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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79화 (79/342)

Chapter 79 -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14)

"...마왕, 씨?"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절대 들려와서는 안될 목소리가 성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나저나, 이름으로 불러주셨네요.'

언제나 성녀라고 부르던 사람이, 이번만큼은 제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 단순한 사실이 너무나 좋아서, 이런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터져나왔다.

"신성한 성혈식을 방해하다니, 이런 이단자들이!"

"엘리!"

남자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게 사내의 머리를 베어낸 용사가, 떨어져 내리는 엘리를 가뿐하게 받아들었다.

"...용사님."

"엘리."

또, 저 때문에 사람을 죽이셨네요.

언젠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마족에 협력하여 자신을 제거하려고 했던 부패한 귀족들.

그런 귀족들을 베어내면서 지금과 같은 표정을 하셨었지.

"당신의 잘못이 아니에요."

모든 건, 부족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어,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서, 설마 이미 당해버린 건ㅡ"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고 있자니, 제 어깨를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거칠지만 그 속에 담긴 걱정이 느껴져서 엘리는 반사적으로 웃음을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 한 마디.

괜찮다는 그 말 한 마디에 횡설수설하던 마왕의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다행이다."

"..."

"정말, 정말 다행이다. 다행, 다행이야..."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언제 보아도 느끼는 것이지만, 참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많이 우셨으니까 이제는 그만 우셔도 될 것 같은데.

속이 쓰렸다.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쳐들어 온 건데?"

기도실의 문을 열고, 에밀리가 들어왔다.

등 뒤에 보이는 붉은 화염을 보니, 아무래도 교단의 건물에 불을 지른 것 같았다.

"그래도, 뭐. 교단에 불이 났고, 그 불로 인해서 신도들은 전원 사망ㅡ 정도면 대충 괜찮으려나."

"당신!!"

태연하게 내뱉어지는 말에 엘리가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의 목숨을 그렇게 쉼게 생각하다니, 그게 무슨ㅡ

"그러게, 왜 이런 곳에 제 발로 들어간 건데?"

"..."

귀찮다는 듯 제 옷자락을 툭툭 털어내는 행동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요, 당신은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죠.

한 없이 이기적이고 한 없이 미쳐있는, 그런 사람.

"약속은 지켜. 손을 빌려줬으니, 대가는 치뤄야지."

"...그래."

에밀리의 말에 마왕이 의기소침하게 답했다.

그 대가가 무엇인지 직접 듣지 않아도 알 것만 같았다.

분명 제 스승님을 낳으라며 강요했겠지.

"마왕 씨, 하기 싫으시면 하지 않으셔도 되요."

"...아니, 나는 괜찮다."

마왕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끝까지 뜯어말릴 생각이었지만, 그녀의 눈동자 안에 깃든 의지가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무슨 결심을 하셨길래 그런 눈빛을 하고 계시는 건가요.

"일단은 빠져나가자."

시간이 없었다.

에밀리가 사용한 마법이라면, 이 건물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 버릴 것이 틀림 없었다.

일단 이야기를 하는 건 건물 밖으로 나간 다음이 되어야 할 터였다.

"엘리, 당신이 이럴 수는 없어요.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절규에도 엘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몸을 달구는 뜨거운 열기와 더불어, 어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만 싶었다.

하지만 마음 속에서 고개를 들어올리는 안타까움은 쉽게 참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힘들고, 괴롭지만 세상은 참 아름다운 곳이라고.

이 모든 여정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돌아가겠다고.

그리고, 저는 잘 지내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안녕히."

배고니아의 외침이 불길에 휩싸여 타들어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

교단이 불에 타 전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건 여관으로 돌아온 직후였다.

지친 몸을 이끌고 침대 위에 몸을 던지니, 엘리가 살풋이 웃어보였다.

"고마워요, 저를 구해주셔서."

"...그래."

이름으로 부른게 실책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대로 성녀라고 부를 걸.

후회는 빨라도 늦는 법이었기에,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줬다.

지금은 따로 해야 할 말이 있었으니까.

"미안, 했다."

"네?"

"진심이 아니었다. 사실은, 네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그냥, 내가 무서워서ㅡ"

그 여신이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신체 내부를 파고들던 신성력의 감각을 떠올리며 몸을 덜덜 떨었다.

...이번 일도 결국은 내가 아파서 벌어진 일이었잖아.

"괜찮아요."

"...아."

그제서야 실감이 됐다.

엘리의 얼굴을 보고, 그 미소를 눈에 담아낸 다음에야 실감이 됐다.

잃지 않았어.

이번만큼은 잃지 않았어.

"아, 흐......"

"우, 울지 마세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안도감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 때문인지 마치 둑이 터진 것처럼 펑펑 쏟아졌다.

앞으로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만큼은 이대로 있고 싶었다.

"...킁, 용사."

그러고 보니 저 녀석이 있었지.

용사는 나와 엘리가 서로 부둥켜 안은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담긴 미묘한 감정에, 기분이 이상해졌다.

"...왜?"

무언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대답이 조금 느리게 돌아왔다.

"따로 이야기 좀 하자꾸나."

용사가 제 녹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마치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잠시 다녀오마."

"무리하지는 마세요, 마왕 씨."

엘리의 말에 잠시 멈춰선다.

그러니까, 그.

우물쭈물 하다가도, 부끄러움을 이겨내고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름으로, 불러도 되니까."

내 말을 들은 엘리가 환하게 웃어보였다.

"네, 아리엘 씨!"

조금은,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

"나는 여전히 널 용서할 수 없다."

대뜸 튀어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리 여신이 손을 썼다고는 해도 결국 저지른 건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짓을 다른 이의 잘못으로 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까지 와버렸으니까.

"...그래도, 이번만큼은 고맙다고 생각하니까. 응, 그래."

"..."

"고마워, 아서."

비겁했다. 아주 빌어먹을 정도로 비겁했다.

저 미소에, 저 목소리.

진심을 담은 감사 인사를 듣고 혹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심지어 그것이 얼마 전까지ㅡ 아니, 어쩌면 현재까지도 자신을 증오하고 있는 존재의 감사 인사인데.

"너는, 정말 그걸로 괜찮겠어?"

"뭐가 말이냐."

마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 밑을 칠한 검은 자국이 그녀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일러주고 있었다.

...지금도 무리해서 움직이고 있는거겠지.

"정말 여신이 우리들을 속인거라면, 굳이 이런 짓을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죽인 만큼 낳아라.

실상은 마왕이 아닌 마왕군이 죽인 이들을 낳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여신의 농간으로 인해 시작된 것이었으니, 이제는 그만두어도 좋을 터였다.

"...내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마치 한숨과도 같은 대답이었다.

마왕군.

그리고 그들의 가장 위에 있는 마왕.

책임을 물을 이들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마왕이 할 수 있는 건 그들의 업을 대신 짊어지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너도, 네 소꿉친구를 되살려야 하지 않겠나."

그래, 그래야지.

아리엘을 되살려야지.

그러기로 했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미안해."

용사가 말했다.

"...뭐가 말이냐."

갑작스러운 사과에, 마왕이 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치 화를 참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해왔던 짓들 전부, 미안해."

태어난 아기를 보며 지은 감격에 겨운 미소.

아기를 떠나보낼 때의 슬픔.

자신을 향한 분노와 증오.

그리고 엘리를 구하러 가야한다고 울부짖던 그 모습까지.

그제서야 용사는 진정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마왕은, 그 누구도 헤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에게는 어떠한 죄도 없다는 것을.

"내가 잘못했어."

용사가 꾸벅, 하고 고개를 숙였다.

상대가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반응이 돌아오더라도 겸허히 수용할 생각이었다.

때릴까?

아니면 욕을 할까.

어쩌면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며 이를 갈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자신이 마왕에게 해온 짓들은 그 정도 끔찍한 것들이었기에.

"용서 할 리가 없잖아."

울음 섞인 목소리에 용사가 천천히 머리를 들어올렸다.

양 눈꼬리에 눈물을 주렁주렁 단 마왕이 그를 잔뜩 노려보고 있었다.

그 속에는 여전히 자신을 향한 증오가 담겨있었지만, 예전처럼 격렬하지는 않았다.

"알고 있었어. 네가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것 쯤은."

"...우리들의 관계는ㅡ"

"가장 처음의 것으로 충분하다, 맞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관계.

단순히 그 정도면 된다고.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도 좋아."

천천히 손을 뻗어, 마왕의 뺨을 적신 눈물을 닦아낸다.

물기에 젖은 황금빛 눈동자가 보석과도 같이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떨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네가 나를 용서할 수 있게 되면."

그리고 나도 너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면.

"그때 다시 이야기 해줬으면 좋겠어."

"..."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알고 있다.

갓 성인이 된 뒤로부터 지금까지 마족을 증오하고, 마족과 내통하는 자들에게 분노하고, 마왕에게 살의를 느꼈더랬다.

그러니까 하는 이야기야.

...네가, 이제 그만 고통 받았으면 좋겠다.

단지 그 뿐인 이야기였다.

"......생각, 해보마."

애매한 대답이었지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못해 차고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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