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82화 (82/342)

Chapter 82 - 사랑하는 나의 스승님.(2)

"우웩, 우에에엑......"

겨우 두 번의 임신이었지만, 감히 단정지을 수 있었다.

이번의 아기는 다르다고.

뱃속에 있을 때부터 나를 괴롭히는게 아주 보통 솜씨가 아니었다.

음식을 먹자마자 토하게 하는 건 예사에, 불면증 때문에 잠까지 제대로 못자게 되어버렸다.

".....정말이지, 벌써부터 말썽을 피우는구나."

대체 어떤 개구쟁이가 태어나려고...

힘 없이 중얼거리며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매일마다 잠을 못자고, 음식도 먹지를 못하니 아주 죽을 맛이었다.

....차라리 죽는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자, 여기 물이라도 드세요."

"물 마시는게 힘드시다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어요! 물론, 입과 입을 통해서...♥"

물병을 내미는 엘리를 밀쳐내며 할리벨이 외쳤다.

그녀의 하트 모양 꼬리의 끄트머리가 내 팔뚝을 콕콕 찔러대는 것을 보니 헛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무슨 이세계 전생물도 아니고, 미녀들에게 둘러싸여서 간병을 받다니.

"......마음만 받으마."

목이 비쩍 말라서 그런지 형편 없는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물을 마시고 싶기는 했지만, 뱃속에 든 아기가 물조차도 거부했기에 그저 참아낼 수 밖에 없었다.

'저번에 늦게 나오라고 빌어서 그런지, 벌을 받는 것 같네.'

실 없는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참이나 잠을 자지 못해서 정신이 몽롱했는데, 정작 몸은 잠에 들지를 못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차라리 누군가가 나를 기절시켜주면 좋을 텐데.

"아리엘 씨, 이러다가는 진짜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엘리가 걱정이 듬뿍 들어간 표정으로 말해왔다.

산모와 아기에 대해 빠삭한 이론을 가지고 있는 그녀가 하는 말이니 틀린 말은 아닐 터였다.

그러니까, 뭐라고 말했더라.

'그런 몸으로 임신을 하시다니, 위험하다고요?!'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뚱이가 뱃속의 아기를 버티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고 했었지.

그러면서 나를 임신시킨 용사를 찾아가 마구 따지기도 했더랬다.

그런 엘리의 반응을 태어나서 처음 봤는지, 잔뜩 당황한 듯한 표정이 꽤 우습기는 했다.

'......억울해.'

다시 생각하니 억울해 미칠것 같았다.

내 안에 싸지른 건 용사인데, 왜 힘든 건 나만 힘든 건데?

한 번 시작된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사상 최악의 강간마가 사탄도 울고 갈 희대의 개 쓰레기 싸이코패스가 되는데는 별로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용사는 코빼기도 보이지를 않는구나."

처연한 중얼거림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미안하다며.

지금까지의 일들 전부 사과하겠다며.

그런데 왜 지금 내 옆에 없는 건데?

'나쁜 놈.'

쓰레기 새끼. 쓰레기 새끼. 쓰레기 새끼.

말만 번지르르 했지, 분명 나를 아기 낳는 고기 인형 취급하고 있는게 틀림 없었다.

...아무리 사전 준비를 했다고 해도, 그딴 놈의 좆에 느꼈다는 사실이 혐오스러워.

똑똑.

"혹시, 들어가도 될까?"

제 욕을 하는 건 어떻게 알고 왔는지, 문 밖에서 용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치를 보는 둘에게 문을 열어줘도 좋다는 의미로 고개를 까딱이니, 엘리가 종종 걸음으로 다가가 잠긴 문을 열어주었다.

"...안녕."

"안녕 못해."

반사적으로 불퉁거리는 말이 튀어나갔다.

꺼지라고 소리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참았으니 괜찮지 않을까.

저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괜찮아?"

"아니."

지금 이 꼴을 보고도 저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걸까.

신경질적으로 용사를 노려보니, 찔끔하며 고개를 돌린다.

그게 마음에 안 든다는 거야.

차라리 끝까지 나쁜 놈으로 있었다면 이 정도로 화가 나지는 않았겠지.

'왜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데.'

아니, 진짜 미안해 하고 있는 건가?

그러면, 대체 왜 미안해 하고 있는 건데?

차라리 뻔뻔하게 나왔다면 또 몰라, 저런 식으로 정말 자기가 잘못했다난 듯이 구니까 마음 편하게 미워하지도 못하겠다.

.......짜증나게.

"과일이라도 사올까 싶어서..."

손에 들린 장바구니를 흔들어 보인 용사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는구나.

내가 지금까지 왜 아무것도 안 먹었겠어.

그리고, 왜 토했겠어.

먹는 족족 구역질이 치솟으니까 그랬겠지!

"...당장 치워라. 필요 없으니까ㅡ"

'...어라.'

매정하게 용사의 팔을 쳐내려는 순간, 새콤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역하지 않고 자극적인게 뭔가... 뭔가 뭔가인데.

시선을 돌려 장바구니를 바라보니 여러 과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시선을 사로잡는 건 다름 아닌 사과.

'...녹색.'

녹색 사과.

얼마 전에 너무 시다고 제대로 먹지도 못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꼬르륵.

"필요 없으면 다시 가져갈게."

"아니, 잠, 잠깐만 기다려라!"

몸을 돌리는 용사의 옷자락을 붙잡는다.

배, 배가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그냥 가려고 해?!

분명 고의가 틀림 없었다.

저 얼굴에 그려진 미소가 바로 그 증거였다.

"...이리 줘."

마치 강탈하듯이 장바구니를 품에 가져온다.

여러 색의 과일들 사이에 보이는 녹색 사과를 천천히 들어올려, 그 매끈한 표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이게 왜 이렇게 맛있어 보이는 거지.'

천천히 입을 벌려 한 입 베어물자 아삭, 하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음, 그러니까, 음...

"......맛있구나."

평범하게 맛있었다.

지금까지 먹는 족족 다 토해내던 몸뚱이도 이것만큼은 마음에 든 듯 싶었다.

정확히는 뱃속의 아기의 마음에 들었다는게 맞는 말이겠지만서도.

"마왕님, 괜찮으세요? 용사가 준 과일이니 독이 들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제가 직접 확인을ㅡ"

"아, 아리엘 씨에게 입술 들이밀지 마세요!"

내 입술을 노리고 달려드는 할리벨을 엘리가 뜯어말렸다.

며칠 전부터 계속 이런 꼴이었다.

한쪽은 나한테 달려들고, 다른 한쪽은 그걸 붙잡고.

그러고는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머뭇머뭇 내 눈치를 보는데, 덕분에 심심하지는 않았다.

"...계속 그러셨다가는, 또 그때처럼 만들어 드릴 테니까요?"

"으, 읏?! 그, 그건 방심해서 그렇게 된 거니까 노 카운트야, 노 카운트!"

약기운이 몸에 남아있어서 그렇게 된 거라고!

엘리의 말에 얼굴을 붉힌 할리벨이 빽빽 소리를 질렀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파닥거리는 날개가 그녀의 심정을 대변해주고 있었지만, 딱히 위협적이지는 않았다.

"신경 사나우니, 이제 그만 나가다오."

점점 시끄러워지는 주변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선언했다.

누가 됐던지 일단 방에서 나가.

괜히 짜증이 나고 신경질이 돋는게,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둘에게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용사는 뭐, 싫은 소리를 들어도 싸고.

"그러면, 몸조리 잘 하세요. 마왕님."

"불편하신 곳 있으면 꼭 부르시구요, 알겠죠?"

신신당부를 하는 두 사람에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언가 할 말이라도 있는 듯 머뭇거리는 용사를 끌고 나가는 엘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방 안을 채우는 정적에 스르르 몸을 맡겼다.

이제야 조금 조용해졌구나.

"...아가."

한숨 섞인 중얼거림이 흘러나온다.

"엄마가 진짜 힘들어서 그런데, 조금만 자게 해주면 안 될까?"

지금 당장 잠에 들지 않는다면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거리 감각이 요상해지고 가끔씩 몸이 말을 듣지 않는게, 이제는 버티는 것도 한계인 듯 싶었다.

"...고맙구나."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점점 감겨지는 눈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자게 해줘서 고마워.

눈을 감은 즉시 졸음이 몰려와, 내 정신을 어둡게 물들였다.

***

"틀림 없어. 틀림 없어. 이건 분명......"

마법사의 마나야.

심장을 타고 흐르는 떨림이, 근처에서 느껴지난 마력의 태동에 환희하고 있었다.

잃어버린 너의 동족이 돌아왔다.

그러니 맞이하고, 기뻐해라!

"스승님, 일지도 몰라."

아니, 반드시 스승님이겠지.

이 정도로 농밀한 마나를 가진 아기가 마탑의 다른 어중이 떠중이들일 리가 없었다.

확실해.

내 영혼을 걸고 장담할 수 있어.

"...내가, 내가 지켜야만 해."

아무리 스승님이라고 하시더라도 아기인 상태에서는 연약할 테니까, 내가 지켜줘야만 한다고!

하지만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 저 두 년들이 문제였다.

거기에 잠조차 자지 않는 마왕까지.

"어떻게든, 어떻게든 스승님을 모셔와야 해..."

다른 녀석들에게 스승님이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어.

스승님의 처음은 그 무엇이라도 내 것이어야만 해.

첫 제자도, 첫 사랑도, 첫 애인도, 하물며 태어나는 모습을 보는 것까지 전부!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당장에라도 쳐들어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이겨낸다.

몸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마왕이었으니,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잠에 들 터였다.

그래,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되는 거야.

지금까지 참아왔는데 그 조금을 못 참을까?

"스승님, 스승님도 기대하고 계시죠?"

저와 다시 만나는 것을 말이에요.

빙긋 미소지은 에밀리가 커다란 고깔모자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다시 만나면,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하는 거야.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당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고.

"당신만이 제 전부였으니까."

달 하나만 우두커니 떠오른 어둠 속에서, 에밀리의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진한 집착의 색이었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