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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86화 (86/342)

Chapter 86 - 사랑하는 나의 스승님.(6)

"...아."

다시 돌아온 아기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라고 한다면 텅 빈 머리와 등, 그리고 엉덩이.

마지막으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열기까지.

차가운 피부 너머로 느껴지는 따스함만이 픔 안의 생명이 살아있다고 알려주는 증거가 되어주었다.

'분명, 살았는데.'

살아서 다행인데, 왜.

왜 이렇게 슬픈 걸까.

"아, 아아아아아......"

아기의 머리를 어루만지자, 깔끔하게 잘려진 단면이 손가락 끄트머리에서 느껴졌다.

날개가 있던 부분도, 꼬리가 있던 부분도 전부 그 흔적이 남아있어서, 나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런 못난 엄마라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내 아가...

"곧 있으면 깨어날 거야."

"...흑, 흐아....."

악마의 속삭임에 안심하는 스스로가 어찌나 혐오스러운지 모르겠다.

곧 깨어난다는 말을 듣고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꼴이라니.

...바보구나, 나.

"자, 그러면 시작 해야지?"

"...무엇을 말이냐."

갑자기 튀어나오는 말에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시작한다난 건데?

고문? 아니면 때리기라도 할 거야?

머리에 열이 올라서 그런지 시야가 거뭇거뭇했다.

아무래도 뇌가 질척하게 녹아서 미쳐버린 듯 싶었다.

"낳아야지. 스승님이 태어날 때까지."

"...뭐?"

미쳤어.

진짜, 미쳤다고.

"왜 그런 표정이야? 그런게 아니라면 너를 굳이 왜 살려두고 있겠어?"

설마, 내가 다른 년들처럼 너를 돌봐주거나 그럴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그런 말을 하며 내 다리를 짓밟는 마법사에 눈을 꼭 감았다.

...참아야 해.

이딴 녀석에서 비명 한 조각 따위, 줄 리가 없잖아.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다리 하나 정도는 망가뜨려 놓는 편이 좋으려나?"

"아극, 아아아아아악?!?!?!!!"

우득, 하는 소리와 함께 다리에서 격통이 느껴졌다.

...뭐야, 이게.

순식간에 퉁퉁 부어오른 다리를 눈에 담으며, 입으로는 마음껏 비명을 내질렀다.

얼마 전에는 아기를 낳다가 죽을 뻔한 주제에 목청도 좋구나.

"아, 아흐, 흐으..."

"이 와중에도 아기를 놓치지는 않는구나."

그런데, 앞으로도 그럴까?

마법사의 얼굴이 천천히 가까워졌다.

사람이 아닌, 단순히 아기를 낳는 모판을 바라보는 듯한 무기질적인 눈빛에 이빨이 딱딱 부딪혔다.

"다가, 오지 마..."

다가오지 마.

다가오지 마.

더 이상, 나한테 다가오지 말란 말이야...

***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마음을 정했다는 뜻이지?"

"...그래."

새하얀 김이 솟아올라오는 찻잔을 들어올린 에밀리가, 상대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레이나. 숲의 종족인 엘프의 생존자 중 하나.

세계수에 미쳐있고, 또 미쳐있는 존재.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당장 네가 할 일은 없어."

알고 있다.

이쪽은 그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한 예비라는 것 쯤은.

세계수의 부활을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테니, 분명 본인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게 틀림 없었다.

"잠시 마왕의 상태를 확인해봐도 되나?"

"마음대로 해."

제 질문에 차를 홀짝이는 에밀리를 바라보다가,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작은 불빛에 의존해 주변을 밝혀둔 복도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상한 그림들이 걸려있었다.

땅바닥을 검게 물든 잿가루를 뚫어내자, 그나마 깨끗한 바닥이 그녀를 맞이해왔다.

"...마왕, 안에 있나?"

가장 끝의 문.

작은 노크 소리가 마치 우레와도 같이 복도를 울렸지만, 안쪽에서 대답이 돌아오는 일 따위은 벌어지지 않았다.

오로지 침묵만이 가장 커다란 소음으로 남는 장소.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레이나가 손잡이를 붙잡고는 그대로 문을 열었다.

"아, 아으..."

"......"

모습이라고 할까, 아니면 광경?

그것도 아니라면, 참상이라는 표현이 맞으려나.

생기를 잃은 눈동자로 고개를 떨군 마왕의 주변으로 희어멀건 액체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마왕."

"..."

"괜찮은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의 꼴을 보니 절대 정상적이지는 않았겠지.

코를 찌르는 정액 비린내에 표정을 찡그린 레이나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왕."

신발의 바닥에 쩍, 하고 붙었다 끈적한 흔적을 남기고 떨어지는 정액.

마치 화풀이라도 당한 듯 둥글게 부풀어 오른 배는 곧 터질 것처럼 거대했다.

...설마 다른 녀석들에게 범해진걸까.

아니, 에밀리 성격에 그런 성가신 일을 할 리 없지.

'정액을 구해와서, 억지로 주입했군.'

투명한 막 같은 것이 그녀의 균열 앞을 꽉 막고 있어서 내용물이 넘치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조금만 참아라."

천천히 손을 뻗은 레이나가, 마왕의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 뒤에 숨겨진 황금빛 눈동자는 그녀를 시야에 담았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빛나지 않았다.

...심각하구나.

분명, 에밀리를 그냥 놓아둔 내 잘못도 있겠지.

"흐, 흐으아아아아악....."

힘을 줘서 얇은 막을 깨뜨리고, 천천히 마왕의 복부를 내리누르니 끈적한 정액이 울컥울컥 쏟아져 내렸다.

꽤 고통스러웠는지 마왕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일단은 배에 들어찬 것들을 빼내는게 우선이었다.

내장이 지속적으로 압박 당하면 썩을지도 몰랐다.

"잘못,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품에 안긴 아기를 최대한 숨기고는 고개를 꾸벅꾸벅 숙여댄다.

에밀리가 한 짓들에 충격을 많이 받았는지, 마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잘 봐라. 나는 에밀리가 아니야."

"...으, 아."

"아기를 데리고, 여기서 빠져나가야 하지 않겠나. 응?"

변덕이라고 하기에는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순수한 호의라고 하기에는 또 애매했고.

아직도 스스로의 마음을 정의내리지 못해, 마음가는대로 행동하는 중이었다.

'정신을 차린게 아니지.'

자신은 여전히 세계수에 미친 상태였다.

180도 돌아버린 정신이 이제는 아주 360도까지 돌아서 정상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러니, 이건 그저 광인이 부리는 하나의 변덕이다.

나에게 있어서 세계수의 부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을 리 없으니까.

"자, 내 몸에 매달릴 수 있겠나? 그 정도도 힘들다면 어쩔 수 없이 안고 가야만ㅡ"

"설마 했는데."

들키지 않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생각보다 더 빨리 들켜버렸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스산한 목소리에, 레이나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다른 이들에게 알리는 편이 더 나았을까.

"왜 그렇게 멍청한 선택을 하는 거야? 너도 마왕이 마음에 들거나 해? 세계수의 부활을 포기할 정도로?!"

"세계수의 부활을 포기한 적 따위 없다."

결코 그런 적도 없고, 결코 그러하지도 않을 터였다.

세계수의 부활이란 숲의 일족에게 있어서 하나의 거대한 사명이나 다름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레이나가 마왕을 구하려고 하는 이유는, 그래.

'레이나, 산모는 그게 누구라도 최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할 존재랍니다.'

...그 목소리.

잔잔한 목소리로, 가르쳐주던 그 부드러운 음성이 아직까지 귓가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왕녀님, 당신의 그 한 마디가 저를 이 정도까지 흔들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세계수보다도요?'

'...그건.'

당신의 마음이 향하는대로 하시길.

그래, 그런 이야기였지.

산모가 보호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세계수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계를 아우르는 어머니이자, 생명을 낳는 산모였기 때문이었다.

"산모란 곧, 작은 세계수와도 같지."

제 등 뒤에 숨은 마왕의 살결을 느끼며, 레이나가 선언했다.

지금까지 무엇을 고민한걸까.

답은 진작부터 나와있었는데, 대체 무엇을 망설인걸까.

'정말 그녀가 마왕군들에게 희생된 이들을 전부 낳는 것이 맞다면...'

그렇다면 더더욱 지켜야 할 것이 분명했다.

그 상대가 설령 자신과 같은 상실의 고통을 느낀 동지라고 할지라도.

"너라면 나와 같은 길을 걸을 줄 알았는데, 안타깝게 됐네."

"..."

허공에 마법진이 새겨지고, 활을 뽑아든다.

순식간에 전투 태세가 된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상대에게서 틈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그걸로 끝.

"어째서, 나를 지키는 것이냐."

그러던 와중, 등 뒤에서 연약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본인을 지키는 것이 어색하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라는 것처럼 그 목소리에는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래, 어쩌면 이런 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본인이 상상하던 마왕의 모습과 한참이나 동떨어진 존재.

그런 존재가 정말 상상 속의 마왕처럼 잔혹한 일들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이, 현재 그녀의 행동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에밀리의 속을 긁어낼 수 있는, 본인이 내린 답.

"네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아리엘.'

망설임 없이 말을 꺼낸 레이나가 당당한 모습으로 선언했다.

다른 동족들이 보았다면 아연해 할 법한 발언이었지만, 이런 말을 직접 입 밖으로 낼 수 있다는 것애 묘한 자부심까지 들었다.

엘프가 마왕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다니, 정말이지...

"이놈이고 저놈이고 죄다 저 년에게 홀려서는... 그냥, 그냥, 그냥 전부 다 죽어버려어어어!!!!!!"

붉게 충혈된 눈동자와 마주함과 동시에, 화염의 폭풍이 몰아쳤다.

마음에 든 이를 구하기 위한 전투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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