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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인 만큼 낳는 마왕이 되었다-87화 (87/342)

Chapter 87 - 사랑하는 나의 스승님.(7)

마을의 어귀. 중앙. 그리고 마을 바깥의 숲.

그 모든 곳을 둘러봤지만, 마왕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나 싶다가도, 그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에 다시 마을로 돌아온다.

'대체 어디로 간 거야.'

본인의 직감이 일러주는대로라면, 분명 마을 어딘가에 있을 터였다.

하지만 어디에?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 앓던 찰나에, 용사가 시선을 돌렸다.

"설마..."

완전히 불타 잿더미가 되어버린 한 건물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다른 사람들이 신경쓸 법 한데도 불구하고, 폐허 근처에는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치워낸 것처럼.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었나.'

확실히, 교단의 지하라고 한다면 그녀의 공방으로 쓰기에도 충분할 터였다.

그 기괴할 정도로 넓고, 멀리 뻗어져 있는 장소는 누군가를 숨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니까.

"제발, 무사해 줘."

잿더미 위에 손을 올린다.

천천히 팔을 흔들자 짙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는 문짝이 힘 없이 떨어져 나갔다.

멀쩡한 것 하나 없이 싸그리 태워버린 불꽃이 아직까지도 그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전부 네 탓이야, 아서.'

그래, 그들의 관계 또한 더 이상 지속될 수 없겠지.

지금까지 함께해왔던 정으로 인해 놓아두었지만, 이런 행동은 선을 넘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니, 선이라면 옛적부터 넘어왔었지.

그저 자신의 멍청함이 여태껏 그녀를 놓아두었을 뿐이었다.

"혼자 가는 거야?"

"..."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잠시 발걸음을 멈춘다.

어느날 갑자기 마왕이 데려온 마족.

언젠가, 제 꿈에 나타나 아리엘의 행새를 하며 정기를 빨아먹으려고 했던 서큐버스였다.

"마왕님을 구해서 뭐, 백마 탄 왕자님 역할이라도 하려는 건가? 응?"

잔뜩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용사의 귓가에 맴돌았다.

네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역겨워.

이게 나 뿐만의 생각인 것 같지?

마왕님께서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계실걸?

"에밀리는 위험해."

그러니까, 나 혼자 감수하는게 맞겠지.

짧은 읊조림에 용사의 발치에 쌓여있던 잿더미가 무너져 내렸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백마 탄 왕자?

위기 속에서 등장한 구원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엘리랑 같이 기다리고 있어. 반드시 구해서 돌아갈 테니까."

"...짜증나, 진짜."

성검은 뽑아들지 않았다.

같잖게도, 상대에게 협박하는 듯한 행동을 하고 싶지 않다는게 그 이유였다.

그런 제 모습을 보며, 할리벨이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너란 인간은 정말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겹지만ㅡ"

구할 사람이 너 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확실하게 구해내도록 해.

증오로 물든 두 눈을 마주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마족과 인간의 관계는 인간이 마족을 증오하는 쪽이었을 텐데.

"안심해."

사람 하나 구할 수 없다면, 그 누가 자신을 용사라고 부를까.

***

밀폐된 공간에서 싸운다면 과연 어느 쪽이 유리할까.

제 옆구리를 스치듯 지나가는 얼음 창에 레이나가 이를 악물었다.

궁수와 마법사.

둘 다 내키지 않은 장소였지만, 분명 궁수인 제쪽이 더욱 불리했다.

하물며 이 장소가 공방화가 끝난 장소라면 더더욱.

"그만 뛰어다니고 가만히 잡히는게 어때?!"

"...큭."

저번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활을 들고 있다고 한들 달라지지 않았다.

화살 따위는 닿지 않는다.

차라리 손에 들려있는 것이 검이었다면 근접전이라도 펼쳐봤을 텐데.

"마왕이 있다는 걸, 잊은 거냐?!"

"그게 뭐?"

마왕의 몸은 이미 얼고, 불타고, 상처가 난 채였다.

그 정도가 심하지 않아 말을 참고 있었지만, 점점 강해지는 마나의 파동에 결국 입을 열었다.

이러다가는 마왕이 죽어.

죽으면, 네가 그토록 바라던 스승은 대체 누가 살리지?

"너도, 마왕도,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을 죽여버리고 나도 죽어버릴 거야."

"...미쳤군."

"이건 다 네 탓이라고, 알아?"

레이나의 시선을 받은 마왕이 몸을 웅크렸다.

더 이상 저 저주 받을 시선을 받았다가는 제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 것만 같았다.

몸을 움직여, 에밀리의 시선에서 마왕을 가려냈다.

"너는 덜 미쳤어. 그게, 네 패인이 될 거야."

그래, 누가 봐도 이쪽보다는 저쪽이 훨씬 더 미쳤겠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마수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온 이상, 마수를 죽여야만 빠져나올 수 있을 터였다.

'그러니, 죽일 각오로 임한다.'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나무 한 그루도, 바람 한 점도 불지 않는 이 곳에서 정령들의 도움을 기대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 원래라면 분명 그랬겠지.

[불이여, 그 분노를 지금 내 손에.]

얼마 전에 불타올랐던 교단의 건물이었기에, 아직 불의 정령들이 남아있었다.

그 희미한 흔적을 손에 둘러 화살에 재운다.

가소롭다는 듯 바라보는 시선을 무시하고는 상대의 머리를 향해 활을 겨눈다.

'어쩌면, 이곳이 내 발길이 닿는 마지막 장소가 될지도 모르겠군.'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가, 빠른 속도로 튕겨나갔다.

***

이제 싫어.

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거야?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흑..."

귀를 틀어막았음에도, 폭음이 고막을 뚫어낼듯이 울려댔다.

태어나서 처음 들어보난 굉음에 쭈뼛쭈뼛 소름이 돋아났다.

...싫어. 이제 싫단 말이야.

"누가, 꿈이라고 해줘."

반쯤 기듯이 움직여, 구석진 자리에 몸을 파묻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이곳에서 사라지고만 싶었다

아무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것 마냥, 그렇게.

'눈을 감았다가 뜨면 현실일 거야.'

이런게 현실일 리가 없잖아.

그렇지?

"흐응... 흐앙..."

"...아."

하지만, 그런 내 생각 따위는 순식간에 짓밟혀 사라졌다.

자그맣게 울리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망상에 빠져있던 내 정신을 현실로 끄집어내 그대로 내동댕이쳤다.

"아가... 깨어, 났구나."

아이의 홍옥과도 같은 눈동자가 내 모습을 담아냈다.

예쁜 아이구나.

아기임에도 불구하고 동그랗게 잘 빠진 모양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미안해. 이런 상황에 깨어나게 해서 미안해..."

이렇게 되면 포기할 수 없게 되어버리잖아.

왜 나를 놓지 못해서 안달인데.

이제 조금, 놓아주면 안 돼?

"아리엘, 피해라!"

"...아."

화염이 달린다.

멀리서도 느껴지는 열기에, 몸이 우뚝 굳어버렸다.

아니, 애초부터 움직이지 못하는 몸뚱이었기에 피하고 싶어도 피하지 못했겠지.

마치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아귀와도 같이 뻗어진 붉은색이, 그대로 내 몸을 집어삼켰다.

아니, 집어삼키려고 했다.

"......레이나?"

거울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으로 흩널리는 파편이, 빛을 받아 사방으로 그 줄기를 흩뿌려댔다.

그러고는 쓰러진다.

반쯤 탄 검댕이 내 앞으로 가라앉았다.

짙은 재의 향기에 마약이라도 한 듯 시야가 번쩍였다.

뭐야.

뭐야, 이게?

"...레이나."

"......"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느린 심장 박동.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치명상.

멍하니 손을 뻗어 팔을 부여잡자, 뜨거운 열기가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거짓말.

"거짓말 하지마, 응?"

꺼져가는 생명의 온기가 내 심장을 무겁게 짓눌렀다.

죽어, 죽어버려.

너 따위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생명체다.

봐, 너 같이 쓸모 없는 걸 구하려다가 이렇게 죽어버렸잖아.

안 그래?

"...아리, 엘."

"마, 말하지 말거라. 이대로라면 죽어ㅡ"

죽어버릴, 거야.

잿더미가 손의 형상을 취해 그대로 내 목을 낚아챘다.

뇌가 마비되는 듯한 기분에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팔을 휘적였지만, 잡히는 건 없었다.

...네가 왜.

"...미안했다."

왜 네가 사과하는데.

내가 잘못했는데, 왜 네가 사과하냐니까?

내가 피했으면 불덩이에 맞을 일도 없었잖아.

그런 꼴로 바닥에 누워있지 않아도 됐잖아?!

"마, 마왕을 감싸다 죽어?! 하, 하하하하하!!!!!"

광소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미친 마법사와 미친 마왕.

그리고 잿더미가 된 엘프.

"...부디,"

행복하길.

"......"

시야가 붉게 물든다.

투둑, 하고 떨어져 내리는 붉은 핏방울이 레이나의 얼굴을 수놓았다.

힘 없이 들어올려진 손이 내 얼굴을 쓸어내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잿가루 위에 곤두박질 쳤다.

"레이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것이 그녀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밖에 없었다.

"레이나, 제발..."

어깨를 붙잡는 순간, 검게 타오른 살결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마치 파도를 만난 자그마한 모래성처럼 그녀의 몸체가 허무히 바스라졌다.

'그러게, 그러게 왜 막아선 거야.'

그냥 내가 죽게 뒀으면 됐잖아.

아니면, 스스로가 죽더라도 세계수가 부활할 수 있는 가능성만큼은 남겨두고 싶었던 거야?

산산히 부서진 거울 파편들 속에, 내 얼굴이 비쳐보였다.

수십 개의 단면에 비친 얼굴은 양 눈에서 피눈물을 쏟아내며 기괴한 분위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하, 하하."

좋은 생각이 났어.

헛웃음이 터져나온다.

내장 곳곳에 스며든 절망이, 검은 희망이 되어 손아귀로 전해졌다.

떨림이 멎은 팔이 뻗어져, 그대로 가장 가까운 파편을 잡아챘다.

어찌나 힘을 줬던지 피가 베어나올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게 아니었다.

"...죽인 만큼, 낳는다."

불현듯 떠오른 그 한 마디와 함께, 손에 쥐여진 파편이 빠른 속도로 곤두박질쳤다.

***

[앞으로 낳아야 할 아이의 숫자 : 999,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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